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자신만의 시간표가 있다

의대를 졸업한 지도 어느덧 7년의 세월이 흘렀다. 학창 시절 7년은 까마득히 긴 시간이었는데, 어른이 되고 나서 7년은 잠깐 머뭇거리다 보니 잠깐 사이에 흘러가 버렸다. 하긴, 금방 지나갔다고 말하기에는 그사이 참 여러 가지 일들을 겪었으니, 그리 짧은 시간이라고 할 수만도 없었다.

무엇보다도 일 년간의 휴식이 있었다. 어린 시절 여러 차례 입원을 거듭하느라 학교를 빠진 적이 많았지만, 그것들은 나의 자유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입원을 하고 돌아오면 뒤처진 학업을 따라가야 했다. 때문에 그 시절 숱하게 학교를 쉬었던 경험은 이후 내 인생에서 내가 속한 무리에서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다급함으로 이어졌다. 그런 다급함은 나로 하여금 남들과 다르지 않기 위해서 부단히도 애를 쓰게 했다.

반면에 졸업 후 일 년간의 휴식은 온전히 나의 자발적 선택에 의한 것이었다. 다른 누가 아닌 나 스스로 내린 결정에 의해 남들보다 늦어지는 길을 택했다. 그 시간을 거치고 나서, 비로소 나는 세상 사람들의 대열에서 벗어나는 것이 생각만큼 두려운 일이 아니란 걸 알게 되었다. 사람은 저마다의 인생의 시간표가 있기에, 남들과 비교하며 내가 왜 이렇게 뒤처져 있는지 마음 졸일 필요가 없었다. 일 년간의 휴식이 가져다준 뜻밖의 깨달음이었다.

그렇게 한 해 쉬고 나서는 내가 어릴 적부터 치료를 받아왔던 병원에 인턴 의사로 지원했다. 합격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결과는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어서 나는 약에 대해 연구를 해보겠다는 생각으로 대학원에 진학했다. 하지만 대학원에서 내가 실제로 경험했던 것은 예상했던 것과 아주 달랐다. 논문이 대학원에서 하는 일의 시작이자 끝이었는데, 내가 있던 연구실에서 쓰는 논문이 환자들에게 실제로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바로 박차고 나올 용기도 없었다. 어영부영하며 3년이라는 시간을 쓰고 나서야 결국 대학원 문을 나섰다. 이제 와서야 웃으며 하는 말이지만, 뭐 하나 제대로 풀리는 게 없던 시절이었다.

그렇다고 대학원에서 보냈던 시간이 완전히 무의미하지는 않았다. 생각지도 못한 새로운 길을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환자가 언제 어디서든 의사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총체적이고 유기적인 체계, 오늘날 이른바 원격의료라고 알려진 것의 아이디어였다. 사실 나에게 원격의료란 그저 새로운 형태의 의료 서비스가 아니었다.  의료라는 것이 아프고 병든 이들을 낫게 하는 것이라고 했을 때, 나는 원격의료가 ‘환자들이 시간과 공간의 제약 없이 편안한 상태에서 진료를 받을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의료의 본질에 가장 충실한 기술이라고 확신했다.


또한 원격의료는 그 누구보다 환자인 내가 필요로 한 것이기도 했다. 나는 언제 어디서든 의사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에 놓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원격의료라는 것이 그저 개념적인 수준에만 머물러있었고, 아직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시대였다. 앞으로 누군가 원격의료라는 것을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면 나는 그 길에 미약하나마 작은 보탬이라도 되고 싶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기로 했다. 인터넷으로 환자와 의사를 연결한다는 목표로 회사를 만들었다. 언제부터인가 주변에 스마트폰을 쓰는 사람이 하나둘 늘어나는 걸 보고, 지체 없이 스마트폰을 통해 환자와 의사들을 연결했다. 자기 몸에 대해 궁금한 점이 있는 이들은 누구든지 자신의 손에 들려있는 스마트폰을 통해 가까이에 있는 의사에게 질문하고 답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내가 처음에 생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내가 연결한 의사와 환자들은 미용 시술 같은, 소위 ‘돈이 되는’ 진료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회사는 돈을 벌었지만 나는 그렇게 즐겁지 않았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은 꼭 의사가 아니라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반면에 나와 함께 졸업한 동기들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면, 그들은 임상 현장에서 아픈 이들을 만나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 있었다. 나와 너무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나는 실제로 누군가를 살리는 일에 기여하지 않았다. 나는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부수적인 영역에서 겉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인터넷으로 환자와 의사를 연결한다는 구상이 틀렸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단지 나의 역량이 아직은 그 일을 하기에 충분치 않을 뿐이었다. 나는 나에게 없는 것이 무엇인지 돌아보았다. 그러자 두 가지가 보였다. 바로, ‘임상 경험’과 ‘체계적 조직’이었다. 먼저 ‘임상 경험’, 실제로 환자를 보아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30대 초 뒤늦은 나이지만 병원 수련을 시작해야겠다고 결정했다.

동대문과 을지로 사이에 자리 잡은 국립중앙의료원은 6.25 직후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의 지원을 받아서 세워진 병원으로, 흔히 이 세 나라를 스칸디나비아 3국이라고 부른다. 당시 우리나라는 전 국토가 전쟁으로 황폐화되어있던 터라, 스칸디나비아 3국의 지원을 받아 세워진 국립중앙의료원은 명실상부 국내에서 손꼽히는 병원으로서 명성을 떨쳤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며 세속적인 의미에서 ‘좋은 병원’이라는 명성은 많이 퇴색했다. 이제는 ‘국립중앙의료원’이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낡아빠진 시설들에서 과거의 영화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저 병원 곳곳에서 눈에 띄는 오래된 흑백 사진들만이 흘러간 시절의 영광을 짐작게 할 뿐이었다. 심지어 서울 도심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지만, 많은 이들이 “어 거기 그런 병원이 있었어?” 하면서 그 존재조차 모를 정도로 잊혀진 병원이 되었다.

그럼에도 국립중앙의료원은 대한민국 공공의료의 맏이로서 묵묵히 나름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 말은 곧 국립중앙의료원이 이 사회의 가장 아프고 소외된 이들을 돌보는 곳이란 의미였다. 이를테면 행려병자나 결핵 환자 그리고 에이즈 환자처럼 다른 곳에서 문전박대받았던 이들이 ‘설마 여기라면 받아주겠지’라는 기대를 품고 찾아왔다. 강남대로변의 의사들이 자화자찬의 프로필과 유흥가에나 어울릴 법한 홍보 문구들을 앞세워 돈이 되는 진료에 혈안이 되어 있을 때, 국립중앙의료원의 의사들은 그들이 아니면 삶을 포기해야 할지 모를 소외되고 상처받은 이들을 보듬고 있었다. 나는 국립중앙의료원의 그러한 모습이 좋았고, 내가 해야 할 일이 그곳에 있겠다고 생각했다.

한편, 국립중앙의료원은 비록 외형적인 시설이 낡았을지 몰라도 보건복지부 산하의 공공기관으로서 공공보건의료 영역에서 나름의 확고한 역할이 있었다. 실제로, ‘국립중앙의료원의 설립 및 운영에 관한 법률 제5조’에 따르면 ‘공공보건의료에 관한 임상 진료지침의 개발 및 보급’이 국립중앙의료원이 수행해야 하는 사업으로 가장 첫 줄에 명시되어 있었다. 국립중앙의료원의 이러한 지위는 내가 향후 원격의료라는 영역에 다시금 발을 들여놓겠다는 걸 고려하였을 때 무척 고무적이었다. 적어도, 일반적인 대학 부속 병원이나 사립 병원에서 수련받는 것에 비해서 더 다채로운 경험을 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이 일었다.

나는 33살이 되던 해에 국립중앙의료원의 인턴 의사 모집 전형에 지원했다. 여담이지만, 당시에 나는 국립중앙의료원 지원 사실을 부모님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물론 30살이 넘어 직장을 정하는 데 부모님 일일이 보고할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당시 나는 아직 결혼하기 전으로 부모님 집에 더부살이하고 있었기 때문에 매일 아침저녁으로 보는 부모님에게 병원 지원 사실을 알린다는 게 그렇게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부모님에게 미리 알리지 않은 이유는 혹시라도 떨어진다면 같은 가족이지만 무척 창피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합격 통보를 받았다. 그런데 합격하고 나서는 합격한 대로 또 다른 걱정거리가 있었다. 나의 나이 때문이었다. 지원 시부터 각오하고 있던 것이기는 했지만, 30대 중반을 향해 가고 있는 내가 인턴들 중에 너무 나이 들지는 않았을까 하는 우려가 있었다. 보통 20살에 의과대학에 들어가서 6년 만에 졸업하면, 26살에 의사가 된다. 남자 의사들의 경우 군 복무를 하고 온다고 쳐도, 의사들은 대체로 30살이 되기 전에 수련을 시작하기 마련이다.


문득 의대에 있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당시 입학 후 쉬지 않고 올라온 나의 동기들보다 5살가량 많은 선배가 같은 교실에서 수업을 듣고 있었다. 동기들은 그 선배에게 최대한 예우를 갖추면서 어울릴 기회를 주려고 했고, 그 선배도 기왕 같은 교실에서 수업을 듣게 되었으니 후배들과 함께 잘 지내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 선배는 우리 동기들 안에서 물과 기름처럼 겉돌아서 안타까웠던 기억이 있다. 학교와 직장을 동일 선상에 두고 비교하는 건 무리겠지만, 그럼에도 같이 인턴 생활을 시작한 동기들에게 나 자신이 그런 모습으로 비추어질까 봐 내심 걱정이 된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인턴 오리엔테이션에서 알게 된 바는 나의 우려를 말끔히 해소해주었다. 나와 함께 인턴으로 뽑힌 22명의 의사들의 평균 나이가 33살이었다.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한 게, 그 사실을 알고 나서는 마음이 그렇게 편안할 수 없었다. 실제로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말이다. 내가 이 무리에서 그렇게 눈에 띌 정도로 나이가 많지 않다는 걸 확인하니, 내 기분은 한결 가벼워졌다.

게다가 나와 함께 인턴을 시작한 이들 가운데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이들도 적지 않았다. 심지어 40대도 두어 명 있었다. 나보다 나이가 어리지만 역시 일반적인 기준보다 늦은 나이에 인턴 수련을 받는 이들도 많았다. 나는 스스로 많은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인턴을 시작했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남들이 보기에 그렇지 않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나보다 나이가 많은 인턴을 보고 그냥 ‘그렇구나.’ 하고 지나가는 것처럼, 나 또한 남들에게 그렇게 비추어졌을 것이다.

내가 나보다 나이가 많은 인턴을 지켜보는 입장에 서보고 나서야, 사람들은 남의 일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는 평범한 진리를 새삼 떠올렸다. 내가 어떤 일을 함에 있어서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게 아니라면 어떻게 비추어지는지 크게 연연할 이유가 없었다. 특히 나이 듦처럼 누구나 거쳐 가는 과정이면 더욱 그럴 것이다. 설사 남이 신경을 쓴다고 하여도, 그건 그 사람 머릿속의 일이다. 그로부터 영향을 받을지 말지는 오로지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별도의 사안인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증명사진과 비슷하다는 생각도 든다. 남의 증명사진이 잘 찍혔는지 유심하게 본 적이 있는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남들도 그렇다. 내 증명사진에서 좌우 눈 크기에 차이가 있다는 걸 알아보는 건 나 자신뿐이다. 만약 내 증명사진이 너무 엉망이라고 해도 그때는 사진을 새로 찍어야지, 다른 사람의 증명사진을 내 것인 양 대신 쓸 수 없다. 남의 시간표를 나의 인생에 대입하는 게 무의미한 이유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인생의 시간표가 있다. 나는 20대에 의사가 되었고 대학원생이 되었다. 30대에는 직원 12명을 둔 주식회사의 CEO가 되었다가, 이번에는 병원의 가장 말단인 인턴 의사가 되었다. 나는 그 단계 단계마다 내가 아는 누군가는 지금 어디쯤 가 있을지 의식하고는 했다. 그러다가 뒤늦게 들어갔다고 짐작한 인턴 수련에서 나보다 더 많은 나이에 내 옆자리에 와있는 이들을 보았다. 그제야 비로소 그런 인생의 시간표에 대한 비교가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깨달았다. 나는 33살에 국립중앙의료원에서 인턴 수련을 시작하며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내 인생의 시간표를 써 내려가고 있었다.


이 글은 집필 중인 자전적 에세이 초안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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