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생으로 살아가기

이제껏 겪어본 적 없는 세상이었다. 전국에서 공부로 난다 긴다 하는 아이들이 한 교실에 다 모여있었다. 개개인의 능력뿐 아니라 그들의 배경도 대단했다. 누구의 부모가 종합병원 원장이라느니, 또 누구 아빠는 저명한 교수라느니 하는 이야기를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었다. 멀리 갈 것도 없었다. 나와 함께 거창고를 졸업하고 고려대 의대에 입학한 친구가 한 명 더 있었는데 그의 아버지도 역시 의사였다.

그들이 부럽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냥 ‘나와는 다른 세상에서 온 이들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사실 그들을 부러워할 겨를이 없었다는 게 맞다. 나에겐 또 다른 마음의 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내가 심장 수술을 받았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드러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누가 우연히라도 알게 되지 않기를 바랐다. 게다가 앞으로 의사가 될 이들 아닌가. 그들이 나에 관한 내용을 교과서에서 찾아보는 상황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그게 그저 기우만은 아니었다. 고등학교에서 이미 뼈저리게 경험한 바였다. 고등학생 시절 내가 심장 수술을 받고 돌아왔을 때, 나를 두고 농담처럼 ‘야, 승건이 심장 멈추는 거는 아니냐’며 조롱한 아이가 있었다. 제 딴에는 재밌자고 한 말이었겠지만, 아니 어쩌면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이었겠지만, 나는 아직도 그 말과 그의 얼굴을 기억한다.

거창고에서 함께 의대로 진학한 친구 K에게 말했다. 의대 친구들은 내가 아팠던 이야기를 몰랐으면 좋겠다고. 고마운 친구였다. 그 친구는 나의 비밀을 지켜주려고 진심으로 노력했다. 뿐만 아니라 시간 날 때마다 나를 헬스장에 데리고 다니며 체력을 단련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었다. 혹시라도 나중에 그런 사실이 알려지게 되더라도 자신감을 잃지 않도록 하려는 배려였다.

입학 이후 매사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각오로 임했다. 그 시작은 막걸리 사발식이었다. 고려대학교에는 막걸리 사발식이라는 전통이 있다. 신입생들이 치르는 일종의 신고식 같은 것이다. 세간에는 이를 두고 긍정부터 비판까지 다양한 관점이 있겠지만, 이 의식이 고려대의 일원이 되기 위해 가장 먼저 거치는 통과 의례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입학식 며칠 후 말로만 듣던 사발식이 열렸다. 나와 함께 입학한 신입생이 120명 정도 되었는데, 의대 구내식당에 12명씩 10개 조로 나뉘어 큰 테이블에 나누어 앉았다. 각 조 앞에 바닥에 파란 비닐을 깔아 두고 그 위에 사발식을 진행할 작은 테이블을 하나씩 준비해 두었다. 그 작은 테이블 위에는 막걸리를 채울 냉면 사발이 하나씩 놓여있었다. 각 조마다 한 명씩 앞으로 나와서 냉면 사발에 가득 담긴 막걸리 사발을 비우고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가 앉으면 되었다.

다 같이 주먹을 쥐고 “마실까 말까, 마실까 말까.”로 시작되는 ‘막걸리 찬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의대 학생회장이 시범을 보였다. 자기 앞에 놓인 막걸리 한 사발을 몇 초만에 뚝딱 비워버렸다. 분위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이제 각 테이블에서 차례대로 한 명씩 나왔다. 자기 앞에 놓여있는 막걸리 사발을 비우기 시작했다. 개중에는 마시다가 멈추고 손으로 입을 틀어막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에는 예외 없이 자기 것은 다 비웠다. 끝까지 마시고 빈 사발을 머리 위에 털고 나면 환호가 이어졌다. 그러고 나면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선배들이 이들을 화장실로 데려가서 방금 전에 마신 막걸리를 다 토해내게 했다.

내 차례가 되었다. 신입생답게 쑥스러운 듯 일어나서 막걸리가 놓인 테이블 앞으로 갔다. 막걸리가 가득 담긴 냉면 사발이 놓여있었다. 멀리서 볼 때 하고는 느낌이 또 달랐다. 도저히 내가 마실 수 있는 양이 아니었다. ‘내가 이걸 다 마실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맴돌았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깐, 이미 옆에서는 두 손으로 사발을 들고 들이키고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 쟤들도 하는데 나라고 못할 것 없지.’

결국엔 나도 두 손으로 냉면 사발을 들고 막걸리를 입으로 들이부었다. 한 모금 한 모금 위장에 묵직한 액체가 차올랐다. 절반쯤 마시고 숨이 차서 한 번 쉬었다. 이러다가 위가 터지면 어쩌나 하는 공포감이 엄습했다. 그만두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여기서 관두고 자리로 돌아가면 두고두고 안주거리가 될 것 같았다. ‘그래, 뭐 어떻게 되겠지.’라는 생각으로 끝까지 들이부었다. 결국 냉면 사발이 바닥을 드러냈다. 해냈다는 기쁨을 누릴 새도 없이, 곧바로 화장실로 달려가 마신 것을 모두 게워냈다. 기꺼운 마음으로 다시 자리에 돌아왔다. 주먹을 쥐고 ‘막걸리 찬가’를 따라 불렀다.

이제 와서 하는 이야기지만, 나는 사실 술을 마시면 안 되었다. 그때 이미 와파린이라는 약을 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장에 인공판막을 달고 있으면 혈전이 생길 위험이 높아지는데, 와파린은 피가 굳는 정도를 낮추어 혈전이 생길 수 있는 위험을 줄인다. 이 와파린은 간에서 대사가 되는데, 술의 주성분인 알코올도 마찬가지로 간에서 대사 된다. 좁은 길에 차량이 몰리면 교통정체가 일어나듯, 술을 마시면 와파린의 대사가 늦어지게 되고, 그 결과 와파린의 약효가 급격히 상승할 수 있다. 와파린의 약효가 상승한다는 것은 피가 굳지 않는다는 걸 의미한다. 즉, 작은 상처에도 피가 멎지 않아서 위험한 상황에 처할 수 있다.

하지만 대학생활을 하면서 술자리를 피할 수는 없었다. 먼저 나서서 술을 마시자고 하지는 않았지만, 불러주는 술자리는 마다하지 않았다. 술자리에서 남이 따라주는 술을 어김없이 다 받아 마셨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참 미련하고 위험하기까지 한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 술을 마실 수 없는 이유를 말할 용기가 없었다. 그때는 술을 마셔서 잘못되는 것보다 남들과 다르게 보이는 게 더 두려웠다.

남들과 다르고 싶지 않은 것은 공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의대 교육과정은 크게 의예과 2년과 의학과 4년으로 이루어진다. 줄여서 각각 예과와 본과로 부르기도 한다. 예과는 그 이름대로 의학을 공부하기 전의 예비단계를 말하는데, 화학이나 생물학 같은 의학의 기초가 되는 과목과 인문학 같은 교양 과목을 배운다. 예과 수업 가운데 필수 과목은 의대 건물에서 받기도 하지만, 상당수 수업은 의대가 아닌 이공대나 인문대 쪽에서 받고 오기도 한다.

본과는 말 그대로 의사가 되기 위한 본과정이다. 총 4년이 걸리는데, 처음 2년 반 동안은 이론 수업으로 이루어진다. 이론은 해부학이나 병리학과 같은 기초 의학과 내과나 외과 같은 임상 의학을 포함한다. 본과 1학년부터 3학년 2학기에 이르는 2년 반 동안 교실에 앉아서 책에 머리를 묻고 공부하는 지난한 시간이 이어진다. 약간의 과장을 보태서 고3 정도의 긴장이 이어지는 시기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의대 본과는 다른 과들처럼 학생이 교실을 옮겨 다니며 수업을 듣는 게 아니라 고등학교처럼 학생은 교실에 앉아있고 교수가 들어와서 수업을 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단 한 과목만 F를 받아도 일 년을 통째로 다시 다녀야 한다.

나 스스로 중간은 가자고 했다. 시험 전날이면 친구들과 함께 의학 도서관에서 밤을 새웠다. 결국은 새벽 즈음 짜장면을 시켜먹고 도서관 소파에서 잠들어 버린 게 대부분이긴 했지만. 사실 시험 전날 밤을 새우는 학생들이 성적은 별로인 경우가 많다. 고백컨데 나도 성적은 그렇게 좋지 못했다. 그래도 유급 없이 6년 만에 졸업할 수 있었음에 만족했다. 졸업식 때 보니 6년 전에 함께 신입생으로 입학했던 120명의 동기들 가운데 함께 졸업하는 사람이 50명 남짓이었다. 중간은 했다는 것이 스스로 대견했다.

한편으로, 내가 받은 수술에 관해서 만큼은 끝까지 비밀로 남기고 싶었다. 그래서 열심히 술을 마셨고, 그래서 함께 밤을 새운 것도 있었다. 그러나 몇 차례 위기의 순간도 있었다. 그중에도 기억에 남는 두 가지가 있다. 언젠가 동아리 뒤풀이 후에 호프집에 모여서 치킨을 뜯고 있던 중이었다. 선배 하나가 어디서 대단한 정보를 얻기라도 한 것 마냥 나에게 물었다.

“다른 과에 거창고 나온 친구한테 들었는데, 너 심장 수술받은 적 있다며?”

나는 표정이 흔들릴까 봐 안면 근육에 힘을 줬다. 어떻게 지킨 비밀인데, 그동안의 노력을 수포로 돌릴 수 없었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다는 전혀 상관없는 속담을 떠올리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아, 그거 저랑 이름이 비슷한 다른 친구 이야기하는 거예요. 저 아니고요.”

그리고 디테일을 살리기 위해 한 마디를 덧붙였다.

“자주 듣는 이야기예요.”

그때 그 선배가 내 말을 믿었는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믿기로 했다. 그거면 됐다. 어쩌면 내게 중요했던 것은 남들의 실제 인식이 아니라 남들이 그렇게 인식하리라는 나 자신의 믿음이었을지도 모른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나는 3개월마다 혜화동에 있는 병원에 외래 진료를 다니고 있다. 진료실에 들어가면 낯익은 Y 교수님이 앉아있다. 교수님은 그동안 잘 지냈냐는 인사를 건네고는 “소리 좀 들어볼까?” 하면서 청진기를 든다. 나는 그 말에 따라 옷을 들어 올린다. 교수님이 청진기를 대고 소리에 집중하는 동안, 나는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교수님의 정수리를 말없이 쳐다본다. 교수님은 잠시 후 옆에 있던 레지던트에게 지시 사항을 전달하고, 그는 한마디라도 빠뜨릴세라 재빨리 키보드를 치면서 받아 적는다. 교수님은 다시 내 쪽으로 몸을 돌리고 “괜찮네. 잘 지내고. 다음에 보자.”라고 말한다. 그렇게 진료가 끝난다.

그날도 별 다를 것 없는 외래 진료일이었다. Y 교수님의 지시사항을 컴퓨터에 받아 적고 있던 레지던트의 얼굴을 보기 전까지는. 평소 후배들을 잘 챙기던 성격 좋은 여자 선배였다. 모교 밖에서 학교 선배를 만나는 일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그것도 다른 곳이 아닌 바로 그 진료실에서 마주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그 선배와 나는 서로를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그리고 선배는 말없이 모니터에 적힌 내용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냥 기분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때부터 그 선배의 표정은 미묘하게 굳어있었다.

나는 진료를 마치고 나왔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 교수님의 그날 진료가 모두 끝날 때까지 문 밖에서 기다렸다. 마지막 환자가 나온 후 조심스럽게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교수님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날 준비를 하고 있었고, 그 선배는 남아서 그날 진료한 내용을 정리를 하고 있었다. 교수님에게 저분이 제 학교 선배인데 잠시 전할 말이 있어서 들어왔다고 말했다. 교수님은 그러냐고 하면서 그럼 다음 진료 때 보자는 이야기를 하고 떠났다. 마침 간호사도 자기 짐을 챙겨서 방을 나갔다. 이제 나와 그 선배 둘만 남았다.

“놀라셨죠?”

선배가 먼저 말을 꺼내기 쉽지 않을 듯하여, 내가 먼저 물었다. 그러자 선배가 대답했다.

“응, 나는 네가 여기 다니는지 몰랐네.”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요구사항을 말했다.

“선배님, 학교 사람들 만나면 말씀하지 말아 주세요. 부탁드려요.”

선배는 그러겠다고 했다. 이번에도 나는 믿기로 했다. 선배가 괜찮은 사람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그렇게 생각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내 심장 병력이 학교에 알려지는 것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부디 그 선배가 비밀을 지켜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남들과 다르다는 걸 알았기에, 다르지 않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다. 그와 동시에 남들과 다른 점은 애써 숨기고자 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진짜 문제가 아니었다. 나를 세상에 그대로 드러낼 용기가 없었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나 스스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다행스럽게도 졸업 전에 그걸 바로잡을 기회가 있었다.

앞에서 본과는 고3의 연장 같다고 했지만, 본과 3학년의 여름방학에 이르면 또 다른 전환기를 맞는다. 3학년 2학기부터는 교실에서 병원으로 장소를 옮겨 학생 실습이 시작하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흔히 ‘폴리클’이라고 한다. 의대생들은 이때까지도 아직 학생 신분이지만 처음으로 흰 가운을 입고 병원에 입성한다. 그래서 외부인이 보기에는 의사인지 학생인지 사실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폴리클을 시작하기 앞서 화이트 코트 세리머니White Coat Ceremony라는 조촐한 행사를 열기도 한다. 참고로, 우리가 흔히 의사라고 하면 떠올리는 흰 가운은 영미권에서 화이트 코트white coat라고 부른다.

폴리클 기간은 본과 4학년 여름방학까지 1년 동안인데, 내과나 외과 같은 소위 메이저 과들에서 1달씩 그리고 그 밖의 마이너 과들에서 1주에서 2주 정도씩 보내게 된다. 그렇게 1년 간의 폴리클 과정을 거치고 나면 본과 4학년 여름이 된다. 그때부터 의대생들은 의사국가시험, 줄여서 국시를 준비하는 데 전념한다.

본격적인 국시 준비 기간에 앞서, 일 년 동안의 폴리클의 마지막 일정으로 한 달 동안 타 기관으로 떠나는 외부 실습이 있었다. 학생들이 부속 대학병원을 벗어나 다양한 경험을 하도록 돕겠다는 취지였다. 학생들은 이 한 달이라는 시간을 각자의 계획에 따라 나름대로 활용했다. 어떤 이는 종교 단체를 통해 해외 의료봉사를 떠나기도 했고, 또 어떤 이는 정부 기관처럼 환자 진료가 주 업무가 아닌 기관에 다녀오기도 했다. 개중에는 지인의 병원에 이름만 걸어두고 해외여행을 떠나는 경우도 있었다.

연어의 회귀본능 비슷한 것이었을까. 나는 내가 수술받은 바로 그 혜화동 대학병원의 소아 흉부외과에 실습을 나가기로 했다. 그렇게 마음을 먹고 가장 먼저 주치의 교수님을 찾아갔다. 학교에서 외부로 실습을 나갈 기회가 생겼는데, 여기서 그 시간을 쓰고 싶다고 말했다. 교수님은 나를 적극 도와주겠다고 했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자신이 갓난아기 때부터 돌봐오던 환자가 이제 곧 의사가 되겠다고 하는데. 참고로 나의 주치의 교수님의 소속과는 소아청소년과이다. 수술 자체는 소아 흉부외과에서 받았지만 그 이후 관리는 소아청소년과에서 심장을 전문으로 진료하는 교수님에게 받고 있다. 주치의 교수님은 곧바로 소아 흉부외과 교수님에게 나를 연결해 주었다. 그렇게 한 달 동안 소아 흉부외과에서 실습을 하게 되었다.

오래전 수술을 받던 날의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 있다. 아침 6시,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수술 대기실로 향했다. 내가 수술실로 들어갈 때까지 어머니는 나의 손을 놓지 않았다. 이윽고 내 차례가 되었고 나는 이동식 침대에 반듯이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내가 실린 이동식 침대가 수술실로 향하는 동안 천장에 달린 형광등이 머리 위에서 발아래로 스쳐 지나갔다. 수술실에 도착했을 때 그곳엔 이미 여러 사람들이 저마다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고 복잡한 기계들의 신호음이 들려왔다. 잠시 후 나는 수술대로 옮겨 누웠고, 누군가가 이제 내가 잠을 잘 거라며 얼굴 위에 투명한 마스크를 씌워주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갑자기 주변이 밝아졌다. 좀 전과는 다른 장소였다. 멀리서 뚜뚜뚜 거리는 기계음들이 들려왔다. 내 상태를 체크하며 오가는 의료진들의 모습이 뿌연 시야를 비집고 들어왔다. 수술이 끝난 후의 중환자실이었다.

환자로 처음 왔던 그 공간들을, 10년이 지나서 예비 의사가 되어 돌아왔다. 그때는 흰색 바탕에 줄무늬가 그어진 환자복을 입고 있었지만 이제는 파란색 수술복을 입고 있다. 그때는 수술대 위에 누워있었지만 이제는 그 옆에 서있다. 내가 잠든 순간부터 중환자실에서 깨어났을 때까지, 내게 분명히 일어났었으나 직접 볼 수 없었던 그 비밀스러운 시공간의 문이 열리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어린 환자들이 수술대 위에 올라왔다. 어깨에 예방 접종을 하나 맞히려고 해도 울고불고할 아이들인데, 그에 비할 수 없는 심장 수술 앞에서는 놀랍도록 차분했다. 이동 침대에서 수술대로 옮겨가라는 말을 듣고 고분고분 옮겨갔다. 누우라는 말에 또 그대로 따랐다. 잠시 후 잠이 들고, 가슴을 열고, 심장을 드러냈다. 저 아이들에게는 앞으로 어떤 인생이 기다리고 있을까. 내가 그랬듯 남몰래 숱한 눈물을 흘리겠지. 그래도 이겨내야 한다. 남들에게는 별거 아닌 그 평범한 삶을 위해서.

하루의 수술 스케줄이 모두 끝났다. 오후 늦게 혼자서 불이 꺼진 수술실을 다시 찾았다. 수술실 바닥은 말끔하게 청소되어 있었고, 기계들도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분주하게 돌아가던 곳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수술실 한가운데 놓인 빈 수술대가 눈에 들어왔다. 10년 전에 내가 수술을 받기 위해 누웠던 곳을 손으로 만져보았다.

눈을 감고 그 수술을 받기 전날 저녁을 떠올렸다. 그날 나는 병실의 창문 건너 의학 도서관에 있는 이들을 보며 다짐했었다. ‘병실에서 의학도서관을 바라보는 삶’이 아닌 ‘의학도서관에서 병실을 바라보는 삶’을 살겠다고. ‘환자들을 바라보는 삶’을 살겠다고. 이 수술대에 누워있던 나는 그 다짐이 이렇게 현실이 될 거라는 걸 정말 믿고 있었을까. 그리고, 지금의 나는 정말 나를 믿고 있을까.

그제야 비로소 알았다.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는 분리할 수 없었다. 이제는 숨기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숨지 않기로 했다. 남들이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 보다, 내가 스스로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귀 기울이기로 했다. 나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믿기로 했다.

남의 시선을 무척이나 신경 쓰며 살았었다. 조금 더 자신 있게 지냈어도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그때 그렇게 남들을 의식했던 기억이 있었기에, 이후에는 나 자신의 목소리에 더욱 귀를 기울일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세상에 의미 없는 경험은 없다고 하던데 정말 그렇다. 남들 속에 섞이려고 부단히 노력했던 의대생 시절조차도 나라는 인간을 만들어가는 여정이었다. 그 길을 돌고 돌아서 지금 여기에 내가 서 있다. 물론 아직도 갈길이 먼 미완의 삶이지만.


이 글은 집필 중인 자전적 에세이 초안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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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대생으로 살아가기”에 대한 1개의 생각

  1. 누구든 드러내고싶지 않은 부분들을 갖고있겠죠. 그것이 뭐가 됐든. 말씀하신대로 나중에 돌이켜보면 아무것도 아니게 될 때, 이전의 내가 어렸다 책하지 말고, 그저 내가 그만큼 성장했구나… 그렇게 생각하면 될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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