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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플루엔자, 예방접종이 최선의 방어

가을빛이 무르익었다. 길가의 벼 이삭은 고개를 숙이고, 코끝에는 풀 냄새가 감돈다.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공기가 계절의 변화를 알린다. 이 시기에는 우리의 몸도 달라진다. 피부는 건조해지고, 목구멍은 간질거리며, 면역력도 예전 같지 않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이 무렵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불청객이 하나 있다. 바로 우리가 흔히 ‘독감’이라 부르는 그것. 하지만 이 작은 단어 속에 숨겨진 진실을 들여다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심각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독감이 아닌 인플루엔자

많은 사람이 ‘독감’이라고 부르지만, 이는 잘못된 명칭이다. 마치 독한 감기쯤으로 여겨지는 이 질병의 정확한 이름은 ‘인플루엔자’다. 16세기 이탈리아에서 처음 사용된 이 단어는 ‘영향(influenza)’을 뜻하는 라틴어에서 유래했다. 당시 사람들은 이 질병이 천체의 영향이나 추위의 영향으로 발생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인플루엔자는 단순한 감기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질병이다.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우리 몸의 호흡기를 빠르게 침범하며, 고열과 함께 온몸의 근육을 아프게 만들고, 극심한 피로감으로 일상생활을 마비시킨다. 더욱 무서운 것은 그 전염성이다. 한 명의 감염자가 기침이나 재채기를 통해 주변 사람들에게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속도는 상상을 초월한다.

역사를 돌아보면 인플루엔자가 얼마나 위험한 질병인지 알 수 있다. 1918년 ‘스페인 독감’으로 불린 인플루엔자 대유행은 전 세계적으로 5천만 명 이상의 생명을 앗아갔다. 이는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사망자보다도 많은 숫자였다. 현재도 우리나라에서만 매년 2천 명 이상이 인플루엔자와 관련된 합병증으로 생명을 잃고 있다.

고위험군에게 더 치명적인 질병

인플루엔자는 특히 65세 이상의 노인, 5세 미만의 어린이, 임신부, 그리고 당뇨병이나 심장병 같은 만성 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들에게 더욱 치명적이다. 이들에게는 단순한 호흡기 질환을 넘어 생명을 위협하는 합병증으로 이어질 수 있다.

특히 노인의 경우 면역 체계의 약화로 인해 인플루엔자에 감염되면 폐렴과 같은 심각한 2차 감염의 위험이 크게 증가한다. 어린이들은 아직 성숙하지 못한 면역 체계 때문에 바이러스에 더욱 취약하며, 때로는 뇌염과 같은 신경계 합병증까지 나타날 수 있다.

더욱 주목해야 할 점은 인플루엔자가 개인의 건강 문제를 넘어 사회 전체에 미치는 영향이다. 한 명의 감염자는 평균적으로 1~2명의 새로운 감염자를 만들어 낸다. 이런 식으로 전파가 계속되면 병원과 응급실은 환자들로 넘쳐나게 되고, 의료진은 극한의 업무에 내몰린다. 결국 의료 체계 전체가 위기에 처할 수 있다.

과학이 만든 선물, 예방접종

다행히 현대 의학은 이 위험한 적에 맞서는 강력한 무기를 만들어 냈다. 바로 예방접종이다. 인플루엔자 백신은 70년 넘게 사용되어 온 검증된 방법으로, 전 세계적으로 매년 수억 명이 안전하게 접종받고 있다. 하지만 이 효과적인 방어 수단에 대해서는 여전히 많은 오해와 편견이 존재한다.

가장 흔한 오해 중 하나는 “예방접종을 하면 오히려 인플루엔자에 걸린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 사용되는 인플루엔자 백신은 불활화 백신이나 약독화 생백신으로, 질병을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은 완전히 제거되었다. 접종 후 나타나는 가벼운 발열이나 근육통은 우리 몸의 면역 체계가 바이러스를 기억하고 대응 능력을 기르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반응일 뿐이다.

“나는 건강하니까 접종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도 위험한 착각이다.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건강한 성인에게도 예상치 못한 타격을 줄 수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건강한 사람도 바이러스의 전파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내가 접종을 받는 것은 나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의 취약한 사람들을 보호하는 일이기도 한 이유다.

“100% 예방되지 않으니 의미가 없다”는 주장도 있다. 이것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어떤 백신도 100% 완벽한 보호를 약속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연구 결과에 따르면 예방접종을 받은 사람은 감염되더라도 증상이 훨씬 가볍고, 합병증 발생 위험이 현저히 낮으며, 특히 노인의 경우 치명률을 약 80%까지 줄일 수 있다고 보고되고 있다.
왜 매년 맞아야 할까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매년 면역을 피해 새로운 모습으로 변한다. 이 때문에 세계보건기구는 해마다 전 세계의 감시 네트워크를 통해 수집된 데이터를 바탕으로 다음 해에 유행할 바이러스를 예측하고, 그에 맞는 백신 조성을 권고한다.

또한 우리 몸에서 형성된 면역력도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약해진다. 일반적으로 인플루엔자 백신의 면역 효과는 6개월 정도 지속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작년에 접종했더라도 올해는 새로운 백신이 필요하다. 이런 이유로 인플루엔자 예방접종은 매년 새롭게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언제가 가장 적절한 시기일까? 바로 지금, 10월과 11월이 인플루엔자 예방접종을 받기에 가장 이상적인 시기다. 접종 후 충분한 면역력이 형성되기까지는 약 2주의 시간이 필요하고, 보통 12월부터 본격적인 유행이 시작되는 것을 고려하면, 지금이야말로 미리 준비할 수 있는 최적의 시간이다.

예방접종, 가족과 이웃을 위한 실천

인플루엔자 예방접종은 개인의 건강을 넘어선 의미를 가진다. 가족을 지키는 실천이자 이웃을 향한 배려이며, 안전한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기여다. 작은 주사 한 번이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다. 올가을, 인플루엔자라는 불청객에 맞서 현명하게 준비한다면, 안전하고 풍요로운 계절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2025년 10월 21일 대한제당에 실린 글입니다.1 저는 의사이자 작가로서 건강, 인문학 등을 주제로 집필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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