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병 어린이, 의사가 되다

의사고시 시험장은 지어진 지 40년이 다 되어가는 고등학교 교실이었다. 살을 에는 듯한 추위에 숨을 내쉴 때마다 코앞으로 김이 퍼져나갔다. 의자에 앉으니 한기가 올라왔다. 하필이면 자리도 창문 바로 앞이었다. 오래된 건물의 커튼 하나 없는 유리창은 바깥의 추위를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시험 볼 때 거추장스러울까 봐 일부러 옷을 가볍게 입고 왔는데, 막상 자리에 앉고 보니 꽤 추웠다. 덕분에 정신을 차리기는 좋을 것 같았다. 차가운 커피 한 잔으로 정신을 깨우고 곧 시작될 시험을 기다렸다.

이틀 동안 치러지는 의사고시는 지난 6년간의 의대 생활의 마무리 짓고 의사로 거듭나기 위해 거쳐야 할 마지막 관문이었다. 첫날 첫 시간은 의학 총론으로, 80분 동안 의학에 대한 기본 지식을 묻는 문제들을 풀어내야 했다. 시간이 되자 감독관들이 교실로 들어왔다. 감독관들은 곧 시작될 시험에 대한 기본적인 설명을 한 후, 시험지와 답안지를 나눠주었다. 지시가 있기 전까지 시험지와 답안지를 엎어두고 기다리라고 했다. 약속된 시간이 되자 교실 스피커를 통해서 시험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그와 동시에 교실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일제히 자기 앞의 시험지를 뒤집고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나도 숨을 깊게 한 번 들이쉬고 시험지 첫 장을 폈다.

한 문제 한 문제 차분하게 풀어나갔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미처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졌다. 시험지를 펼치고 10분 정도가 흘렀을 때였다. 아랫배에서 심상찮은 신호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아차 싶었다. 고속버스를 타고 가다 조금 전 휴게소를 떠났는데, 화장실에 가지 않은 걸 후회하는 상황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급박감의 강도가 더욱 세졌다. 좀 전에 마신 커피의 이뇨작용에다 추운 날씨까지 겹친 탓이었다.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고 하면 코끼리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고 했던가. 신경을 쓰면 쓸수록 더욱 다급해졌다. 아직 첫 시간의 절반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결국, 교실 앞의 감독관을 향해 손을 들었다. 감독관은 나를 보더니 새 답안지를 주섬주섬 챙겼다. 내가 답안지를 새 걸로 바꿔 달라고 할 줄 알았나 보다. 감독관이 내 옆에 도착했다. 나는 감독관에게 화장실을 좀 다녀오면 안 되겠냐고 물어봤다. 답안지를 바꿔 달라고 할 줄 알고 왔던 감독관은 예상치 못한 질문을 받고 약간 당황한 듯했다. 하지만 감독관은 시험이 끝날 때까지 나갈 수 없다고 확실하게 선을 그었다.

감독관의 그런 대응은 당연한 것이었다. 명색이 국가가 주관하는 시험을 치르는 중인데 예외가 있을 수는 없었다. 만약 내가 화장실을 다녀왔다가 다시 자리로 돌아오기라도 한다면, 부정행위에 대한 시비가 불거질 수도 있었다. 감독관은 그 대신 다른 방법을 제시해 주었다. 답안지를 제출하고 다시 돌아오지 않는 조건으로 화장실을 보내주겠다는 것이었다. 고민이 되었다. 아직 시험 문제를 끝까지 한 번 다 풀지도 못한 상황이었다.

그러는 동안 아랫배는 거의 한계점에 도달했다. 시험이고 뭐고 당장이라도 화장실로 뛰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시험도 마치지 않고 교실을 나가버리면 국시 탈락이라는 냉혹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국시 탈락은 곧 재수를 의미했다. 앞으로 남은 한 시간을 어떻게 넘기는지에 따라 그 이후 365일의 향방이 결정되었다. 나는 감독관에게 시험 문제를 다 풀고 답안지를 제출한 후 화장실에 가겠다고 말했다.

그때부터 빠른 속도로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원래는 답이 헷갈리는 문제를 나중에 다시 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더는 그럴 여유를 부릴 상황이 아니었다. 한순간 한순간 모든 집중력을 쏟아부었다. 문제를 풀고 검토 없이 곧바로 답안지 표시까지 단숨에 마무리했다. 0점 처리가 되지 않도록 수험 번호와 과목 번호만 한 번 더 확인했다. 그렇게 답안지를 완성하고 다시 손을 들었다. 시험 종료까지 아직 30분 넘게 남은 시점이었다. 정신이 혼미해지고 있는 상황 속에서 도저히 불가능하리라 생각했던 일을 완수했다.

감독관은 지금 답안지를 내고 나가면 이번 시간에는 다시 자리로 돌아올 수 없다는 걸 거듭해서 강조했다. 그리고 보조 감독관을 한 명 불렀다. 그에게 내가 화장실에서 일을 보는 동안 뒤에서 지켜보다가 일을 마친 후에는 감독관 대기실로 안내하라고 말했다. 나는 답안지를 내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화장실로 향했다. 급박한 상황을 가까스로 넘겼다. 그동안 보조 감독관은 내 뒤에 계속 서 있었다. 아무래도 좋았다. 어쨌든 이제 좀 살 것 같았다.

감독관 대기실은 교무실 한편에 마련되어 있었다. 한가운데에 놓인 기름 난로 가까이 다가가 몸을 녹였다. 나는 거기서 첫 시간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 보니 여러 잡생각이 들었다. 그중 대부분은 ‘내가 왜 그랬을까.’ 하는 후회였다. 아침에 커피를 마신 것부터 추운 날 옷을 가볍게 입고 온 것까지 하나하나가 후회스러웠다. 다 떠나서, 시험 전에 화장실만 잠깐 다녀왔어도 지금 대기실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는 일은 없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벌어진 일이니 기왕이면 좋은 쪽으로 생각해 보기로 했다. 시험 볼 때 중간에 답을 바꾸면 틀리는 경우가 많다는 속설을 믿기로 했다. 차라리 답을 바꿀 여유가 없었다는 게 다행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혹시 국시에 떨어지더라도, 화장실에 가느라 떨어졌다고 말할 수 있는 핑곗거리도 생겼다. 이래저래 차라리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그 급박한 상황에서 어떻게든 문제를 끝까지 다 풀고 나왔다는 사실이 대견했다. 이튿날에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만반의 준비를 했다. 추위를 이기려고 바지 안에 운동복을 껴입었다. 커피는 당연히 마시지 않았다. 첫째 날의 뼈저린 경험 덕분에 둘째 날에는 별 탈 없이 무난하게 시험을 마칠 수 있었다.

일주일 후 합격자 발표일이 되었다. 발표 당일 아침, 방문을 닫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의사고시는 10명 중 9명이 붙는 시험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런 사실마저 부담스러웠다. 첫 시간 때 있었던 돌발상황으로 합격을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0명 중 1명에 속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국시원 사이트를 열고 합격자 발표 페이지를 열었다.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입력했다. 눈을 감고 엔터 키를 눌렀다. 이미 화면에는 결과가 떠 있을 것이다. 눈만 뜨면 결과를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아직 나는 준비가 안 되었다. 마음을 가다듬고 10여 초가 흐른 후 실눈을 떴다. 속눈썹에 가려진 가느다란 시야 너머로 눈감기 전에는 없던 문장이 하나 적혀있었다.

“제70회 의사국가고시 합격을 축하합니다.”

거기 그렇게 적혀 있었다. 정말로 그렇게 적혀 있었다. 그 문장은 이제 내가 의사라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그것 말고는 달리 해석할 여지가 없었다.

‘세상에, 내가 의사가 되었다니.’

가장 먼저 부모님에게 이 소식을 전해야 했다. 방문을 열고 나왔다. 아버지가 거실 바닥에 신문을 펴놓고 기사를 읽고 있었다. 아버지는 오늘이 합격자 발표날인 것을 모르고 있었다. 뭔가 감격적으로 이 소식을 전하고 싶었다. 그런데 막상 그 순간이 되니 딱히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 앞으로 걸어가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아버지는 고개를 올려 나를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냐는 뜻이었다. 그제서야 내가 말했다.

“제가, 오늘 제가 의사가 됐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래, 수고했고. 의사답게 살아라.”

역시 아버지다운 대답이었다. 약간의 침묵이 흐른 후, 아버지는 내게 질문 하나를 던졌다.

“의사, 판사, 검사… 세상 사람들이 선망하는 이런 직업들의 공통점이 뭘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아버지가 답할 때까지 기다렸다.

“누군가의 고통이 그 존재 이유라는 점이다. 그걸 절대로 잊지 말아라.”

잊고 있었다. 의사라는 직업의 본질이 무엇인지. 내가 왜 의사가 되려고 했는지. 시험 점수를 쫓는 동안 나의 의식 속에서 지워지고 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의사가 된 바로 그 날, 아버지는 그걸 다시 일깨워주고 있었다. 아버지는 내가 원래 누구였는지 묻고 있었다.

‘내가 원래 누구였는지’라는 점에 있어서, 의사가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야 할 사람이 있었다. 바로 주치의 Y 교수였다. Y 교수가 나를 처음 만난 건 그의 나이 30대 중반을 지나고 있을 때였다. 내가 심장병 어린이로 이 병원에서 삶을 시작했을 때, 그는 이제 막 소아과 교수로서의 경력을 시작하던 참이었다. 그로부터 20년이 훌쩍 넘는 시간이 흘렀다. 이제 그는 3년 후면 정년 퇴임을 앞두고 있었고, 그때 그 갓난아기는 의사가 되었다.

마침 며칠 후가 3개월마다 돌아오는 정기 진료일이었다. 의사가 된 후 처음으로 혜화동 대학병원을 찾았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소아과 외래 진료실 앞에 도착했다. 선천성 심장병 환자는 성인이 되어서도 소아과에서 진료를 받는 경우가 있다. 진료의 연속성 때문이다. 가끔 소아과를 다니는 성인 선천성 심장병 환자들의 이야기가 언론에 소개되기도 하는데 바로 그런 경우이다. 나는 외래 간호사가 호명할 때까지 진료실 앞의 빈자리에 앉아서 기다렸다.

잠시 진료실 앞에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공간에서 참 많은 시간을 보냈다.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부터, 숱하게 학교 수업을 빠져야 했던 학창 시절을 지나, 이렇게 의사가 되어 돌아온 20대 중반까지. 잠시 회상에 젖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외래 간호사가 내 이름을 불렀다.

진료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니, 먼저 온 아이들 서너 명이 같은 공간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앞의 아이가 진료를 받는 내용을 뒤에서도 들을 수 있었다. 요즘에는 다들 사생활 보호에 민감하기 때문에, 앞에서 진료받고 있는 환자가 아무리 어린아이라도 다음 사람이 미리 들어가서 기다리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때는 그런 게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여졌다. 워낙 전국 각지에서 환자가 밀려드는 병원이다 보니, 같은 진료실 안에서 함께 기다리는 것 정도를 불평하는 이는 없었다. 한편으로는 같은 처지에 있는 이들끼리 어떤 막연한 공감대 같은 것도 있었다.

앞에 아이들이 진료를 마치고 내 차례가 되었다. 나는 Y 교수에게 공손히 인사를 하고 의자에 앉았다. 항상 그렇듯 진료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교수는 내게 그간 불편한 점이 있었는지 묻고, 두 손으로 옷을 올리게 한 후 청진기를 움직였다. 그러고 나서 옆자리의 레지던트에게 기록할 내용을 알려줬다. 교수는 내 쪽으로 돌아앉아서 심장 소리가 괜찮으니 잘 지내다 다음에 또 보자고 말했다. 그리고 내게 줄 약을 처방하기 위해서 모니터 쪽으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이제 내가 기다리던 순간이 왔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기에 앞서 Y 교수에게 말했다.

“저, 교수님. 저도 이제 의사가 되었습니다.”

교수는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다시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가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앞으로 열심히 해봐.”

나는 코끝이 찡해졌다. 그는 “그동안 고생했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앞으로 열심히 해봐.”라고 말했다. 그의 말은 ‘그동안’이 아니라 ‘앞으로’로 시작했다. 그는 내가 ‘그동안’ 지나온 과거가 아니라 ‘앞으로’ 가야 할 미래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그 순간만큼은 나를 환자가 아닌 의사로 보고 있었다. 잠깐 순간에 비친 그의 본심이 고마웠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내 앞에서 먼저 진료를 마치고 옷을 주섬주섬 입고 나가려는 어떤 아이와 그의 어머니, 그리고 내 뒤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또 다른 아이들과 그 어머니들이 있었다. 그들은 나와 교수가 나누는 대화를 다 듣고 있었다. 사실은 내가 그들도 들을 수 있도록 크게 말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에게 ‘같은 진료실을 거쳐 간 어떤 한 사람이 커서 의사가 되었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

육상에 ‘마의 벽’이라는 말이 있다. ‘인간이 만약 1마일을 4분 안에 뛰려고 한다면 심장이 견디지 못하고 파열할 것’이라는 20세기 초 육상계에 널리 퍼져있던 믿음에서 유래한 이 말은 결코 넘을 수 없다고 여겨지는 한계를 가리킨다. 당시 사람들에게 ‘1마일에 4분’은 결코 넘을 수 없는 ‘마의 벽’이었다. 하지만 이 벽은 1954년 5월 6일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 의대생 로저 베니스터Roger Bannister가 1마일을 3분 59초 4에 주파하며 깨지게 된다.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은 그다음부터 이어진다. 베니스터가 4분 벽을 돌파한 지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10명, 1년 후에는 27명, 그리고 2년 후에는 무려 300명이 넘는 선수들이 마의 4분 벽을 뛰어넘는다. 사실 ‘마의 벽’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던 것이다. 누군가 그것을 깨버리면 그 이후에 따라오는 이들에게 그것은 더는 ‘마의 벽’이 아니게 된다.

나는 그 아이들에게, 그리고 그들의 부모에게, 심장병은 그들 인생을 가로막는 ‘마의 벽’이 아니란 걸 보여주고 싶었다. 그들이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을 한발 앞서 걸어가 본 사람으로서 그들도 얼마든지 이 세상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 수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내가 그날 의사가 되었다고 말했을 때, 그들의 지쳐있던 눈빛이 잠시나마 반짝이는 걸 보았다. 그날 진료실에 있던 아이들과 부모의 마음속 ‘마의 벽’에는 조금씩 금이 가고 있었다.


이 글은 집필 중인 자전적 에세이 초안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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