콘텐츠로 건너뛰기

극단적 선택은 왜 비극인가

이맘때가 되면 생각나는 일이 있다. 13년 전 이제 막 서른이 되었던 나는 IT 스타트업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직원 11명의 조그만 회사였는데, 스마트폰으로 환자와 의사를 연결해 보겠다는 포부로 겁도 없이 도전한 일이었다. 하지만 좋은 시절도 잠시, 세상일이 종종 그러하듯 생각처럼 풀리지 않았다. 어느새 나의 가장 큰 목표는 세상에 혁신을 가져오는 게 아니라 직원들의 통장에 월급을 제때 입금해 주는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미래가 없는 상황. 도망치고 싶었다. ‘내가 사라지면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라고 깨닫고 정신이 번뜩 들었다.

직원들 월급날이 다가오면 나는 의사 면허를 밑천 삼아 아르바이트에 나섰다. 다만 진료 경험이 없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른 의사들이 기피하는 일뿐이었다. 새벽부터 승합차에 몸을 싣고 시골 마을로 떠나는 출장 검진이었다. 그날 향했던 곳은 좀 특별하다면 특별한 곳이었다. 대성동 마을. 휴전선 비무장지대에 있는 곳이라고 했다. 검문소를 몇 번 거치고 나서야 비로소 금단의 땅에 들어갈 수 있었다. 몸은 고됐지만, 새로운 경험을 한다고 생각하니 또 그런대로 괜찮았다. 동네는 우리나라 어딜 가나 볼 법한 평범한 농촌이었다. 그렇게 마지막 어르신의 진료를 모두 마치고 나니 오후가 되었다. 이제 다시 돌아가기 위해 주섬주섬 짐을 챙기고 있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사이렌 소리가 공기를 가르기 시작했다. TV를 켜니 섬처럼 보이는 곳에서 시커먼 연기가 피어오르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엄중한 표정의 아나운서가 지금 북한에서 연평도로 기습 포격을 하고 있다는 내용을 전했다. 멀지 않은 곳이었다. 무서웠다. 이렇게 죽는 건가. 죽기 전에 지난 삶의 순간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고 하더니, 정말 그랬다. 두 손을 꼭 맞잡고 제발 여기서 살아 나갈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 다행히 얼마 후 상황은 진정되었고, 우리는 비무장지대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날 이후 많은 것이 바뀌었다. 나는 가장 먼저 회사를 정리하였다. 직원들에게 퇴직금을 주고, 새로운 직장을 알아봐 주었다. 그다음, 비록 동기들보다 많이 늦은 나이였지만, 인턴 레지던트 과정을 시작하였다. 다시 주어진 삶, 새로운 가능성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날 이후 다시는 나약한 생각을 품지 않았다.

요즘 들어 부쩍 신문 사회면에 누군가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뉴스가 많이 보인다. 어느 유명인의 비극적인 소식이 언론을 타고, 그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또 다른 누군가의 죽음이 뒤를 잇는다. 사실 이것이 어제오늘의 문제는 아니다. 보건복지부와 한국생명존중희망재단이 공동으로 발간한 ‘2022년 자살예방백서’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는 매년 1만2906명, 매시간 1.5명이 극단적 선택으로 삶을 마감한다고 한다. 교통사고에 의한 사망자의 4배를 넘는 수준이다. 이런 현실을 두고 사람들은 말한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나쁜 것이라고. 그래서는 안 된다고. 그런데 그런 의문이 들었다. 그들 나름의 이유가 있을 텐데, 그걸 무조건 억누르려고 한다고 해서 그 생각을 돌릴 수 있을까. 그게 과연 가능할까.

자, 여기에 맑은 물이 담긴 유리잔이 있다. 그런데 흙이 한 줌 들어가서 흙탕물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이 물을 다시 깨끗하게 할 수 있을까. 숟가락으로 컵에 담긴 흙을 퍼내면 될까. 그렇지 않다. 그것은 결코 물을 맑게 만들지 못한다. 극단적인 생각도 마찬가지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이제, 깨끗한 물이 가득 담겨있는 물병을 가져오자. 그다음 거기에 담긴 물을 흙탕물이 담긴 컵에 힘껏 들이붓자. 그럼 물병에서 쏟아진 맑은 물이 컵의 더러운 물을 밖으로 밀어내고, 결국 컵 속의 물도 전처럼 맑고 투명한 빛을 되찾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우리는 흙탕물을 억지로 제거하려고 애쓸 것이 아니라, 그것을 대신할 맑은 물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한다.

그럼 우리가 지금 막다른 곳에 서 있는 이들의 마음속에 부어야 할 깨끗한 물은 무엇인가. 첫 번째로 ‘겸손’이다. 지금 알고, 믿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틀릴 수 있다는 걸 인정하는 게 바로 겸손이다. 그다음으로 ‘희망’이다. 오늘 예상하지 못한 어려움을 마주했듯, 내일은 지금 모르는 더 나은 상황이 올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감사’다. 힘들긴 하지만 그래도 이만하니 다행이라는 생각이다. 겸손, 희망 그리고 감사. 이것이 바로 우리가 벼랑 끝에 서 있는 이들의 마음속에 부어야 할 맑은 물이다. 그리고 이것을 다시 한 단어로 뭉치면 바로 ‘가능성’이다. 극단적 선택은 왜 비극인가. 바로 그 가능성을 송두리째 빼앗기 때문이다. 내가 연평도 포격전이 있던 날 집에 돌아와 비로소 깨달았던 바로 그 ‘가능성’ 말이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