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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사랑하지 않는 나에게

나를 사랑하지 않는 나에게

보이저 계획Voyager program은 태양계의 가장 끝에 위치한 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을 탐사하기 위한 계획이다. 1977년 9월 지구를 출발한 보이저 1호가 1990년 2월 지구에서 61억 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을 지나가고 있을 때였다. 당시 보이저 계획의 화상팀을 맡고 있던 저명한 천문학자 칼 세이건Carl Sagan은 주위의 반대와 기술적 위험을 무릅쓰고 보이저 1호의 카메라를 지구 쪽으로 돌리도록 지시한다. 그때 찍은 것이 훗날 ‘창백한 푸른 점Pale blue dot‘으로 이름 붙여진 사진이다. 이 사진에서 지구는 보일듯 말듯한 작은 점으로 나타난다.

창백한 푸른 점 : 61억 킬로미터 거리에서 촬영한 지구의 사진. 동그라미 속 희미한 점이 지구이다.
창백한 푸른 점 : 61억 킬로미터 거리에서 촬영한 지구의 사진. 동그라미 속 희미한 점이 지구이다.

이 사진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내가 이 세상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새로운 각도로 받아들이게 된다. 우리는 실로 아득한 시간과 공간의 교차점에 서있다. 그 곳에서 백 년이 채 안되는 삶을 살다 간다. 무한한 우주의 바로 이 공간에서 한시적으로 허락된 우리의 삶. 우리가 스스로 주인된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이다.

하지만 현실은 이런 희망과는 사뭇 다르다. 스스로 주인된 삶을 살기는 생각처럼 녹록치 않다. 당신은 하루 종일 당신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는 수많은 목소리와 시선에 시달리고 있으며, 끊임없이 세상의 기준에 맞추라는 회유와 설득을 마주한다.

학생이라면 공부를 잘해야 하고, 직장인이라면 인간관계도 챙기면서 업무 실적도 뒤쳐지면 안된다. 당신이 사회 초년생이거나 서비스직에 종사하는 경우, 상사나 고객으로부터 오는 갑질의 무게도 견뎌내야 한다. 사실 우리 모두는 너나 할 것 없이 이런 스트레스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삶을 살고 있다.

이 모든 스트레스의 근원이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삶을 남의 기준에 맞추려고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남의 기준에 맞추어서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해내려고 한다. 그러다 보니 남들은 당신 덕분에 만족스러운 시간을 보내는 동안, 정작 당신 혼자만 힘들어진다.

당신이 남의 기준에 맞추어 살아준다고 한들, 남들이 당신에게 고마워하는 것은 그때 잠깐 뿐이다. 감사하는 경우는 그나마 다행이다. 대부분은 당신의 희생과 배려가 있었는지도 모르고 지나간다. 그 부질없음을 위해서 언제까지 당신의 단 하나뿐인 삶을 소모할 것인가.

우리 모두는 인생을 처음 산다. 완벽할 수 없다. 그 점을 인식하고 완벽함에 대해 마음을 비우자. 완벽한 삶은 가능하지 않다.

우리는 살면서 조금만 발을 헛디뎌도 큰일이 날 것처럼 생각한다. 항상 조심조심 남들이 이미 간 길을 따라가며 도태되지 않고 살아가려 노력한다. 물론 실수의 순간에는 그 이후 따라올 혼란 때문에 걱정에 압도될 수 있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면 실수도 다시 회복된다. 더 중요한 사실은 그 과정에서 우리는 무언가 새로운 것을 하나 더 배운다는 점이다.

삶 자체가 배움의 과정이다. 배움은 남이 대신 할 수 없다. 당신 스스로 많이 느끼고 행복하게 살다가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 우리의 삶이다.

당신이 지금까지 애써 추구하고 있던 것들이 과연 당신 자신을 위한 것이었는지 되돌아보자. 지나고 보면 당신의 삶에서 큰 의미가 없을 누군가를 위해서, 페이스북의 ‘좋아요’ 표시 말고는 당신에게 해줄 것이 없는 익명의 다수를 위해서, 당신이 행복하기 보다는 행복해 보이기 위해서, 다시 없을 귀한 인생을 낭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자.

『나를 사랑하지 않는 나에게 박진영 지음 | 시공사 | 2016년 04월 15일 출간』에서 저자 박진영은 ‘어떻게 하면 우리가 스스로 주인된 삶을 살 수 있을지’ 심리학 연구로 밝혀진 이론을 토대로 설명한다. 뜬 구름 잡는 소리가 아니라 하나하나 오랜 기간 체계적인 연구를 거쳐서 도출된 결과들이다.

저자는 남의 기준에 맞추느라 허덕여온 당신이 스스로에게 더욱 너그러워질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당신의 인생의 주인은 당신 자신임을, 남의 시선이나 세상의 기준이 결코 당신을 흔들 수 없음을 깨닫게 한다.

아울러, 우리가 삶을 행복하게 사는 비결은 무언가 대단한 성취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을 느끼는 작은 순간들이 삶을 촘촘하게 채우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나는 이 부분에서 크게 공감했다.

나를_사랑하지_않는_나에게

하루 하루를 열심히 살아가지만 ‘과연 무엇을 위해서 살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드는가. 그것은 아마도 당신이 남에게 완벽하게 보이고자 지나치게 의식하기 때문은 아닐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기를 바란다. 지나치게 남을 의식하고 있다는 판단이 든다면, 더 이상 남의 기준에 맞춰서 살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라고 권하고 싶다. 당신 삶의 주인은 당신이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서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 당신이 남의 기준에 맞추어 살지 않고자 한다면, 당신도 남에게 당신의 기준을 강요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그래야만 남의 기준에 따라 살고 싶지 않다는 당신의 의지가 정당성을 가질 수 있다.

오늘날 사회 전반에 전염병처럼 번져있는 서로에 대한 ‘혐오’는 과연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바로 ‘나의 기준을 따르지 않는 남에 대한 반감’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가 아직도 이슬람 같은 타문화권에서 온 외국인들을 배척한다. 돈이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을, 반대로 없는 사람은 있는 사람을 혐오한다. 심지어는 성별이 다르다는 이유로도 혐오한다. 이 세상의 반은 다른 성별을 가진 사람인데도 말이다.

심리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타인을 혐오하는 사람들의 마음의 바닥에는 ‘남으로부터 인정을 받고 싶은 욕구’가 자리잡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인정 욕구는 그들도 남의 기준에 맞추어 살려고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던 경험에서 비롯된다. 결국 남을 미워하고 함부로 대하는 이들은 그동안 소외되고 억눌렸던 자기 자신의 처지를 남을 깎아내리면서 보상 받으려고 하는 것이다. 당신을 몸종처럼 부리는 직장 상사, 갑질하는 고객, 인터넷에서 여성 혐오를 아무렇지도 않게 드러내는 사람들. 모두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점을 이해하면, 타인을 혐오한다는 것은 타인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혐오감을 느끼는 마음이 병들었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결국 이들 혐오감의 근원은 자신의 삶을 남의 기준에 맞추려고 무리하다가 뜻대로 되지 않아 또다른 남에게 화풀이 하는 것이다. ‘종로에서 뺨맞고 한강에서 눈흘긴다’는 속담처럼 말이다. 부디 당신은 그렇게 되지 말기를 바란다.

당신이 남의 기준에 따라 사는 것을 거부하고 싶다면, 우선 당신도 남에게 당신의 기준을 강요하지 말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 현실적인 실천 방안이 있을까. 책에서 다룬 내용을 토대로 나는 세 가지 정도를 제시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타인에 대한 기대를 내려놓는다.

이전 글에서도 밝힌 바 있지만, 나는 타인에게 기대를 하지 않는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내 손으로 하는 것이 마음이 편하다.

타인에 대한 기대를 접으면 감정을 소모할 일도 없고, 미워할 이유도 없다. 또한 자신이 필요한 것을 자신의 손으로 한다는 것은 조금 더 책임감 있고 주도적으로 삶을 사는 방법이 아닐까 생각한다.

둘째, ‘내가 해봐서 아는데’라는 생각을 삼간다.

각자의 경험이 유한함을 알아야 한다. 사람은 제각각 성장 환경과 현재 놓여있는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이전에 비슷한 경험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다른 것에 그대로 적용할 수 없다.

‘이전에 내가 이렇게 했으니 너도 이렇게 해봐’ 식의 조언은 도움보다는 불필요한 혼란만 가중시킬 수 있다. 그런 생각이 든다면 그것을 말로 표현하기 전에 한 번 거르는 과정을 거칠 필요가 있다.

셋째, 내가 아닌 상대가 공감할 수 있는 위로를 한다.

당신 딴에는 좋은 의도로 위로를 건넸지만 오히려 반감만 일으켰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그 위로가 받는 사람 입장이 아니라 주는 당신의 입장에서 전해졌기 때문이다.

심리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신과 일치하는 시선으로 자기를 바라봐주는 사람들을 선호한다. 그 내용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말이다. 따라서 자존감이 무너진 사람들이 원하는 위로는 막연한 응원이나 칭찬보다 그들이 처한 상황이 충분히 어렵고 그들이 느끼는 곤란한 감정이 자연스러운 것임을 이해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렇게 세 가지만이라도 유념한다면, 타인에게 당신의 기준을 강요하는 실수를 미연에 방지하는데 다소나마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한다.

글을 마무리하자. 요컨대, 당신의 하나뿐인 삶, 남을 위해서 살지 말기를 바란다. 남에게 보여줄 완벽함을 위해서 허덕이지는 상황을 끝내야 한다. 누군가에게 보여주지는 않더라도, 소소하지만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순간들로 당신의 삶을 만족스럽게 채워가길 바란다.

그리고 양심이 있다면, 남도 당신의 기준에 맞추어 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자. 그 누구도 당신을 위해서 태어난 사람은 없다. 다 각자의 삶이 있다.

우리 각자의 삶 안에서 주인이 될 수 있을 때, 오늘날 사회에 독버섯처럼 번지는 혐오감도 눈녹듯이 사라질 것이다. 멀리서 보면 모래알처럼 작은 지구 안에서 어마어마한 시간과 공간의 확률을 뚫고 만난 우리들이다. 서로 존중하면서 살면 좀 좋은가. 칼 세이건이 ‘창백한 푸른 점’이란 제목의 사진을 통해서 전하고자 했던 메세지도 바로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나를 사랑하지 않는 나에게”의 6개의 댓글

  1. 아… 이런 글이 있었네요^^ 오래전 올라온 글이라 제가 읽지 못했었네요. 요 몇년동안 제가 궁금해 했던것에 대한 단비같은 해결책이 여기 있었네요! 두번 세번 읽었네요~

    내일부터 실천해보겠습니다^-^

    언제나 글 감사드립니다^^

  2. 모든 스트레스의 근원이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삶을 남의 기준에 맞추려고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남의 기준에 맞추어서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해내려고 한다. 그러다 보니 남들은 당신 덕분에 만족스러운 시간을 보내는 동안, 정작 당신 혼자만 힘들어진다. 동감가는 글 입니다 좋은책과 독후감 감명깊게 읽고 있습니다

  3. 몇 주 전부터 작가님의 서재를 접하면서 사회생활에 길들어진 저에게 다른 시선으로 생각하게 하는 즐거움을 주고 있습니다. 매번 댓글을 못 달아 드리겠지만 빠지지 않고 챙겨 보면서 감사드리고 있으니 연재하시는데 조금이나마 힘이 되시길 바랍니다ㅎ

  4. 제 삶의 정답이 여기 있었네요~
    누군가에게 결국에는 보이기 위한 수단
    관심 받고 싶은 욕망 때문에 페북을 하고
    있었네요ㅠ.ㅠ
    안타깝게도~
    남을 위한 삶이 아닌 소소한 나의 즐거운
    삶을 위해 살고파요~
    좋은글 감사합니다💕💕💕

  5. 딱 제가 살아온 과정의 글이네여ㅡㅡㅡ늘 주인공은나ㅡㅡ라고 하면서도ㅡㅡ잘 고쳐지질않네여ㅜㅜ
    고맙습니다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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