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변, 화장실에서 피를 봤다면

누구나 화장실에서 변을 본 후엔 자기가 방금 눈 대변을 한번 내려다보고 물을 내린다. 이때 핏방울이 붉은 잉크처럼 물 위로 퍼져나가고 있다면 적잖이 걱정스러울 수밖에 없다. 차라리 같은 피라도 손가락이 베어서 흐르는 피는 상처가 눈앞에 뚜렷이 보이니 아프긴 해도 뭘 해야 할지 알 수 있다. 반창고 잘 붙이고 나을 때까지 기다리면 되니까. 하지만, 별다른 통증도 없이 몸속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피를 보게 되면 걱정부터 앞서게 된다.

하지만 화장실에서 자기 대변에 피가 섞여 나온다는 걸 주위 사람들에게 물어보기도 참 그렇다. 물어본다고 해도 의사가 아니라면 정확한 답변을 해주기도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오늘은 화장실에서 피를 보고 남몰래 근심하고 있을 이들에게 도움이 될만한 글을 준비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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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변에 피가 섞여나오는 이유는 무엇인가?

피가 섞인 변 즉 혈변은 식도에서 시작해 위와 소장을 거쳐 대장을 지나 항문으로 이어지는 위장관 중 어딘가에서 출혈이 있다는 신호다. 다만, 항문에서 붉은색 피로 나타난다는 것은 대장이나 적어도 소장 이후에서 일어난 출혈일 가능성이 크다. 반면에, 소장보다 위쪽에서 발생한 출혈은 붉은색 피 보다는 새까만 흑변으로 나타난다.

평소에 아무런 증상도 없었고 배변 중에 통증도 없었는데 배변 후 변기에 붉은 핏방울이 떨어진다면, 일단 치질에 의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 다만, 치질 중에서도 항문 내부의 점막이 찢어지는 치열이 있을 때는 혈변과 함께 심한 통증을 느낄 수 있다. 참고로 치질은 치핵, 치루, 치열 등 항문에 생기는 질환을 모두 아우르는 말이다.

만약 복통과 설사를 동반하는 혈변을 보았다면 염증성 장 질환을 생각해볼 수 있다. 염증성 장 질환은 위장관에 만성 염증이 생긴 걸 말하는데, 궤양성 대장염과 크론병의 두 가지가 있다. 이때 염증이 대장 내벽을 손상시켜 출혈이 일어날 수 있다. 염증성 대장염은 완치의 개념이 없고 꾸준한 관리가 필요한 질환이기 때문에, 자극적인 음식을 피하는 등의 생활 습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증세가 심할 때는 장의 일부를 잘라내는 수술이 필요할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대변에 피가 섞여 나올 때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질환은 바로 대장암이다. 최근에는 우리나라 사람들도 서구화된 식습관으로 대장암 발병률이 증가하고 있다. 대장암이 있을 때는 설사, 변비, 잔변감이 동반되는 경우가 있는데, 사실 증상만으로 대장암을 알기는 어렵다. 그래서 가족력 등을 고려하여 정기적인 대장 내시경 검사를 받는 게 매우 중요하다. 특히 이전에 없던 혈변이 있다면 혹시 대장암에 의한 것은 아닐지 꼭 확인해 보아야 한다.

짜장처럼 검은 변은 무엇인가?

건강한 변은 흔히 황금색을 띤다고 한다. 대변에는 음식물의 소화와 영양분의 흡수를 돕는 담즙과 적혈구 성분 중 하나인 빌리루빈이 섞여 있는데, 이 두 성분 때문에 노란색에서 갈색을 띠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몸에 이상이 생기면 대변의 상태에도 변화가 생긴다. 그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흑변이다.

흑변은 말 그대로 검은색의 대변을 말한다. 흑변도 혈변과 마찬가지로 위장관 출혈의 결과로 나타날 수 있다. 다만, 흑변은 출혈된 혈액이 위장관 내의 세균에 의해 분해되어 혈변과 다르게 붉은빛을 잃고 검은색을 띠게 되는 것이다. 이 경우 흑변은 보통 심한 냄새를 동반하며 짜장처럼 아주 짙은 검은 색을 띤다.

한편, 모든 흑변이 위장관 출혈 때문에 생기는 것은 아니다. 빈혈약인 철분제제를 복용하거나, 소화성 궤양 약제로 사용되는 비스무트bismuth 제제를 복용하는 경우에도 흑변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약물에 의한 흑변은 위장관 출혈 후 흑변과는 약간 다른 특징이 있다. 철분제제에 의한 흑변은 짙은 녹색에 가까운 색을 띠고, 비스무트 제제에 의한 흑변은 출혈에 의한 흑변처럼 심한 냄새를 풍기지 않는다.

혈변과 흑변의 차이는 무엇인가?

위장관 출혈이 혈변으로 나타날지 흑변으로 나타날지는 출혈의 위치 및 출혈된 혈액의 위장관 내 체류 시간에 따라 결정된다. 즉, 십이지장과 소장의 경계 부위보다 상부에서 출혈한 경우에는 소장 및 대장을 거쳐 항문까지 배출되는 데 오랜 시간이 소요될 것이므로 혈액이 위장관 내의 세균에 노출되는 시간이 길어져 흑변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이에 반해 항문에 가까운 소장이나 대장에서 출혈한 경우에는 항문까지 배출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짧아 흔히 혈변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상부에서의 출혈이라 하더라도 대량 출혈이 발생하면 빠른 속도로 소장 및 대장을 거쳐 혈액이 항문으로 배출되므로 혈변으로 나타날 수 있으며, 대장 출혈이더라도 출혈량이 적어 천천히 배출되면 흑변을 보일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혈액이 위장관 내에서 5시간 이내로 머물면 혈변, 14~20시간 이상 체류하면 흑변의 양상을 보인다.

혈변을 보면 무엇을 해야 할까?

우선 어디서 피가 나오는지를 찾아야 한다. 위장관의 출혈 위치를 찾는 가장 빠르고 정확한 방법은 역시 내시경이다. 대변의 양상이 흑변인지 아니면 혈변인지 등을 참고하여 출혈 위치를 추정한 후 그에 따른 내시경 검사를 해야 한다.

여기서 한가지 유념할 점은, 원래 치질이 있던 사람이 혈변이 있을 때 치질에 의한 것이겠거니 하면서 그냥 지나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다른 이유 없이 배변 후 선홍색 피가 휴지에 묻어 나온다면 치질에 의한 출혈일 가능성이 상당하다. 하지만 만에 하나 대장암인 경우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한다.

혹시라도 앞으로 평소와 다른 흑변이나 혈변을 보게 된다면, 다소 번거롭더라도 그 원인이 무엇인지 적절한 검사를 받고 확인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화장실을 나서는 길에 변기 물 위로 퍼져나가는 피 한 방울, 하마터면 모르고 지나갈 뻔했던 대장암을 알리는 빨간불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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