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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미 스튜디오 만년필

만년필은 필기구 본연의 기능보다는 사치품으로서 인식되는 경향이 있다. 사실 글씨를 쓴다는 목적만을 위해서라면 수십만 원부터 수백만 원에 이르는 만년필보다 문구점에서 파는 몇천 원짜리 볼펜이 기능 면에서나 가성비 면에서 더 나을지 모른다. 그런 와중에도 라미 만년필은 여전히 실용적인 필기구로서 나름의 영역을 지켜가고 있다.

라미의 만년필은 가격대에 따라 영Young, 모던Modern, 프리미엄Premium으로 나뉘는데 뒤로 갈수록 고급 기종이다. 내가 사용하고 있는 라미 스튜디오는 프리미엄으로 분류된다. 참고로, 만년필 입문자들이라면 한 번 정도는 사용하기 마련인 라미 사파리는 영에 속하며, 라미를 대표하는 모델인 라미 2000은 프리미엄에 속한다.

라미 스튜디오 만년필은 크게 065, 066, 067, 068, 069의 모델명으로 나뉜다. 여기서 가장 기본적인 모델은 065와 067로, 모두 스틸 펜촉이 부착되어있다. 065는 그립 부분이 까만 고무 재질로 되어있는 것이 특징이고, 067은 크롬 코팅된 재질로 되어있다. 쉽게 외형상으로 구분하면 그립이 065는 까만색이고 067은 매끈한 은색이다. 그 외에 066은 한정판에 배정된 모델명이고, 068과 069는 고급형으로 14K 금 펜촉을 쓴다. 단, 펜촉은 별도로 구입하여 모델 간 호환이 가능하다. 068과 069는 다른 기본 또는 한정판 모델보다 2배에서 5배 정도 비싼 가격대를 형성하고 있다.

나는 065와 067중에서 고민하다가 067을 구입하였다. 인터넷 리뷰에서 065의 고무 그립이 오래 사용하면 파손되는 경우가 있다는 내용을 보았기 때문이다. 단, 067의 크롬 코팅 그립은 마모될 소지는 적지만 065의 고무 그립보다 매우 미끄럽다는 점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065는 까만색 고무 그립과 대비되는 은색 스테인리스 스틸 재질의 배럴을 채택하고 있고, 067은 은색 크롬 코팅 그립과 대비되는 까만색의 매트 블랙과 짙은 파란색의 임페리얼 블루의 배럴을 채택하고 있다. 만약 그립과 배럴 모두 은색의 제품을 원한다면 금 펜촉 적용 기종인 068과 069에서 선택해야 한다.

이 중에서 나는 크롬 코팅 그립과 까만색 배럴로 구성된 067 매트 블랙 모델을 선택했다. 펜 촉은 EF로 하였다. EF의 의미가 Extra Fine이지만, 독일제 만년필의 EF는 아주 가늘다고 하기는 어렵다. 실제 필기 시 볼펜 기준으로 0.5mm 정도의 선 두께를 보여주었다.

기능성

뚜껑을 닫았을 때 길이는 140mm이고 뚜껑을 뒤에 꽂았을 때 길이는 155mm이다. 가장 굵은 부분의 지름은 13mm로 중간 정도 굵기의 만년필에 속한다. 무게는 31g으로 가벼운 만년필은 아니다.

잉크는 컨버터와 카트리지 모두 사용 가능하다. 권장 컨버터는 0.75mL 용량의 LAMY Z27이고, 권장 카트리지는 LAMY T10이다.

펜 촉을 쉽게 분리 및 교체할 수 있다. 만년필을 쓰다 보면 수리와 세척이 필요할 때가 있기 마련이다. 펜촉을 따로 분리할 수 있고, 때에 따라서는 새것으로 교체할 수 있다면 그럴 때 매우 편리하다. 판매처에서는 사파리 펜촉과 호환이 가능하다고 하는데 사파리 구입 시 부착되어 나오는 펜촉과 모양에서 다소 차이가 있다. 사실 라미는 라미 2000 모델을 제외하고는 모두 펜촉이 호환된다.

그립의 단면이 완전한 원형이기 때문에 기존에 사파리 사용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펜 촉의 각도를 유지하는 데 적응이 필요하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만년필의 각도가 틀어지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립의 전방 끝과 배럴의 후방 끝의 돌출된 구조가 동일하다. 이 부분은 뚜껑 안쪽 부분과 결찰되어 고정하는 역할을 한다.

상기에 언급한 대로 크롬 코팅이 된 그립을 쓰는 067 모델은 손에 쥘 때 다소 미끄러운 느낌이 있다. 또한 매끄러운 재질인 만큼 지문이 남는 점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심미성

프로펠러 형상의 클립이 인상적이다. 만년필 뚜껑을 잡을 때 편리한 구조이다. 클립 옆에 LAMY라는 로고가 인쇄되어 있는데 이 점에서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 클립을 위쪽으로 하고 LAMY 로고를 읽으면 글씨가 거꾸로 쓰인 것처럼 보여서 인쇄 방향을 잘못 설정한 것이 아닌가 의아할 수 있다. 그런데 LAMY 로고가 보이게끔 하고 만년필을 바닥에 놓으면 자연스럽게 클립이 아래쪽으로 향하게 되고 이때 LAMY 글씨는 정방향이 된다. 그 점을 고려해서 인쇄 방향을 정한 것으로 보인다.

만년필을 닫았을 때 뚜껑과 배럴 간 이음새의 단차가 거의 없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정교하게 연결된다. 다만 이 부분에 미세한 유격이 있어서 약간의 흔들림은 있다. 사용하는 데 크게 거슬릴 정도는 아니지만 민감한 사람이라면 불편할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립과 배럴이 뚜껑의 안쪽 부분과 결찰하고 뚜껑의 모서리와 밀착되지 않는 구조이다. 만년필의 뚜껑을 여닫는 과정에서 배럴에 흠집이 날 여지가 적은 것은 장점이다. 다만 그러한 이유로 만년필의 뚜껑을 뒤에 완전히 꽂아도 약간 들뜬 듯한 느낌이 든다. 사람에 따라서는 이 점이 거슬릴 수도 있다.

내구성

구조상 특별히 취약한 부분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일부 인터넷상의 사용기에 따르면, 065 모델의 고무 재질의 그립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마모된다는 내용이 있었다. 모델 선택 시 고려할 점이다.

프로펠러 클립의 만년필 뚜껑과 맞닿는 부분이 좁기 때문에 마찰이 생길 수 있다. 일부 인터넷상의 리뷰에 따르면 시간이 지나면서 만년필 뚜껑 부분에 도장이 벗겨진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총평

차분하고 간결한 디자인의 만년필이다. 서명용으로 큰 시선을 끌지 않고 부담 없이 사용할 수 있다. 다만 무게감과 크롬 코팅 그립의 미끄러움 때문에 필기량이 많은 사람에게는 적합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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