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것

지금 당장은 고통스러운 시간도 훗날 돌아보면 소중한 경험이 되고, 반대로 환희의 순간이 예기치 못한 시련의 시작이 되기도 한다. 병원에 떨어진 것도 당장은 좌절이었지만 또 어떤 면에서는 행운이었다. 나는 그제야 비로소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남에게 비추어질 모습에 신경 쓰는 걸 멈추고, 오로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울려오는 내면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집중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걸 왜 하고 싶은지, 자신에게 거듭해서 질문을 던졌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한 가지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여전히 나는 아픈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삶을 살고 싶었다. 그런데 기왕이면 진료실을 벗어나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그랬다. 내가 있고 싶은 곳은 진료실이 아니었다.

그렇게 찾은 답이 바로 ‘약’이었다. 흔히들 말하길, 좋은 약 하나가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살린다고 한다. 그런데 내게 있어 그건 그저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나는 매일 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와파린 몇 알을 물과 함께 삼키며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누군가 이 약을 만들기 위해 일생을 바쳐가며 연구했기에 내가 그 혜택을 보고 있는 것이다. 나도 앞으로 약을 연구하는 일에 투신해야겠다고 굳게 마음을 먹고,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곳이 어디 있는지 찾아보았다.

나는 모교의 약리학 교실을 찾아갔다. 앞에서 소개했듯 의대 교육과정은 크게 기초의학과 임상의학으로 나뉜다. 임상의학은 사람들이 의사하면 쉽게 떠올리는 내과나 외과 같은 분야를 말한다. 여기에서 레지던트로 수련을 받고 나면 전문의가 된다. 한편, 약리학이 속한 기초의학은 이론적인 연구를 중심으로 하는 분야다. 그래서 기초의학 전공자들이 하는 일들을 들여다보면 임상의학 쪽보다는 자연과학 쪽에 더 가깝다. 대다수의 의사들이 가는 길하고는 많이 달랐지만 약을 연구할 수 있다면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나는 스물 일곱 살에 대학원생이 되어 학교로 다시 돌아갔다.

대학원생이 되어 연구실에서 해야 했던 일은 크게 세 가지로, 논문 읽기, 분자 생물학 실험 그리고 동물 실험이었다. 논문 읽기는 말 그대로 나의 연구 주제에 대해 전 세계에서 시시각각 쏟아져나오는 논문들을 읽어나가며 실험과 논문 작성을 위한 이론적 토대를 마련하는 과정이었다. 분자 생물학 실험이란 분자 수준에서의 생명 현상을 이해하고 그것이 우리가 눈으로 보는 생명 현상과 어떻게 연결되는가를 규명하는 실험을 말하는데, 뉴스의 자료화면에서 작은 튜브에 피펫팅을 하는 모습이 나왔다면 아마도 분자 생물학 실험 장면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동물 실험은 분자 생물학을 통해 확인한 현상이 실제 동물의 신체에서는 어떻게 나타나는지 확인하는 걸 말한다. 나는 대학원에서 항우울제를 생산하는 바이러스를 만들었다. 그다음 동물 실험을 통해 이 바이러스가 실제로 작동하는지 확인하는 과정을 이어갔다. 예컨대 쥐를 물통에 빠뜨려서 인위적으로 우울증을 일으키는 실험이 있었다. 그다음 쥐의 머리뼈에 구멍을 뚫어서 우울증약을 생성하는 바이러스를 주입하고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관찰했다.


논문 읽기, 분자 생물학 실험 그리고 동물 실험. 이 세 가지는 결국 논문 쓰기라는 목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결국 대학원에서 연구라는 것의 실체는 논문을 쓰는 것이었다. 논문 쓰기가 내가 생각했던 일이 아니란 걸 깨닫는 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논문에 대한 관심은 줄어들었고, 결과가 궁금하지 않은 실험을 하기 위해 밤늦게까지 연구실에 매여있어야 했다. 이 일들이 누군가에게는 세상 더없이 흥미진진한 일이었겠지만, 나에게는 그저 지루하고 고된 노동일 뿐이었다. 약을 연구한다는 목표를 생각하며 버티려고 했지만, 그 과정이 생각했던 것과 너무 달랐다.

경제학 용어에 매몰 비용이라는 말이 있다. 이미 어딘가에 써버려서 되돌릴 수 없는 비용을 말한다. 여기에서 비용은 돈뿐만 아니라 다른 가치 있는 자원도 의미할 수 있다. 이를테면 내가 대학원을 다니는 데 쓴 시간과 노력이 그렇다. 때로는 이 매몰 비용을 무시해 버리는 것이 훗날 더 큰 손해를 막기도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매몰 비용을 쉽게 포기하지 못한다. 그래서 어떻게든 지금까지 투입한 매몰 비용을 회수하기 위해 이미 잘못된 것으로 판명된 일에 시간을 허비한다. 심리학자 리처드 탈러라는 이를 두고 ‘매몰 비용의 오류’라고 불렀다.

나는 매몰 비용의 오류에 빠져 옴짝달싹 못 하고 있었다. 약리학 연구가 나에게 맞지 않는다는 걸 스스로 가장 잘 알고 있었지만, 대학원을 그만두고 나가기엔 그때까지 쓴 시간과 노력이 너무 아까웠다. 이미 마음은 떠났지만 스스로 판단으로 손해가 명백한 결정을 내릴 용기가 없었다. 사실 아니라고 생각한 순간에 그만두는 것이야말로 미래의 더 큰 손해를 막는 방법이었음에도 말이다.

아픈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걸 만들고 싶었던 나는 뜻밖의 곳에서 돌파구를 찾았다. 바로 인터넷이었다. ‘인터넷에 환자들이 질문하고 의사들이 답할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많은 사람들이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일이었다. 그때부터 일과를 마친 후에는 의학 상담을 위한 웹사이트를 만드는 데 남는 시간을 모두 쏟아부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곧장 컴퓨터 앞으로 달려가서 코딩에 몰입하다 보면 어느새 창밖에서 해가 떠오르곤 했다. 그렇게 낮에는 대학원생으로 그리고 저녁부터는 웹사이트 개발자로 이중생활을 시작했다.

태어나서 웹사이트라는 것을 처음 만들어보았다. 웹사이트 개발을 기초부터 체계적으로 배운 게 아니라 필요한 게 있으면 그때그때 배워가며 했기 때문에 시행착오도 많았다. 하지만 뜻이 있으면 길이 열리는 법, 웹사이트를 만들겠다고 달려든 지 거의 한 달이 지나서 그럴듯한 ‘상담’ 기능이 있는 의학 상담 사이트를 만들었다. 이제 누구나 자신의 건강 문제에 대한 질문을 남길 수 있었다.


하지만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사람들이 이곳을 이용하도록 할 유인책이 필요했다. 아픈 이들이야 본인들의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질문을 올린다고 해도, 의사들이 구태여 여기에 답변을 달 이유는 없어 보였다. 살아있는 의학 상담 사이트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한 가지 확실한 것 하나는 내가 의사들에게 답변을 달아나려고 읍소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은 아니란 점이었다. 사람이란 원래 자기에게 이익이 있을 때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법이다. 그래서 의사들이 내 사이트에 답변을 달면 이익이 된다는 걸 보여주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 무심코 포털 사이트를 보다가 한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2009년 당시에 포털 사이트들을 중심으로 블로그 서비스가 한창 인기를 끌고 있었다. 특히 의사들이 자신이 속한 병원 혹은 자기 자신의 홍보 수단으로 블로그를 활발하게 사용하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그래, 이거야!’라고 외쳤다.

나는 ‘의학 상담’ 게시판에 의사가 답변을 달면 바로 아래에 그 의사의 블로그로 갈 수 있는 소개 문구가 달리도록 하였다. 세상의 많은 일이 그렇듯 생각과 현실은 달랐다. 시도는 좋았지만, 생각만큼 효과가 있지는 않았다. 답변을 다는 의사 입장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그 답변을 본다는 게 보장되어야 했다. 그 정도가 되어야 의사들도 금쪽같은 시간을 내어 답변을 달지 말지 고민할 터였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웹사이트의 ‘의사 칼럼’이라는 또 다른 게시판이 큰 역할을 했다. ‘의학 상담’과 별도로 ‘의사 칼럼’ 게시판을 만들었는데, 블로그를 운영하는 의사들 가운데 글을 잘 쓰는 의사들을 발굴하여, 여기에 그들이 쓴 글을 올리고 각자의 블로그로 연결되는 링크를 달아주겠다고 제안했다. 그 당시 주요 포털 사이트의 첫 페이지에는 블로그 글들이 올라오곤 했는데, ‘의사 칼럼’ 게시판을 RSS로 배포되게 하여 사실상의 블로그로 만들었다. ‘의사 칼럼’은 의사들이 직접 쓴 글이라는 차별화 전략을 앞세워 거의 매일 같이 포털 사이트의 첫 페이지에 소개되기 시작했다. 포털 사이트의 첫 페이지에 한 번 올라간 ‘의사 칼럼’ 글은 수 만 명이 읽고 갔다. 물론 그 수만 명 가운데 꽤 많은 이들이 ‘의사 칼럼’ 아래에 달린 링크를 통해 원문이 실린 의사들의 블로그도 방문했다. ‘의사 칼럼’을 통해 글을 올리는 게 본인들의 블로그에 도움이 된다는 점이 눈에 보이자, 더 많은 의사들이 ‘의사 칼럼’에 자신들이 쓴 글을 보내왔다.

‘의학 상담’ 게시판은 그 나름대로 성황이었다. 포털 사이트를 타고 ‘의사 칼럼’을 읽으러 온 사람들이 의사가 직접 상담하는 게시판을 발견하고 ‘어, 이런 것도 있네.’ 하면서 질문을 올리기 시작했다. 예방접종부터 암 수술 후 관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의 질문들이 게시판을 채워갔다.

그쯤 되자 나는 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대학원을 그만두기로 마음을 정했다. 흥미도 없는 논문 쓰기는 이제 그만하고 싶었다. 대학원에 들어오고 정확히 3년이 지났을 때, 나는 지도 교수에게 그만두겠다고 정중히 이야기했다. 학위는 필요 없다고 말했다. 어차피 그 길로 다시 돌아갈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도 교수가 “그래도 앞으로 필요할지 모르니 학위는 받는 게 어떻겠냐.”고 하였다. 나는 더 이상 대학원에 나오지 않고 그때까지 해왔던 실험과 논문을 정리하는 것을 조건으로 석사 학위를 받기로 하였다.


이제 본격적으로 ‘온라인 의료 상담 서비스’를 만들기 시작했다. ‘온라인 의료 상담 서비스’라고 에둘러 말하기는 했지만 사실 이것은 내가 앞으로 가고자 하는 원격의료를 향한 여정의 첫걸음이었다. 그때 이미 나는 원격의료가 의료의 미래라고 믿고 있었다. 문명화된 사회에서 약자에 대한 배려는 상식 중의 상식이다. 하지만 그러한 상식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영역이 있으니, 바로 의료계다. 환자가 아픈 몸을 이끌고 의사가 편하게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찾아가야 하는 현실을 사람들은 당연하게 여긴다. 이제까지 그렇게 해왔으니 앞으로도 그러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상대적으로 약자인 환자가 있는 곳에서 의사를 만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만약 의사가 환자를 하나하나 찾아올 수 있는 게 현실적으로 어렵다면 그 의사를 대리하는 무언가가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2010년을 전후로 스마트폰이라는 새로운 도구가 사람들의 일상을 바꿔놓기 시작했다. 가만 보니 스마트폰은 손안에 의사가 되기에 충분했다. 의사의 눈이 되어줄 카메라가 있었고 의사의 귀가 되어줄 마이크가 있었으며 의사의 목소리가 되어 줄 스피커가 있었다. 블루투스 기능이 있어서 스마트폰 자체에 없는 의료기기도 얼마든지 활용할 수 있었다. 아직 상상하지도 못한 더 많은 기술들이 나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을 모아서 기존에 만들어둔 의료 상담 사이트를 스마트폰 앱으로 만들어서 배포했다. 당시는 스마트폰이 보편화되고 있던 초창기였기 때문에 개발자들에게도 스마트폰 앱은 생소한 분야였다. 함께 새로운 분야를 개척해보자는 마음 하나로 뭉쳤다. 사용자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여서 새로운 기능을 덧붙이고 기존의 기능은 개선해 나갔다. 예컨대 스마트폰 카메라로 아픈 부위의 사진을 찍어서 의사에게 보내는 단순한 기능부터, 사용자가 의학 상담을 올리면 GPS로 그 위치를 파악해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병·의원의 의사 컴퓨터에 알람을 보내는 프로그램도 공개했다. 하나하나가 전에 없던 새로운 시도였다.

‘의학 상담’은 입소문을 타고 마른 들판에 불길이 번지듯 스마트폰 사용자들 사이로 퍼져나갔다. 그쯤 되자 이 일을 혼자서는 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결국 회사를 만들기로 했다. 회사라고는 했지만 사실 작은 오피스텔에 책상과 컴퓨터 몇 대를 갖다둔 게 고작이었다. 그 작은 공간에서 개발자들과 함께 숙식을 해결하며, 밤낮으로 더 나은 의학 상담을 만드는 데 전념했다.

‘의학 상담’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자 수익 사업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수익 사업을 구상하면서 가장 먼저 고려했던 것은 의료법에 저촉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길게 가려면 법을 지키는 것만큼 중요한 게 없다고 생각했다. 특히, 의료법 제27조 제3항에서 정한 영리 목적의 환자 유인 행위에 해당하지 않도록 하는 게 관건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것이 이른바 지역 상담 우선권이었다. 그것은 한정된 수의 병·의원에 특정 지역 특정 분야에 대한 ‘상담’ 우선권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개념은 같은 건물, 같은 동네에 개업한 다른 의사들을 꺾고 경쟁 우위에 서고 싶어 하는 개원의들의 욕망을 정확히 파고들었다. 자신이 개업한 동네의 환자들을 독점할 수 있다면 개원의들에게 월 몇백은 기꺼이 쓸 수 있는 돈이었다.

전국 각지에 회원 병원이 생겨났다. 직원은 12명으로 늘었다. 회사는 일 년 만에 오피스텔에서 별도의 정원이 딸린 사무실로 이전 했다. 오늘보다 내일이 더 기대되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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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렵 실리콘 밸리로 날아가 벤처 투자자들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출발해 서울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회사의 존재 이유에 대해 다시 돌아보았다. 그러자 그동안 내가 놓치고 있던 것들이 보였다.

스스로 질문을 던져 보았다. 내가 만든 것은 그저 의사들을 위한 마케팅 도구인가. 그리고 나는 정말로 절박하게 도움이 필요한 환자를 돕고 있는가. 무엇보다도, 훗날 이렇게 회사를 키운 것을 후회하지 않겠는가. 그 어느 질문에도 확실하게 그렇다고 답할 수 없었다. 그 질문은 회사에 돌아온 후에도 해결되지 않았다. 직원들이 모두 퇴근한 사무실에 혼자 남아서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의학 상담’은 의사들을 위한 마케팅 도구로서는 훌륭했지만, 아픈 사람을 돕는다는 원격의료의 본질에서는 크게 벗어나 있었다. 어둠 속에 오로지 눈앞의 모니터에서만 빛이 쏟아져 나왔다.

앞으로 더 나아갈 길이 보이지 않았다. 곰곰이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결국 가장 큰 문제는 나 자신이었다. 의사 면허증만 손에 쥐고 있을 뿐 제대로 된 임상 경험이 없었다. 아무래도 의료계에 대한 폭넓은 이해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직원 12명의 작은 스타트업은 돈을 벌기에는 민첩하고 효율적인 조직이었지만 의료라는 거대한 시스템을 다루기에는 비현실적으로 미약한 자원이었다. 의료 마케팅 회사로서는 가능성이 보였지만, 본격적인 원격의료를 다루기에는 한계가 명확했다.


대학원에 들어가서 얼마 지나지 않아 이 길이 내 길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때는 그 판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대학원을 끝내고 나오기까지 3년이란 시간을 흘려보냈다. 이번에는 같은 실수를 하고 싶지 않았다. 회사의 한계가 명확한 상황에서 현재의 돈벌이에 안주한다면 나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셈이었다. 어느 날 화장실에서 양치질을 마치고 거울을 보며 질문을 던져 보았다. ‘지금 이 일이 내가 인생을 걸고 싶은 일인가.’ 거울 속에 있는 이가 아니라고 대답해 주었다. 그렇게 회사를 정리했다.

결국 회사를 없애기로 했다. 나는 내가 공들여 만든 이 회사가 그저 돈을 버는 도구로 남아 있느니 그냥 없애버리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훗날 내가 원격의료를 위한 또 다른 자리에 가 있을 때 내가 앞서 만든 회사가 수익 사업에 열중하고 있다면 누가 나의 진심을 믿어줄 것인가. 그래서 과감히 회사를 없애고 좋은 경험으로 남기는 쪽을 택했다.

삶의 단계마다 반복되는 물음이 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나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순간 과감하게 끝내야 하는가, 아니면 끈기와 성실함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믿음으로 계속 버텨야 하는가. 쉽지 않은 문제다. 그럼에도 나의 경험에 미루어 어설프나마 정리를 하자면 이렇다. 아직 일이 숙달되지 않아 힘들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잘 해내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계속 버티는 것이 옳다. 그리고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면 현재 위치를 지키는 것도 현명한 전략이다. 원래 계속하다 보면 잘하게 되고, 잘하면 좋아지는 게 사람 마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몸담고 있는 곳이 계속 있을 곳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이제까지 쓴 시간과 노력이 아까워 계속 머무르고 있다면, 진심으로 하고 싶은 일이 다른 곳에 있다면, 그렇다면 지금 당장 과감하게 거기서 나와야 한다. ‘나는 여기 있을 사람이 아니야. 암, 난 언젠가 다른 일을 할 거야.’라고 속으로만 되뇌며 현재 주어진 일을 설렁설렁하고 있다면 더 고민할 것도 없다. 현실 회피와 자기기만은 결국 훗날 더 큰 고통을 불러올 뿐이다.

20대 후반, 나는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대학원에 들어갔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생각한 것과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고 나서도 대학원에 쓴 시간에 대한 미련 때문에 망설이다가 3년의 세월을 보내고 말았다. 늦게라도 다시 방향을 잡고 내가 진심으로 ‘하고 싶은 일’을 찾아 회사를 세우고 키웠다. 하지만 그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느낀 바는 정말 그 일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이었다.


대학원생에서 스타트업 CEO를 거치며 내가 ‘해야 할 일’을 위해 찾아야 할 두 가지를 비로소 확인했다. 바로 ‘임상 경험’과 ‘체계적 조직’이었다. 나는 이제 이 두 가지를 얻기 위한 여정을 앞두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어느덧 내 나이도 20대를 지나 30대에 접어들고 있었다.


이 글은 집필 중인 자전적 에세이 초안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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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것”에 대한 1개의 생각

  1. 자신이 가야할 방향을 찿고 노력하는 모습에이 보기 좋네요 인생이란게 시행착오 가 있어야 제대로 완성(?)된다고 하였든가요?
    성공 이란것이 주관적인 것이라
    열심히 사는 님의 생활을 응윈원합니다^^
    건강과 평화와 축복이 모든이와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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