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부모가 되어가다

신혼부부의 일상은 하루하루가 소꿉놀이 같았다. 일단 새로운 호칭에 익숙해져야 하는 것부터가 그랬다. 결혼 후 처음 며칠 동안은 ‘여보’라는 말도 입에서 잘 떨어지지 않았다. 말하는 사람만 그런 게 아니라 듣는 사람도 쑥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결혼하고 한 달 정도는 그런 어색함이 이어졌던 것 같다.

무얼 만들어 먹을지가 대화의 가장 중요한 주제인 것도 소꿉놀이와 닮은 점이었다. 우리는 각자의 직장에서 보내는 바쁜 일과 중에도 저녁으로 무얼 먹을지 카톡을 주고받으며 상의했다. 그렇게 메뉴가 정해지면 퇴근길에 마트에서 만나서 필요한 음식 재료들을 카트에 가득 담았다.

집에 돌아와서 방금 사 온 음식 재료들을 식탁 위에 펼쳐놓은 후 인터넷 검색으로 찾은 요리법에 따라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 우리는 각자 할 일이 거의 정해져 있어서, 아내는 음식 재료를 손질했고 나는 그 손질된 재료를 불에 올려서 조리했다. 그렇게 만든 음식들을 그릇에 담아 식탁 위로 옮기고 김이 솔솔 올라오는 그 모습 그대로를 스마트폰 카메라에 담았다. 이 모든 과정을 모두 마치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는 함께 자리에 앉아서 수저를 들었다.

그 무렵 경기도 광명에 스웨덴에서 왔다는 초대형 가구 매장이 문을 열었다. 등촌동의 신혼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그곳은 신혼집을 꾸미고픈 우리 부부의 갈증을 한 번에 해결해주는 오아시스 같은 곳이었다. 거대한 창고형 매장에는 다양한 가구부터 인테리어 소품까지 눈길이 닿는 곳마다 사고 싶은 것들로 넘쳐났다. 하지만 아내와 나는 사고 싶은 대로 다 사기에는 집이 좁다는 현실을 곧 깨달았다. 결국 위시리스트를 추리고 추린 끝에 인테리어용 나무 선반 두 개를 사는 거로 만족했다.


집에 가져온 나무 선반들을 벽에 설치하는 것도 결코 만만한 일은 아니었다. 나는 남편답게 전동 드릴을 들고 벽에 구멍을 뚫었다. 그런데 다 해놓고 보면 어딘가 조금씩 어긋나 있었다. 하는 수 없이 조금 옆에 다른 구멍을 다시 뚫었다. 하지만 한 걸음 물러서 보면 또 그 자리가 아니었다. 그렇게 시행착오를 거치며 콘크리트 벽을 거의 벌집으로 만들고 나서야 가까스로 선반을 벽에 고정했다. 아내는 그 선반 위에 결혼사진을 담은 액자를 가지런히 세워놓았다. 그렇게 해놓고 보니 약간의 과장을 보태 작은 카페 속에 들어온 듯했다. 고생은 했지만 그만한 보람이 있었다.

우리는 서로 더 많은 대화 시간을 가지려고 집에 TV를 두지 않기로 했다. 으레 TV가 있을 법한 거실 한쪽 벽은 책장으로 꽉 채웠고 맞은 편에는 조그만 소파를 들여놓았다. 그렇게 해놓으니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다. 결혼 전부터 아내와 나는 함께 살 게 되면 주말마다 집에서 팝콘을 나누어 먹으며 영화를 보려고 했다. 그런데 막상 TV가 없으니 그 계획을 실행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TV 없이도 영화를 볼 수 있을지 머리를 맞대고 방법을 찾아보았다. 그렇게 찾은 해결책이 책장 위에 롤스크린을 달고 소파 위에 빔프로젝터를 다는 것이었다. 다른 집의 방 하나 정도도 안 되는 작은 거실은 그렇게 둘만의 영화관이 되었다.

사실 30년 넘게 남으로 지내던 두 사람이 어느 날부터 한집에 살게 되면서 항상 웃고 지낼 수만은 없었다. 평생 각자에게 익숙해진 생활 습관을 어느 날 갑자기 버린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특히 집 안 청소를 두고 종종 의견이 갈렸다. 깔끔한 성격의 아내는 틈날 때마다 집안 곳곳을 쓸고 닦았고 나는 어떻게든 그 횟수를 줄일 방법을 찾으려고 머리를 굴렸다. 아내가 청소기 좀 돌리라고 하면 나는 10분 후에 하겠다고 하면서 이불 속으로 숨어들었다. 아내가 그 이불을 복도에 나가서 털고 오라고 하면 나는 그때부터 자는 척을 했다.

좁은 집에서 부대끼며 살다 보니 어느덧 ‘여보’라는 말도 입에 붙어가고 있었다. 나는 여느 때처럼 저녁 식사를 마친 그릇들을 모아 설거지를 하고 있었고 아내는 그 옆에서 방금 전 건조기에서 꺼낸 빨래들을 한 장 한 장 개고 있었다. 우리는 각자 맡은 일을 하면서 하루 동안 직장에서 있었던 일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갑자기 아내가 화장실 좀 쓰겠다며 일어섰다. 나는 그런가 보다 하며 아내가 돌아올 때까지 세제가 묻은 그릇들을 하나씩 물로 헹군 후 건조대에 올렸다.

잠시 후 아내가 화장실 문틈으로 얼굴을 빼꼼히 내밀고 나더러 잠시 와보라고 했다. 나는 설거지 중이니 그냥 거기서 말하라고 했다. 하지만 아내는 잠깐만 자기 쪽으로 와보라고 거듭 재촉했다. 나는 무슨 일인가 싶어서 고무장갑을 벗고 아내 쪽으로 다가갔다. 내가 화장실 문 앞에 다다르자 아내는 길이가 한 뼘쯤 되는 플라스틱 쪼가리를 보여주었다. 거기에는 붉은색의 두 줄이 그어져 있었다.


영화에서 이런 장면 뒤에는 남자 주인공이 기쁨에 겨워서 뛰어다니거나 여자를 안아주는 모습이 이어진다. 하지만 내가 실제로 그 장면 속에 들어가 보니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아내의 기분을 살펴야겠다는 것이었다. 아내의 기분이 어떤지도 모르고 혼자 기쁘다고 뛰어다니면 그건 분명 남편답지 못한 행동일 터였다. 하지만 나의 반응이 너무 무덤덤한 나머지 아내를 섭섭하게 해서도 안 될 일이었다. 나는 조용히 아내의 표정을 살폈다. 아내는 태어나서 처음 맞이하는 이 상황을 앞에 두고 들떠있지도 그렇다고 가라앉아있지도 않았다. 나와 부부로서 그리고 이제 부모로서 함께 걸어가야 할 삶의 여정을 마음속으로 담담하게 그려보는 듯했다. 나는 조용히 아내가 느끼고 있을 감정에 보조를 맞추었다. 그게 내가 남편으로서 그 순간에 해야 할 유일한 역할이었다.

아내와 나는 돌아온 주말에 집 근처의 산부인과를 찾았다. 집에서 차로 10분 정도 걸리는 제법 규모가 있는 여성병원이었다. 주말인데도 병원 안은 사람들로 무척 붐볐다. 주중에는 둘 다 일해야 해서 주말에 병원을 찾았는데, 우리 부부만 그런 게 아닌 듯했다. 우리는 접수 번호표를 뽑고 빈자리에 앉아 차례가 오기를 기다렸다. 접수를 마친 뒤에는 진료실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 오래지 않아 간호사가 나와서 아내의 이름을 불렀다.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진료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 넓지 않은 진료실에는 4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여자 의사가 앉아있었다. 우리는 의사에게 가볍게 묵례를 하고 맞은편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다소 긴장한 가운데 의사가 묻는 내용에 아는 것은 아는 대로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대답했다. 이어서 우리가 궁금한 부분에 대해서도 의사에게 묻고 설명을 들었다. 우리는 의사가 컴퓨터에 방금 진료한 내용을 기록하는 걸 마칠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 잠시 후 의사는 초음파 검사를 하자며 아내를 검사실로 안내했다. 나에게는 다시 부를 때까지 자리에서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

초음파 검사실은 진료실과 커튼 하나로 나누어진 어둡고 작은 방이었다. 나는 커튼 너머로 아내를 들여보내고 진료실에 혼자 남았다. 그러고 보니 내가 누군가의 보호자로 병원에 와보기는 처음이었다. 남편으로서 그리고 이제 곧 누군가의 아빠로서 살아가야 할 삶을 상상해 보았다. 내가 보호해야 할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은 나에게 이 삶을 살아내야 할 또 다른 이유로 다가왔다.

잠시 후 커튼 너머에서 남편도 들어오라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커튼을 밀치고 초음파 검사실로 들어갔다. 방은 매우 어두웠지만 초음파 모니터에서 나오는 빛 덕분에 앞이 안 보일 정도는 아니었다. 아내는 침대에 반쯤 기댄 듯 누워서 그 옆에 앉아있는 의사와 함께 초음파 화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의사 맞은 편에 마련된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의사는 초음파 화면에 나타난 작은 동그라미를 가리키면서 자궁에 자리 잡은 아기의 모습이라고 가르쳐주었다. 아내와 나는 경이로운 시선으로 한참 동안 화면에 뜬 작은 동그라미를 바라보았다.


이후 우리 부부는 몇 번 더 병원을 찾았다. 그때마다 초음파 화면을 통해 조금씩 자라고 있는 아기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러는 사이 어느덧 계절도 바뀌었다. 그날도 검진하러 다시 병원을 찾았을 때였다. 초음파 화면에 비친 아기는 이제 제법 웅크린 사람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의사는 불룩한 아내의 배 위로 초음파 프로브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우리가 궁금해할 부분에 대해 하나씩 짚어주었다. 머리, 팔, 다리 … 그리고 마지막으로 화면의 한 가운데를 가리켰다. 그러면서 여기가 바로 아기의 심장이라고 말했다. 초음파 화면에 비친 조그만 심장은 일정한 간격으로 커졌다 작아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정말로 거기에 새로운 생명이 자라고 있었다.

그런데 그다음 이어진 의사의 말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의사는 아기가 다른 데는 다 괜찮은데 심장의 왼쪽이 조금 작은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아직 시간이 있으니 일단 조금 더 지켜보자고 했다. 나는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졌다. ‘다른 데도 아니고 심장이라니.’ 내가 아내를 보니 아내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는 ‘아직 시간이 있으니’라는 말에 애써 희망을 걸고 병원 문을 나섰다.

우리는 몇 주 후 다시 병원을 찾았다. 평소와 다름없는 진료였지만 그날따라 유독 시간이 천천히 흘렀다. 나는 아기의 심장이 그동안 정상적으로 자리 잡았기를 바라며 의사의 초음파 결과 설명을 기다렸다. 의사는 초음파 화면을 가리키며 아기의 왼쪽 심장이 여전히 조금 작다고 말했다. 만약 다른 아이라면 이 정도는 크게 문제없을 것 같지만 아버지가 심장병이 있었기 때문에 그냥 예사로 넘기기에 조심스럽다고 했다.

“아버지가 심장병이 있었기 때문에”

먹먹했다. 그리고 미안했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아기에게 미안했고, 일생 중에 가장 마음이 평온해야 할 아내에게 미안했다. 부디 내가 겪었던 그 삶의 불편함이 내 아이에게만큼은 반복되지 않기를, 나의 어머니가 겪었을 고생이 아내에게는 찾아오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의사는 진료의뢰서를 써줄 테니 더 큰 대학병원으로 가라고 권했다. 나도 진료를 하면서 다른 환자들에게 똑같은 말을 해본 적이 있었기에 그 안에 담긴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의사가 자기 앞에 놓인 환자를 감당할 수 없을 때 쓰는 말이었다. 한편으로는 차라리 그렇게 솔직하게 말해준 의사가 고마웠다. 덕분에 혹시 앞으로 닥쳐올지도 모르는 상황에 미리 대비라도 할 수 있을 테니까.


어느 병원으로 갈지 정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내와 나는 대학로에 있는 대학병원으로 향했다. 내가 평생 다녔던 그리고 앞으로도 다녀야 할 병원, 내가 가장 절박한 순간에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병원이었다. 아내는 그 병원의 산부인과 교수에게 진료를 받고 출산 예정일에 맞추어 입원하기로 했다.

그해 12월, 아내는 출산 예정일에 맞춰 병원에 입원했다. 나는 아내가 입원한 당일 저녁까지 일하고 해가 지고 나서야 아내가 있는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에 도착하니 아내는 환자복으로 갈아입고 병실에 누워있었다. 밤이 되자 아내는 진통을 시작했다. 그로부터 몇 시간 동안 땀을 흘리며 끙끙 앓았다. 나는 그런 아내 옆을 지키며 함께 밤을 새웠다. 아내가 그토록 힘들어하는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옆에 있어 주는 것뿐이었다.

이른 새벽, 아내는 딸을 낳았다. 아기는 분만장의 밝은 조명과 분주히 움직이는 의료진들을 마주하고 잔뜩 긴장한 모습이었다. 조금 전까지 아늑하게 어두운 엄마의 배 속에 있다가 세상 밖으로 나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 곧 아기의 울음소리가 분만장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나는 세상에 첫발을 내디딘 아기를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반갑다. 아가야. 부디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 거라. 나도 좋은 아빠가 되도록 노력할게.’

아기는 포대기에 싸인 채로 엄마 아빠에게 잠깐 얼굴을 비춘 뒤 곧바로 신생아 집중치료실로 옮겨졌다. ‘심장병이 있는 아빠’를 두었다는 이유로 생애 첫 며칠 동안을 인큐베이터에서 머물며 의료진들의 집중 관찰을 받을 예정이었다. 나는 부모 품에 한 번 안겨보지도 못한 채 신생아 집중치료실로 향하는 딸의 뒷모습을 지켜보면서 곧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만나기만을 빌었다.

신생아 집중치료실은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태어난 직후부터 특별한 관리가 필요한 아기들이 머무는 장소다. 당연히 일반 병실보다 훨씬 더 엄격하게 관리된다. 부모조차도 정해진 면회 시간에만 들어갈 수 있고, 들어가기에 앞서 손을 깨끗이 씻고 마스크와 가운을 착용해야 한다. 아내와 나는 매일 오전과 오후 두 번 있는 신생아 집중치료실 면회 시간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렇게 기다린 끝에 신생아 집중치료실에 들어가면 여러 기계에 둘러싸여 작은 침대에 누워서 꼬물대고 있는 딸 아이를 볼 수 있었다. 이제 막 숨쉬기 시작한 작은 코에는 산소를 공급하기 위한 튜브가 연결되어 있었고 내 손바닥보다도 작은 가슴에는 여러 패치들과 거기에 연결된 전선들이 어지럽게 붙어 있었다. 당장은 하루에 두 번밖에 만나지 못해 아쉬웠지만, 그래도 이렇게 잘 있다는 걸 볼 수 있다는 것만 해도 고마웠다.

잠시 후, 들어온 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이제 곧 면회 시간이 끝난다는 안내 방송이 들렸다. 30분이란 시간이 이렇게 짧게 느껴진 건 처음이었다. 결국 시간이 다 되어 출입구로 향하면서도 계속 딸 아이가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얼른 건강한 모습으로 신생아 집중치료실에서 나왔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신생아 집중치료실에서 3일째 되는 날 아침이었다. 주치의 K 교수는 딸 아이를 일반 병실로 옮기자고 했다. 혹시라도 아기의 심장에 문제가 있을지 몰라서 그동안 신중하게 지켜보았는데 다행히 아무 이상 없이 건강했다고 했다. 그날 오후에 딸 아이는 신생아 집중치료실을 나와서 아내와 내가 기다리고 있는 일반 병실로 왔다. 우리는 그렇게 딸 아이가 태어난 지 3일이 지나서 처음으로 품에 안아보았다.

다음 날 우리 셋은 함께 병원 문을 나섰다. 밖으로 나오자 12월의 쌀쌀한 공기에 얼굴이 얼얼했다. 병원 앞은 옷을 여미고 오가는 사람들로 여전히 붐볐다. 병원 앞에 비상등을 키고 정차한 차들이 줄지어 있고 주차요원들이 그들을 보내려고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병원에 머무르던 지난 일주일 동안 세상은 전혀 변한 게 없었다. 하지만 그때와 달라진 게 하나 있었다. 우리 가족은 병원에 들어갈 때는 둘이었으나 나올 때는 셋이 되어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집으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아직 다 끝난 게 아니었다. 몇 번 더 병원을 방문해서 딸 아이의 심장에 혹시라도 다른 문제는 없는지 확인해야 했다. 그 가운데 제일 중요한 것은 역시 심장의 구조와 움직임을 실시간으로 관찰하는 심장 초음파였다.


사실 심장 초음파는 내가 일 년에 두어 번 정도 받는 검사이다. 그리고 나는 진료의 연속성을 위해 성인이 된 후에도 소아청소년과에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초음파 검사도 이 병원의 어린이병원에서 받았다. 그래서 딸 아이를 안고 어린이병원 4층에 있는 심장 초음파실을 찾았을 때 그 장소가 전혀 낯설지 않았다. 다만 낯설었던 것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아이를 내가 검사받기 위해 누웠던 바로 그 침대에 눕혀야 하는 상황 그 자체였다.

그렇게 외래를 통해 두 번 더 병원을 찾았을 때였다. 선한 인상의 K 교수는 딸 아이의 심장이 잘 자라고 있으니 더 이상 병원에 오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나는 병원에 더 이상 오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처음에는 바로 와 닿지 않았다. 한 번도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곧 그 의미를 이해했다. 내 딸은 나의 전철을 밟지 않게 되었다는 뜻이었다. 내가 듣지 못했던 그 말을 내 딸은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이 나는 눈물 시리도록 고마웠다.

딸 아이의 마지막 외래 진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지난 일 년 동안 거쳐온 일들을 되돌아보았다. 동네 산부인과에서 태중 아기의 심장에 문제가 있어 보인다는 말을 들었던 순간부터 K 교수로부터 더이상 병원에 오지 않아도 좋다는 말을 들었을 때까지, 단 한 순간도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한 시간의 연속이었다.

그때 비로소 나는 느낀 바가 있었다. 가족 모두 건강하고 별일 없이 잘 지내는 일상, 평소에 당연하다고 여기는 이러한 것들이 사실은 당연한 게 아니었다. 그것은 사실 기적과도 같은 행운이 거듭된 놀라운 결과인 것이다.


딸 아이는 앞으로 걸어가게 될 기나긴 삶의 여정 속에서 수없이 많은 일들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 단계 단계마다 스스로 선택하는 법을 배울 것이고 또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는 법도 배우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중에는 부모인 우리 부부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때 우리는 이 아이가 처음 세상에 오던 날들의 기억을 다시금 꺼내 보며, 딸 아이가 별 탈 없이 우리 곁에 있는 게 결코 당연한 일이 아니란 사실을 되새기려고 한다. 우리는 그렇게, 부부에서 부모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 글은 집필 중인 자전적 에세이 초안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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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부모가 되어가다”의 1개의 댓글

  1. 축하합니다. 정말 오르락 내리락 감정의 롤러 코스터를 몇 번이나 타셨을까요. 결국은 감동과 감사로 맺을 수 있어 저도 감사하고 기쁩니다.
    담담한 문체로 이야기해주셔서 더욱 와 닿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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