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 이야기

나는 서울 잠실에서 태어났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빌딩이 있는 곳 바로 옆이 내 고향이다. 하지만 그곳에서 오래 살지는 않았다. 서너 살 무렵 잠실에서 그리 멀지 않은 강동구로 이사를 갔다. 아버지가 은행원이었는데, 은행 사택으로 마련한 강동구 길동의 아파트였다. 그때 이후로 중학교 2학년 때까지 길동과 그 옆의 명일동 일대에서 몇 번 이사를 다니며 살았다. 지금 손가락으로 햇수를 세보니 길어야 10년 내외의 시간이었다. 최근의 10년은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버린 것 같은데, 그 시절 10년은 참 아득하리만치 길게 느껴진다.

학교에 입학하기 전 1년 동안 유치원에 다녔다. 길동에 있는 한성유치원이라고, 지금도 있다. 유치원 안에는 수영장과 노란색 45인승 버스가 있었다. 당시가 80년대 초반이었던 걸 고려하면 나름 잘 갖추어진 유치원이었다. 보통 오전이면 유치원의 일과가 끝났고, 나는 집에서 점심을 먹고 다시 왔던 길을 거슬러 유치원으로 돌아가고는 했다. 그러면 선생님들도 점심 식사를 마무리할 시간쯤이 되었는데, 그냥 내가 유치원에서 놀게 놔두었다. 나는 그 넓은 곳에 있는 장난감들을 혼자 독차지하고 오후 시간 내내 보내곤 했다.

또 한 가지 기억나는 건 여름철에 벌들이 날아다니던 유치원 야외 화단이었다. 나는 꽃에 앉아있는 벌에게 조심히 다가가 엄지와 검지로 벌의 날개를 뒤로 젖혀서 손으로 잡고 놀았다. 그러다가 조준을 잘못해서 벌의 머리를 잡았는데, 그 벌이 온몸을 굽혀 꽁무니에 있는 벌침을 내 엄지를 쏘았었다. 나는 놀라서 그 벌을 놓아주었으나, 벌의 꽁무니에서 빠져나온 벌침은 내 손가락에 박혀있었다. 놀라서 선생님들이 달려왔고, 빨간약을 발라주었다. 그 후로는 절대 벌을 손으로 잡지 않았다.

이듬해 옆 동네 명일동으로 이사를 가면서 대명 국민학교에 입학했다. 이전에 말했듯 나는 마지막 국민학교 세대다. 내가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1년 후 국민학교는 초등학교로 바뀌었다. 국민학교라는 명칭이 일제 시대의 잔재라서 그랬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의 경복궁 자리에 위치했던 옛 조선총독부 건물도 그 무렵 헐렸다.

대명 국민학교에 입학하고 졸업했지만, 그곳이 내가 다닌 유일한 국민학교는 아니다. 아버지의 은행 지점 발령으로 5학년 1년 동안은 수원에 있는 영화 국민학교를 다녔다. 그리고 1년 후 다시 원래 다니던 대명 국민학교로 돌아왔다. 보통은 전학을 한 번 가면 그만이지만, 나는 5학년 때 수원으로 전학을 간 후 1년 만에 다시 원래 다니던 학교로 돌아왔다. 독특한 경험이었다. 사람은 헤어질 때 잘 해야 한다는 점을 배웠다. 살다 보면 또 언제 어떻게 만날지 모르니.

이사를 참 많이도 다녔다. 중학교에 올라갈 무렵에 또다시 명일동에서 길동으로 이사를 갔다. 유치원에서 국민학교로 올라가면서 길동에서 명일동으로 이사를 갔는데, 국민학교에서 중학교로 올라가면서 다시 명일동에서 길동으로 이사를 간 것이다. 그때 명일동에 있는 대명 국민학교 졸업생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길동 쪽에 위치한 신명 중학교에 입학했다. 대명 국민학교에 있던 친구들이 다 같이 무리 지어 근처 중학교로 올라가는데, 나 혼자 길동에 있는 중학교로 가야 하는 현실이 무척 싫었다.

중학교 때 여러 가지로 참 힘들었던 기억이 있다. 몸은 약하고 성격은 소심했다. 체육 시간에 다른 아이들이 축구나 농구를 하러 갈 때, 나는 조용한 친구 한두 명하고 운동장 주위를 돌면서 시간을 죽이고는 했다. 그런 모습을 보고 간혹 얕보고 놀리는 친구들은 있었으나, 돌아보면 참 순수했던 시절이다.

담배를 피운다거나 술을 마시는 일은 없었다. 오락실을 가지도 않았다. 지금이나 그때나 컴퓨터 게임에는 별로 흥미가 없었다. 그렇다고 공부에 소질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영어는 중학교 들어가서 정규 과목으로 처음 배웠다. 공부를 해보려고 했으나 이사를 오고 가며 어수선한 가운데 뜻대로 잘 안되었다. 가장 열심히 했을 때 반에서 10등 정도는 갔을까. 이래저래 존재감이 크지 않은 아이였다.

중학교 3학년에 올라가면서 용인 수지로 이사를 갔다. 90년대 중반 용인 수지는 신도시로 한창 개발되던 곳이다. 우리 가족은 아파트살이를 끝내고 주택에 살아보겠다는 생각에 택지 분양을 받아서 집을 지었다. 원래는 지붕이 세모난 전원주택을 꿈꿨으나, 현실에 맞추다 보니 네모반듯한 3층짜리 연립주택이 되었다. 1층과 2층은 각각 반으로 나눠서 세를 주고 3층과 옥상은 우리 가족이 썼다. 옥상에는 옥탑방을 하나 만들었는데 이걸 내 방으로 쓰기로 했다. 옥탑방이라고 하니까 좀 허술해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은 꽤나 아늑하고 괜찮았다. 나는 이 방을 얻은 덕분에 비로소 공부에 전념할 수 있는 공간을 얻었다. 사실 공부에는 많은 게 필요하지 않다. 정돈된 환경만 주어지면 결국 본인이 해내야 하는 거다. 나에게는 이 옥탑방이 충분하다 못해 과분했다.

중학교 3학년을 시작하는 첫날, 전학을 겸하여 집 근처 수지 중학교 교무실을 찾았다. 아직 새 옷 냄새가 나는 교복을 입고 어머니, 동생과 함께 복도를 지나고 있는데, 창문 너머로 아이들이 신기하게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큭, 넥타이를 매고 있어.”라고 누군가 말하는 걸 들었다. 속으로 생각했다. ‘아, 여기서는 넥타이를 매면 안 되는구나.’ 곧바로 넥타이를 풀어버렸다. 그리고 졸업할 때까지 다시는 넥타이를 매지 않았다.

그 당시 수지 중학교는 서울의 신명 중학교와 비교해 여러 가지로 어수선했다. 새로 전학을 온 나 같은 서울 학생들도 있는 반면에, 개발에 밀려나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가족의 아이들도 있었다. 중국집 배달을 시켰는데 같은 반 친구가 배달해준 적도 있고, 주말에 아버지와 산에 올라가다가 담배를 피고 있는 같은 반 아이와 마주치기도 했다. 지금이야 그런 아이들의 미래에 대해서도 한 번쯤 걱정하고 넘어가는 어른의 입장이 되었지만, 그때만 해도 조마조마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뭐랄까,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하는 정글의 느낌이었다.

전학을 오고 며칠 지나지 않아 그 느낌은 현실로 눈앞에 펼쳐졌다. 학생인지 건달인지 얼핏 봐서는 판단이 서지 않는 아이들 몇 명이 쉬는 시간 도중 교실에 난입해서는, 뒷자리에 앉은 학생 몇 명을 교실 뒤로 데리고 나가서 엎드리라고 했다. 그리고는 대걸레에서 자루를 뽑아 사정없이 후려치기 시작했다. 자기들이 있는 곳을 선생님에게 일러바쳤다는 게 그 이유였다. 나는 교실 반대편에서 그 장면을 넋이 나간 채 지켜보았다. 그리고 곧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어떻게든 여기서 무사히 1년을 보내고 졸업하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칫하다가는 이후 내 인생이 별로 재미가 없어질 것 같은 상상이 엄습했다.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나는 카멜레온이 되었다. 일단, 공부에 전념하는 안경 낀 모범생으로 철저하게 변신했다. 마침 운 좋게 중학교 3학년 처음 친 시험에서 성적이 꽤 괜찮게 나왔다. 서울에서는 반에서 10등 내외였지만, 수지에서는 반에서 2등으로 시작했다. 솔직히 기대조차 못 한 성적이었다. 재미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어느 집단이든지 양극단에 있는 부류는 서로에 대한 경외심 비슷한 걸 느낀다. 자기에게 없는 것에 대한 동경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당시 학교에서 싸움을 제일 잘하던 녀석은 적당히 수더분해 보이던 나에게 공부에만 전념하라고 당부했다. 나중에 자기들이 선생님들에게 혼날 일이 있을 때 변호해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실리적인 관점에서 그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서서히 모범생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선생님들의 인식도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친구들이 사고를 치면 적당히 선생님과 중재도 해주면서, 정글 안에서 내 나름의 대체 불가능한 역할과 위치를 잡아갔다.

집에 가면 조용히 공부할 수 있는 옥탑방이 있고, 학교에서는 싸움 1등과 그의 친구들이 내가 오로지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우산을 자처해 주었다. 덕분에 성적이 빠르게 치고 올라갔다. 결국 여름방학 직전에는 전교 1등을 찍었다. 난생처음 해보는 전교 1등이었다.

그 무렵 부모님이 가져오신 고등학교 소개 책자가 하나 있었다. 거창고등학교라는 곳인데, 열린 교육을 내세우는 곳이라고 한다. 다른 건 모르겠고, 딱 두 가지에 마음을 홀딱 뺏겼다. 첫 번째는, 기숙사 학교라서 학원을 갈 필요가 없다는 점이었다. 그게 참 괜찮아 보였다. 그리고 두 번째로, 첫눈이 오는 날 전교생이 수업을 접고 토끼를 잡으러 간다는 소개였다. 꽤 흥미로웠다. 그날 이후로 나는 거창고등학교를 목표로 진학을 준비했다.

입학 상담을 받으러 거창고등학교로 향했다. 용인 수지 집에서 차로 3시간 반이 걸렸다. 학교가 위치한 거창읍 중앙리는 우리나라 어디를 가나 볼 수 있는 농촌 마을이었다. 학교는 읍내에서 지대가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학교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마주한 것은 교문조차 없는 허름한 입구였다. 예사롭지 않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이 있었다. 입구에서 추리닝 차림으로 휴지를 줍고 있는 할아버지에게 길을 물어 교무실로 갔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할아버지가 교장 선생님이었다. 이래저래 강렬한 첫인상이었다.

거창고등학교는 입학 정원이 190여 명 정도였다. 그런데 다른 지역과 동시에 시험을 치기 때문에 만약 거창고등학교에 지원해서 떨어지면 고등학교 입학을 재수해야 했다. 고입 재수는 대입 재수와 무게감이 달랐다. 빈도에서도 그렇고 그걸 감당해야 할 학생의 나이도 그랬다. 그래서 학교에서는 입학 당시부터 합격할 수 있을 만한 아이들에게만 지원을 권한다고 했다. 떨어질 아이들의 처지까지 고려하는 학교 측의 마음 씀씀이가 느껴졌다. 하지만 시험을 치기도 전에 합격할 수 있을지 알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다 보니 지원자 수는 입학 정원을 조금 넘어섰다. 입학시험을 치고 당일날 합격자 발표가 나왔다. 나는 다행히 합격했다. 그런데 옆을 보니 어떤 아이가 어깨를 늘어뜨린 채 부모와 함께 지나가고 있었다. 나의 기쁨이 누군가에게는 상실일 수  있기에, 그들의 마음도 헤아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창고등학교에서 첫 2년 동안은 정말 원 없이 놀았다. 누군가는 거창고등학교 학생들을 이야기할 때 스스로 절제하고 공부하는 학생들이라고 설명하던데, 그런 친구들도 있었겠지만 적어도 1, 2학년 때의 나는 아니었다. 물론 1학년 때 심장 수술을 받을 무렵 의사가 되겠다는 꿈을 품고는 있었지만, 그 꿈을 실제로 의미 있는 행동으로 옮긴 건 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서부터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서는 또 원 없이 공부했다. 우선 학교 바로 앞에 자취방을 구해서 들어갔다. 나중에 다시 소개하겠지만, 자취방이라기보다는 천장에 쥐가 뛰어다니는 작은 창고였다. 여느 창고와 다른 점은 보일러와 싱크대가 있었다는 점뿐이었다. 거기서 고등학교 3학년을 보내며 하루에 문제집을 한 권씩 풀었다. 두껍지 않은 것들은 하루에 두 권씩 풀었다. 여기서 풀었다는 건 해설까지 다 꼼꼼히 들여다보았다는 걸 말한다. 시중에 나와 있는 모든 문제집을 다 풀었다. 더 이상 풀 문제집이 없자, 풀었던 문제집을 새로 사서 다시 풀었다. 그렇게 시중에 나와 있는 문제집을 최소한 두 번씩은 풀어보았다. 탄력이 붙었을 때는 일주일 동안 잠을 안 자고 문제집만 푼 적도 있다. 한여름 다리가 따끔거리기에 내려다보니 모기들이 일렬로 다리에 앉아서 피를 빨고 있었다. 에프킬라를 대충 뿌리고 다시 문제집을 폈다. 1999년 8월 태풍 올가가 왔던 날엔 자취방의 천장이 날아갔다. 그날 딱 하루 쉬고 정말 미친 듯이 했다. 그래도 수능으로 승부를 볼 수 있었기 때문에 마음만은 편했다. 내가 노력한 만큼 나오는 거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나무와 잔디밭으로 잘 꾸며진 고려대학교 본관 앞 중앙광장은 2000년도만 해도 흙먼지가 날리는 운동장이었다. 한겨울 게시판의 합격자 명단에서 자기 이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부둥켜안던 건 역사상 그때가 마지막이 아닐까 싶다. 그 이후에는 인터넷이 그 모든 걸 대신했으니까. 그날 그 게시판에서 ‘의예과 신승건’이란 이름을 발견했다. 그렇게, 나의 다사다난했던 학창 시절도 막을 내렸다.

종종 그런 이야기를 듣는다. 몸도 아프면서 어떻게 의사가 되었냐고. 참 대단하다고. 지나친 겸손은 교만이라고 했던가. 나는 ‘열심히’ 살았다. 그 점에서 스스로 자부심을 느낀다. 다만 이 ‘열심히’라는 말은 그 순간순간을 제대로 해내기 위해서 꾸준히 최선을 다했다는 것 이상의 의미는 아니다. 10년 후가 아니라 1달 후, 더 정확히는 하루 뒤를 생각하면서 살았다.

“나는 언젠가 반드시 의사가 될 거야. 그것 말고 다른 건 신경 쓰지 않겠어.” 같은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오늘 이 수술이 잘 끝났으면.”, “오늘도 문제집을 꼭 한 권 다 풀고 잘 거야.” 그게 전부였다. 그저 매일같이 묵묵히 포기 않고 살아왔을 뿐이다. 그러다 보니 지금 와서 그럭저럭 한 사람 몫을 하고 살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사람들은 말한다. “지금 어쩔 수 없이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는 있지만, 이건 내가 잠시 거쳐 가는 일일 뿐이야. 언젠가 번듯한 직장에서 고연봉을 받으며 살 거야.” “지금은 바빠서 시간이 없지만, 언젠가는 내 이름으로 책을 낼 거야.” 이렇게 저마다의 꿈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나 정작 현재의 일상은 소홀히 한다.

꿈은 어디까지나 꿈일 뿐이다. 현실에서 뭔가를 이루어 가게 하는 건 원대한 꿈이 아니다. 하루하루 꾸준하게 이어가는 평범한 시간들이다. 그 평범한 시간들이 이어져서, 한때는 꿈이라고 생각한 것마저 평범한 일상이 된다. 내가 이제껏 쫓아왔던 꿈, 돌아보니 그건 바로 평범함이었다. 내 학창 시절의 꿈은 평범함이었다.


이 글은 집필 중인 자전적 에세이 초안의 일부입니다.
일부 내용은 이전 글에서 이미 소개된 것일 수 있습니다. 더 많은 초안을 보려면 아래 무료 이메일 구독을 신청하십시오.

“학창 시절 이야기”에 대한 3개의 생각

  1. 그동안 선생님 글을 읽으면서 까마득한 어른인 줄 알았는데 4살 형이었네요. ㅎㅎ 글로 나이를 예상해서는 안되는가 봅니다. 비트겐슈타인이 처음으로 학계에 얼굴을 드러낸 순간 플라톤의 얼굴을 예상했던 철학자들이 소스라쳤던 순간이 떠오르네요.

  2. 대학시절 조용하고 성실하면서 차분했던 신선생님..
    글을 읽으면서 누구나 어린시절, 학창시절을 회고록 쓰듯 차분히 글을 써 본다면 자신의 성격이나 기질, 재능, 관심사 등 자신의 본 모습을 발견하고 또 과거를 통해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거라 생각을 해봅니다.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좋은 글입니다. 감사합니다. 무엇보다 앞으로도 선생님의 건강함을 기원합니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