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초심으로 돌아가서

이 블로그는 서평 쓰기로 시작했다. 외과 레지던트 2년 차 가을, 일은 일대로 쌓이고 사람 문제로 부대끼며 몸과 마음이 모두 힘들었던 시기였지만 일주일에 책 2권을 꼭 읽고 서평을 남겼었다. 그것은 주말마다 빠뜨리면 안 되는 일종의 정신 수양을 위한 의식이었다.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외과 병동의 틈바구니에서 상처받은 나 자신을 치유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만약 서평 쓰기가 아니었다면 그 시절을 온전히 버티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시간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모든 면에서 여유롭다. 심지어 아내는 나의 글쓰기 취미를 응원하며 집 근처에 작은 서재 겸 집필실도 하나 마련해 주었다. 글 쓸 때는 글 쓰는 데 집중하고, 아이와 놀 때는 아이와 노는 데 최선을 다하라면서. 이렇게 글을 쓰기 위한 내 주위의 환경은 전에 없이 풍족해졌다.

때마침 지난 8월에는 뜻밖의 기회도 찾아왔다. 우리나라의 가장 큰 출판사가 나에게 에세이 출간 제의를 해왔다. 내가 환자로서 그리고 의사로서 살아온 이야기들을 담담하게 담아내 보자고 했다. 8월 말 집필 회의를 했고, 10월부터 본격적으로 책 쓰기에 들어갔다. 일단 6개월 동안 원고를 완성하는 게 목표다. 10월, 11월, 12월 이렇게 3개월이 흘렀으니 이제 절반이 지난 셈이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지금은 글을 쓰는 게 무척 힘들다. 곰곰이 생각해봤다. 왜 이렇게 글 쓰는 게 힘든가. 내가 찾은 답은, 남들에게 보여줄 글을 쓰려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내가 쓰고 싶은 글이 아니라 독자들이 읽을 만한 글,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독자들의 관심을 끌 수 있을 만한 글을 쓰려고 한 게 글쓰기에 지치게 된 이유인 듯싶다. ‘어떻게 하면 모범적인 사람으로 보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더 감동적인 이야기를 담을 수 있을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내가 이런 생각들에 꽂혀있었다. 그리고 그럴수록 글쓰기는 점점 재미가 없어졌다.

이제 처음에 왔던 곳으로 돌아가 보려고 한다. 다시 서평 쓰기를 시작할 생각이다. 비록 전문 서평가가 쓴 글에 비하면 한없이 투박하고 유치한 서평들이겠지만, 뭐 상관없다. 누가 읽을 걸 의식해서가 아니라, 그저 내가 읽고 쓰는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 그런 이기적인 목적으로 서평을 쓰는 것이니 말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서평으로 글쓰기의 재미를 되찾고 나면 에세이 집필도 탄력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이런 고민을 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행운인지 모른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출판사로부터 출간 제의에 이어 선인세까지 받고 글을 쓸 고민을 하고 있다니. 반년 전만 해도 전혀 생각지 못한 일이다. 내가 쓴 책을 전국 서점에서 볼 수 있는 날이 하루하루 다가오고 있다.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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