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만나면 [2]


여자는 알겠다고 했다. 하지만 나의 심장은 전혀 문제 될 게 없다고, 몸이 아픈 것은 그렇게 큰 흉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보다는 마음이 건강한지가 훨씬 더 중요하다고 했다. 그리고 지난 한 달 동안 나를 알고 지내보니 마음이 건강한 사람인 것 같아서 좋았다고 말했다. 나는 그 말에 용기를 얻어 조심스레 나와 정식으로 사귀어 보는 건 어떻겠냐고 물어보았다. 여자는 그러자고 답했다. 그날부터 여자는 여자 친구가 되었다.

정식으로 사귄다고는 했으나 여자 친구와 나 사이에는 무시 못 할 물리적 거리가 있었다. 나는 서울에 여자 친구는 부산에 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이미 그 정도는 충분히 극복할 자신이 있었다. 나는 심장 수술을 받고 몇 달 후 마라톤을 완주했고, 고3 때는 태풍에 자취방 천장과 함께 문제집을 다 잃어버리고도 결국 의과대학에 들어갔다. 의사고시 날에는 주어진 시간의 절반도 쓰지 못하고 시험장을 나왔지만,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은 끝에 시험에 합격했다. 무엇보다도 나는 병실 침대에서 의대 도서관으로 향하겠다는 스스로 한 약속을 현실로 이루어 냈다. 나는 세상 모든 일은 스스로 마음먹기에 달려있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서울과 부산의 거리쯤은 걸림돌이 될 수 없었다.

그날 이후 주말 오프가 있을 때마다 부산으로 향했다. 병원 인턴 주제에 토요일이나 일요일을 연달아 쉴 수는 없었기 때문에, 거의 매번 당일치기 일정으로 부산에 다녀왔다. 아침 10시까지 당직 인계를 마치고 병원 앞에서 택시를 잡아탔다. 예약한 기차를 놓칠세라 택시에서 마음 졸이며 서울역으로 향했다. 서울역에서 10시 반쯤 기차를 타면 오후 1시경 부산에 도착했다. 기차에서 내려서 ‘나가는 곳 OUT’이라는 노란색 표시를 지나면 여자 친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점심을 먹고 오후를 함께 보냈다. 그렇게 짧은 시간을 보내고 나는 밤 9시쯤 되어 기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왔다.  얼마나 부산을 자주 오갔는지, 나는 곧 코레일 우수고객이 되었다. 코레일 우수고객에게 발급된 할인권은 또다시 기차표를 사는 데 활용했다.

언젠가는 이런 일도 있었다. 부산에서 하루를 보내고 서울로 돌아오는 밤 기차를 타려던 참이었다. 우리는 그때까지 함께 있었음에도 잠시 후 헤어진다는 게 못내 아쉬워 출발 준비 중인 기차 앞에서 손을 맞잡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기차가 문을 닫고 출발해 버렸다. 출발 시간은 분명 2분가량 남아있었다. 우리는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나는 일단 기차표를 다시 확인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코레일 앱을 열어 기차표를 확인해보았다. 기차표를 확인한 우리는 서로 마주 보고 크게 웃었다. 내가 구입한 것은 ‘부산발 서울행’이 아니라 비슷한 시간대의 ‘서울발 부산행’ 기차표였다. 그날 이후 나는 기차표를 구매할 때 꼭 방향부터 확인하는 습관을 들였다.


시간이 흘러 그 해의 크리스마스이브가 되었다. 나는 정말로 어렵게 오프를 얻어서 부산으로 향했다. 날이 날이니만큼, 부산역에서 작은 차도 하나 빌렸다. 명색이 크리스마스이브인데 여자 친구를 추운 날씨에 밖에서 떨게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부산 중앙성당에서 성탄 미사를 보고, 성당에서 준비한 떡국으로 저녁을 해결했다. 이어서 차를 몰고 송정 해수욕장으로 향했다. 바닷가에 차를 세워두고 이야기를 나누며 밤을 지새울 참이었다.

우리는 송정 해변의 동쪽 끝에 바다를 향해 주차하고, 차에서 내려 해변을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안 가서 다시 차로 돌아왔다. 역시 따뜻한 차 안이 최고였다. 우리는 차에 앉아 눈 앞에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했던 이야기 또 하고 들었던 이야기 또 듣고. 물어봤던 거 또 물어보고 답했던 거 또 답하고. 그래놓고도 처음인 것 마냥 꺄르르 웃고. 그러다가 결국에는 이야기 소재가 떨어져서 잠시 침묵이 흐를 때였다. 나는 여자 친구 쪽으로 고개를 돌려 빤히 쳐다보았다. 여자 친구도 아무 말 없이 내 쪽을 바라봤다. 그리고 나는 뜬금없이 말했다.

“저와 결혼합시다.”

여자 친구는 약간 당황한 듯했다. 하지만 고맙게도 청혼을 거절하지는 않았다. 다만 지금 바로 결혼을 결정하지는 말고 조금 더 시간을 두고 만나보자고 대답했다. 사실 그럴 만도 했다. 지난 10월에 만나 크리스마스까지 아직 2개월여밖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도 그러는 게 좋겠다고 답했다. 우리는 서로 만남을 계속 이어가 보기로 했다.

어느새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지고 있었다. 우리는 자동차 실내를 섭씨 25도로 맞춘 채로 창문을 살짝 열어두었다. 창문 틈을 타고 들어오는 찬 공기가 신선했다. 나는 운전석을, 여자 친구는 조수석을 최대한 뒤로 젖히고 도톰한 코트를 이불 삼아 그대로 잠이 들었다. 그리고 몇 시간 후, 우리는 둘 다 얼굴이 부은 채로 수평선에서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아침을 맞았다.

그날 이후 우리의 신상에는 몇 가지 크고 작은 변화가 있었다. 먼저, 여자 친구는 은행 본점이 있는 여의도로 돌아왔다. 여자 친구는 회사에서 멀지 않은 곳의 선배 언니 집에서 머물기로 했는데, 덕분에 우리는 더욱 자주 만날 수 있었다. 그 대신 나는 코레일 우수 고객 지위를 잃었다.


나는 이듬해 3월에 일 년간의 고된 인턴 과정을 마치고, 훨씬 더 고될 외과 레지던트가 되었다. 내가 하고많은 과들 가운데서 외과를 선택한 이유를 딱 하나로 짚어서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가장 중요한 걸 하나 꼽자면 나 스스로 한계에 도전해 보려는 뜻이 있었다. 밤샘 수술과 당직이 거듭 반복되는 외과는 여러 과들 가운데서도 가장 힘들기로 첫 손에 꼽힌다. 내가 외과 레지던트 과정을 무사히 마치고 외과 전문의가 된다면 비로소 나 자신의 건강에 대한 자타의 우려를 불식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 밖에도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가 있었는데, 외과가 생명과 직접 연계되는 영역을 다루면서도 수술을 접할 수 있는 과였기 때문이다. 애초에 내가 수련을 받기로 결정한 이유는 훗날 언젠가 원격의료라는 궁극적인 지향점으로 돌아가기에 앞서, 임상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들을 체득하려는 것이었다. 그러한 목적을 고려했을 때 생명을 직접 다루면서도 수술까지 접해볼 수 있는 외과 수련은 종합선물세트였다. 요컨대, 나는 스스로 한계를 시험하면서도 훗날 나아갈 길에 발판으로 삼고자 외과 레지던트의 길에 들어섰다.

나와 여자 친구는 이렇게 서로를 둘러싼 주변 상황이 바뀌는 와중에도 변함없이 만남을 이어갔다. 우리는 때가 되어 양가 부모님께 인사를 드렸고, 그로부터 얼마 후에는 결혼식 날짜까지 확정했다. 우리는 이제 서로에게 여자 친구 남자 친구에서 예비 신부 예비 신랑이 되어가고 있었다.

결혼 날짜는 정했으니 그다음으로 정해야 할 게 있었다. 바로 결혼식 장소였다. 우리는 앞으로 평생 기억에 남을 결혼식을 시중의 평범한 웨딩홀보다는 뭔가 의미가 깃든 장소에서 치렀으면 했다. 호텔 결혼식은 우리 둘 다 원치 않았다. 일단 우리의 경제적 형편에 너무 과하기도 했고 설사 돈이 넘쳐난다고 해도 호텔 결혼식 특유의 상업적인 느낌 때문에 내키지 않았다. 그리고 한가지 바라건대 세월이 흘러도 같은 자리에 남아서 2세의 손을 잡고 다시 찾을 수 있는 결혼식장이었으면 했다.

그즈음 대학교 동문회관이 유력한 후보로 떠올랐다. 동문회관은 시설과 가격 등을 따져보았을 때 꽤 괜찮은 선택지였다. 하지만 동문회관도 결혼식장으로 정하기에는 한 가지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만약 동문회관을 결혼식 장소로 정하면 결국 서울대나 고려대 동문회관 가운데 하나가 될 터였다. 그러면 본의 아니게 주위 사람들에게 우리가 졸업한 학교를 과시하는 거로 비칠 수도 있었다. 나와 여자 친구는 이런 일로 누군가의 마음이 불편해지는 걸 원치 않았다. 그래서 결국 동문회관도 선택지에서 제외했다.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어디서 결혼을 하면 좋을지 계속 의견을 나누었다. 하지만 마음에 딱 드는 결혼식장을 찾기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후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거의 완벽에 가까운 답을 찾을 수 있었다.

다음 글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이 글은 집필 중인 자전적 에세이 초안의 일부입니다.
일부 내용은 이전 글에서 이미 소개된 것일 수 있습니다. 더 많은 초안을 보려면 아래 무료 이메일 구독을 신청하십시오.

“당신을 만나면 [2]”에 대한 2개의 생각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