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시장의 마지막 외출

유난히도 무더웠던 8월이었다. 병실마다 두 개씩 걸려있는 회전식 선풍기는 더위를 시키기에 역부족이었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어느덧 등줄기에 땀이 흘러내렸고, 조금만 뛰어다니다 보면 땀 때문에 옷이 들러붙어 버려 움직이는 것조차 버거워졌다. 두 손이라도 자유롭고 싶어서 소매를 걷으면 그러잖아도 때가 탄 흰 가운이 더욱 꼬질꼬질해 보였다. 환자나 보호자 만큼은 아니겠지만, 찌는 듯한 더위는 병원 인턴에게도 무척 고역이었다.

그해 8월 나는 내과 인턴을 돌고 있었다. 어느 병원이나 내과는 인턴 중에 거쳐야 하는 과들 가운데 일이 가장 고되기로 손에 꼽힌다. 사실 내가 한여름에 내과를 돌고 있는 것은 자초한 일이었다.  2월에 있었던 인턴 오리엔테이션의 과 배정 추첨에 따른 결과였기 때문이다. 그때 만약 내가 추첨 표가 담긴 통에 넣은 손을 조금만 틀었다면, 이 찌는 듯한 무더위에 가정의학과 외래 같은 곳에서 에어컨 바람을 쐬고 있을 수도 있었다. 결국 내가 운이 나쁜 걸 탓하는 수밖에 없었다.

내과 인턴의 하루는 아침 6시부터 각 병동을 돌아다니며 채혈을 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7시에는 스탭1과 레지던트를 따라 병동 회진을 돌고, 회진이 끝나면 곧바로 병동 환자들의 환부 소독을 시작했다. 그러는 중에 환자 이송이나 추가 채혈을 요청하는 호출이 오면 하던 일을 급히 마무리하고 병동으로 달려가야 했다. 그 밖에도 의국의 오래된 문서 정리처럼 레지던트들이 직접 하기에 귀찮은 일이 있으면 그 또한 당연히 인턴의 몫으로 내려왔다.

채혈, 환자 이송, 문서 정리 같은 일이 의사인 인턴이 하기에 적합한 것인지는 오랫동안 갑론을박의 주제가 되어왔다. 그게 인턴의 일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그것도 다 수련 과정의 일부이니 감수하라고 말했다. 표면적인 명분은 그렇지만, 사실 그런 주장의 저변에는, ‘나도 했는데 너희가 그냥 넘어가게 할 수 없다.’라는 심리도 있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 반대로, 인턴이 하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인턴은 어디까지나 의사 직무를 훈련받기 위해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그리고 채혈의 경우 임상병리사, 환자 이송의 경우 이송원처럼 이를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직군이 따로 있음에도 병원이 인건비 절감을 위해서 인턴을 이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왜 인턴들은 이런 일들을 묵묵히 하고 있는 것일까. 이를 이해하려면 먼저 인턴을 둘러싸고 있는 병원의 구조적 특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인턴이란 병원 내의 여러 과들을 적게는 몇 주에서 많게는 한두 달씩 돌면서 임상 경험을 쌓는 과정으로, 이후 레지던트 과정을 밟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다. 그런데 인턴 과정 때 각 과에서 받은 점수가 레지던트를 지원할 때 당락을 결정하는 큰 평가요소로 작용하고, 그러다 보니 과와 인턴 간에 갑을관계가 만들어진다. 실제로 인턴들이 부당한 상황에 처하고도 혹여라도 점수에 불이익이 있지는 않을까 두려워서 제대로 항의하지 못 하는 일이 빈번히 일어났다.


예컨대, 스탭이 인턴에게 빨리 CT실에 들어가서 환자를 붙잡고 있으라고 재촉하면 인턴은 방사선 차폐복을 입을 겨를도 없이 CT 기계가 돌아가는 바로 옆에 서서 방사선 샤워를 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인턴들이 시간에 쫓겨 에이즈 환자나 C형 간염 환자의 채혈을 하다가 주삿바늘에 찔리는 일도 매년 한두 건은 꼭 있었다. 나도 이동식 침대를 끌다가 침대 바퀴가 엄지발가락을 밟고 지나가는 바람에 엄지발톱이 빠진 적이 있었는데, 피가 흐르는 상처를 붕대로 대충 싸매고 10분 만에 다시 일하러 갔던 기억이 있다. 이처럼 인턴들은 낮은 임금을 받으면서도 중노동을 감수하는 충성 경쟁에 노출되고 있었다. 사실 병원 입장에서 보았을 때, 열악한 환경에서도 별말 없이 일하는 인턴들은 누군가의 귀한 아들딸이기 보다는 그저 값싸고 고분고분한 그야말로 아무 일이나 시키기에 더없이 좋은 1년 계약직 일꾼이었던 셈이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휴대폰 달력을 보며 이 지옥 같은 내과 인턴이 끝날 날을 헤아리고 있었다. 나는 오전이 다 가도록 아직 한 끼도 못 먹고 있었다. 잠시 후 점심시간이 되겠지만 인턴 따위가 구내식당에서 수저를 들고 식사할 여유는 없었고, 그렇다고 빈속을 컵라면으로 채우자니 속이 쓰려서 넘어올 것 같았다. 그래서 그나마 음식다운 음식을 찾겠다고 편의점 매대를 둘러보고 있었다. 그렇게 삼각김밥을 집어 들었을 때였다. 휴대폰 벨 소리가 흰 가운 주머니에서 울리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또 나를 부른다는 신호였다. 그 순간 가장 먼저든 느낀 것은, 어쩌면 공복 상태가 당분간 더 유지될지도 모른다는 불길함이었다. 아무튼 어디에서 온 전화인지는 확인해야 했으므로, 삼각김밥을 쥐지 않은 손으로 휴대폰을 들어 올려 발신자를 확인했다.

‘내과 중환자실’

그리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일단은 무슨 일인지 듣기 위해 전화를 받았다. 중환자실 간호사가 지금 다른 병원으로 급히 이송해야 할 환자가 있으니 내과 중환자실로 올라와 달란다. 이로써 공복 상태는 몇 시간 더 연장될 게 분명해졌다. 못내 아쉬운 마음으로 삼각김밥을 제자리에 돌려놓고 3층에 있는 내과 중환자실로 뛰어 올라갔다. 내과 중환자실 앞에 도달하는데 1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내과 중환자실의 자동문이 미처 다 열리기도 전에 게걸음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하지만 정작 올라가서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예상보다 훨씬 평온했다. 아직 환자를 출발시킬 준비가 되지 않은 것이다. 중환자실 담당 간호사가 나를 보고 말했다.

“오, 진짜 빨리 오셨네요.”

칭찬하는 건지 놀리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이럴 거였으면 아까 그 삼각김밥을 먹고 왔으면 좋았을 것을. 그렇다고 지금 다시 편의점을 다녀오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그냥 삼각김밥은 포기하기로 했다. 나는 호출한 중환자실 간호사를 향해 퉁명스럽게 물었다.

“어느 분이 가시는 건가요?”

간호사는 아직 아무런 준비도 안 한 상태로 나를 부른 것에 대해 조금 미안함을 느끼는 듯했다. 담당 간호사가 팔을 들어 한 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환자예요.”

거기에는 인공호흡기와 각종 기계가 얼기설기 둘러싼 가운데 한 노인이 눈을 감은 채 누워있었다. 인공호흡기가 만들어내는 공기의 흐름에 따라 가슴이 오르락내리락 할 뿐, 환자는 그 어떤 자발적인 움직임도 보여주지 않았다. 그는 자기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때 나를 불렀던 간호사는 뭔가 대단한 비밀이라도 되는 것처럼 한 가지 사실을 귀띔해 주었다.

“근데, 저분 서울 시장이었대요.”

나는 그 말을 듣고 환자를 다시 쳐다보았다. 이리저리 뜯어봐도 TV에서 보았음직 한 얼굴은 아니었다. 하긴, 저렇게 인공호흡기를 끼고 있으면 원래 알던 사람도 몰라볼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보아도 어딘가에서 보았던 얼굴은 아니었다. 담당 간호사 말이 사실이라면, 아마도 오래전에 서울 시장을 했던 사람이었던 것 같았다.

궁금해졌다. 스마트폰을 들고 검색창에 환자의 성명 OOO과 서울 시장을 입력해 보았다. 이어 놀라운 결과가 돌아왔다. 그는 그냥 ‘서울 시장’이 아니었다. 서울 시장뿐 아니라 국회의원과 장관 등 고위직을 두루 거친 이였다. 속된 말로, 한창때 끗발 꽤나 날렸을 인물이었다. 인터넷에서 찾은 예전 사진과 침대에 누워있는 지금의 얼굴을 번갈아 가며 보니 그제야 같은 사람인 것 같기도 했다. 그런 그가 공공병원의 중환자실에서 에이즈 걸린 노숙자와 간경화로 복수가 들어찬 알코올 중독자 사이에 누워있었다. 나는 속으로 말했다.

‘사람 인생이란 게 참 …’

잠시 후 보호자들이 와서 중환자실 중간에 마련된 설명용 컴퓨터로 마지막 설명을 듣고 몇 가지 서류에 서명했다. 이어서 중환자실 간호사들이 본격적으로 환자를 이동할 준비를 시작했다. 나는 간호사들과 함께 환자 몸에 연결되어 있던 각종 기계장치와 주사를 제거하고, 심전도 측정기처럼 계속 필요한 것은 이동식으로 교체하였다. 인공호흡기는 내가 산소탱크와 연결된 앰부백2을 짜는 것으로 대신했다. 잠시 후 이동을 위한 모든 준비가 끝났다. 내가 5초에 한 번씩 앰부백을 짜고 있는 동안 중환자실 간호사들이 환자의 좌우에 자리를 잡고 섰다. 그다음 “하나! 둘! 셋!” 구호에 맞춰 환자를 원래 있던 침대에서 앰뷸런스에 실리는 이동식 침대로 옮겼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가 후문에 대기 중인 앰뷸런스로 향했다. 간호사들이 앰뷸런스 기사의 도움을 받아 이동식 침대를 앰뷸런스 뒷문으로 밀어 올렸고, 나도 그 옆에서 계속 앰부백을 짜면서 앰뷸런스에 설치된 좁은 의자 위로 올라탔다. 앰뷸런스 뒷문이 “탕!” 하면서 닫혔다. 잠시 후 칸막이로 막힌 운전석에 기사가 올라타고 또 한 번 “탕!” 하면서 운전석 문이 닫혔다. 사이렌 소리가 공기를 가르자 곧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강남에 있는 대학병원으로 간다고 했다. 국립중앙의료원을 출발한 앰뷸런스는 신라호텔 옆을 지나 남산2호터널로 들어갔다. 나는 이동하는 내내 두 손으로 럭비공 모양의 앰부 백을 쥐어짰다. 그러면서 손가락에 고정해둔 산소포화도 측정기의 숫자가 90 밑으로는 내려가지 않도록 주시했다. 그 90이라는 숫자를 지키는 게 내가 그 자리에 있는 제일 중요한 이유였다. 다행히 산소포화도는 95 이상을 유지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 반복적인 이 일에 익숙해졌을 즈음 나는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한때 이 노인은 세상을 호령했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 노인과 악수라도 해보려고 줄을 섰을까.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 노인과 차 한잔을 마시려고 이곳저곳에 연락을 돌렸을까. 이 노인이 온다고 하면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의전과 이동 경로를 검토하며 회의를 거듭했을까. 그랬던 그 노인이 지금은 햇병아리 같은 인턴 의사가 쥐어짜는 앰부백에 꺼져가는 숨을 맡기고 있었다. 죽음 앞에서 한없이 무력해지는 인간이란 존재의 한 단면을 보는 듯했다.

서울 시장, 국회의원, 장관. 지금, 이 순간에도 여의도에서 난다긴다하는 이들은 이 가운데 하나라도 되려고 피 터지게 싸우고 있다. 내가 보기에 이들은 더 큰 권력이 있는 ‘자리’를 얻을 수만 있다면 영혼마저 팔 준비가 되어있다. 그런데 그 ‘자리’란 것이 과연 그렇게 인생을 송두리째 바쳐가며 희생을 치를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나는 그 세 가지를 모두 거치고도 이 좁은 앰뷸런스 안에 누워서 타인의 도움을 받아 숨을 쉬고 있는 이 노인을 바라보며 그런 회의적인 의문이 들었다.

문득 오래전 아버지와 동네 약수터에 갔다가 나누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내가 어릴 적 살던 곳 근처에는 야트막한 산이 있었다. 8, 90년대 세워진 아파트 단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뒷산이다. 일요일 아침마다 나는 어떻게든지 늦잠을 자려고 했고, 아버지는 그런 나를 끌고 산에 가려고 했다. 그리고 거의 예외 없이 나와 동생은 뻑뻑한 눈을 비비며 아버지를 따라 뒷산의 등산로로 향했다.

그날도 그렇게 일요일 아침을 맞아 산을 오르던 중이었다. 초겨울의 쌀쌀한 날씨였던 걸로 기억한다. 등산로에 얕은 눈이 쌓여 있었고 사람들이 밟고 지난 곳으로 듬성듬성 흙이 드러나 있었다. 길을 따라서 십여 분을 걸으니 약수터가 나타났다. 등산복을 입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체조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우리는 약수터의 차가운 물로 목을 축였다. 잠깐 쉬다가 능선을 따라 난 등산로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또 얼마간 가다가 잠시 쉬어가기 위해서 멈춰 섰다. 옆을 보니 우리가 걸어가는 등산로 왼쪽으로 울타리가 쳐져 있었다. 그리고 울타리 바로 안쪽의 작은 나무 팻말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이곳은 사유지임.”

아버지는 잠시 걸음을 멈추시더니 그 팻말을 말없이 바라보셨다. 그러고는 바로 앞에 놓여있던 주먹만 한 돌멩이 하나를 집어 들고는 나에게 물어보셨다.

“여기는 사유지구나. 너는 그게 무슨 뜻인 것 같으냐.”

나는 아버지가 ‘사유지’라는 단어를 알게 하려는 취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쉬운 질문인 듯 이렇게 대답했다.

“뭐, 주인이 있는 땅이란 뜻이겠죠.”

나의 대답을 듣고 아버지는 말씀을 이어갔다.

“그래. 누군가 이 땅의 주인이란 의미지. 하지만 그게 누군지는 몰라도 아마 여기 놓인 돌멩이들 대부분을 한 번도 만져보지 못한 채 이 산의 주인으로서의 시간을 마감하게 될 거야. 그리고 그다음 누군가에게 주인 자리를 넘겨주게 되겠지. 그게 그 사람 자식이건 아니면 새롭게 산을 사들일 사람이건.”

아버지는 시선을 손에 든 돌멩이로 옮기고는 계속 말씀을 이어갔다.

“그런데 말이다. 여기 놓인 돌멩이 하나, 나무 하나조차도 만져보지 못하고 이 땅을 진정으로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주인은 자신이 이곳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이 땅이 그를 잠시 잠깐 스쳐 지나가는 것뿐 아닐까.”

나는 다시 현실로 돌아와 이 노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우리가 ‘자리’라고 말하는 것도 이런 게 아니겠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힘겹게 높은 ‘자리’에 오른다 한들, 거기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은 생각보다 길지 않을지 모른다. 그런 점에서 ‘자리’란 누군가에 속하는 게 아니라 그저 잠깐 빌렸다가 시간이 지나면 돌려주어야 하는 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자리’를 차지했다고 말한다. 그렇게 애써 ‘자리’를 차지하고 나면, 심지어 그다지 높은 자리에 있지 않은 이들조차도 자기가 차지한 그 ‘자리’와 거기에 딸린 한 줌의 권한을 마치 영원히 자기가 누릴 수 있는 것인 양 휘두른다. 내가 인턴으로서 지켜본 일부 스탭들과 레지던트들의 모습이 바로 그랬다. 그들은 그들이 잠시 빌린 ‘자리’가 곧 자신의 소유물인 거로 착각하고 있었다.


물론 이것은 비단 이 병원에서만 벌어지는 일은 아니었다. 아니 병원이라는 곳에만 존재하는 문제도 아니었다. 이 사회 곳곳의 모든 집단과 조직에 뿌리 깊이 박힌, ‘자리’에 대한 오해에서 빚어진 사달이었다. 문제는 그러한 오해가 단지 오해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 아래에서 아직 세상을 채 알지도 못하는 젊은이들이 상처 입고 좌절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언젠가 ‘자리’라고 불릴 만한 곳에 있게 된다면, 나는 절대 그러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내가 잠시 빌린 ‘자리’가 결코 내 소유물이 아님을 잊지 말겠노라고 거듭 되뇌었다. 적어도 내가 한심하게 여긴 이들이 보여주었던 행태를 내가 답습하는 일은 없도록 하고 싶었다.

전직 서울 시장과 단둘이 보낸 시간이 10분이나 흘렀을까. 차창 밖을 보니 목적지인 대학병원 입구로 들어서고 있었다. 평소라면 30분이 넘는 거리인데 그 절반도 걸리지 않은 듯했다. 이제 곧 이 노인과 헤어질 시간이었다. 나는 문득 노인 입장에서 지금 이 순간이 갖는 의미를 생각해 보았다. 중환자실에서 듣기로 그는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했다. 지금 이 순간이 그의 마지막 외출이고 이 앰뷸런스는 그가 이번 생에서 탈 마지막 차일 수도 있었다. 그가 이제껏 살아온 길고 긴 삶에서 내가 마지막을 함께 하고 있다니. 그가 비록 의식은 없었으나, 나는 나름대로 예우를 갖추고 싶었다.

앰뷸런스에서 이동식 침대를 내릴 때, 접혀있던 침대 다리가 펴지면서 땅에 닿는다. 아무리 정교하게 설계되었다고 해도, 앰뷸런스마다 높낮이가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이동식 침대를 내릴 때 충격을 피하기는 어렵다. 나는 이 충격을 줄여주는 것이 내가 해야 할 마지막 일이라고 생각했다. 앰뷸런스 문이 열리고 환자를 인계받을 의료진이 인사를 건넸다. 나는 그에게 앰부백을 넘기고 자리를 옮겨 이동식 침대를 받을 준비를 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이동식 침대가 조금의 충격도 없이 땅에 닿도록 두 팔로 있는 힘껏 지탱해 주었다. 비록 의식 없는 그가 느끼지 못할지라도,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았다. 그게 내가 그의 삶의 마지막 순간에 함께 했다는 사실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일 것 같았다.


그날 이후 나는 다시 바쁜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때 있었던 일은 시간의 흐름 속에 자연스럽게 잊혀졌다. 그러다가 문득 궁금해져서 그의 이름을 인터넷에서 다시 찾아보았는데, 지병으로 생을 마감했다는 부고 기사를 확인할 수 있었다. 빈소는 내가 앰뷸런스를 함께 타고 갔었던 병원의 부속 장례식장이었다. 나는 잠시 눈을 감고 그의 영면을 기원했다.

참고

  1. Staff: 국립중앙의료원에서 일하는 전문의를 말한다. 국립중앙의료원은 의과대학이 없기 때문에 소속 전문의를 교수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2. AMBU bag: 호흡이 정지된 사람이나 호흡 곤란을 겪는 사람에게 호흡을 돕기 위하여 사용하는 럭비공 모양의 고무 주머니.


이 글은 집필 중인 자전적 에세이 초안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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