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 마음이 다 그렇듯

어린이집을 다니는 딸 아이가 이제 유치원에 갈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아내와 나는 여러 날을 고민한 끝에 지금처럼 어린이집에 계속 보내기로 했다. 앞으로 어린이집에 다닐 수 있는 가장 늦은 나이까지 계속 다니게 할 생각이다. 아이답게 놀 수 있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누리게 해주고 싶기 때문이다.

요즘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다양한 학원에 다닌다고 한다. 물론 아이들 스스로 결정한 거라기보다는 부모들의 결정에 따른 것일 테다. 허나 아이들도 그 안에서 친구를 만들고 어울리다 보니, 나중에는 학원에 다니는 걸 더욱더 편하게 느낀다고 한다. 각자 나름의 사정은 있겠지만, 이제 겨우 등에 가방을 멜 수 있을 정도의 아이들이 학원 승합차에 실려서 오가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그렇게 편치만은 않다.

아이에게 조금 더 뛰어놀 수 있는 시간을 주겠다고 한 우리 부부의 결정과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영어나 코딩을 배우도록 한 다른 부모의 결정이 훗날 각각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지금은 알 수 없다. 그 방식이 무엇이건 간에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만은 서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자기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는 흔한 부모의 한 사람으로서 아이의 교육에 대한 평소 생각을 담담하게 적어본다. 대단한 내용은 아니다. 나도 초보 부모인데 알면 뭘 얼마나 알겠나. 그저 내가 부모로서 아이 교육에 기준으로 삼을 수 있는 건 무엇일지 곰곰이 생각해본 것일 뿐이다.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신뢰다. 무엇보다 아이에게 약속을 칼같이 지키는 부모가 되고 싶다. 약속을 지키는 행동의 파급력은 도덕적으로 바람직한 본보기 그 이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녀의 입장에서 부모가 자기가 한 말을 지키는지 여부는 앞으로 부모의 말을 따를지 말지를 판단하는 준거 기준이 된다.

부모들은 말한다. 열심히 공부하라고. 이거 다 네 미래를 위한 거라고. 나중에 즐겁게 살고 싶다면, 지금 놀고 싶은 거 있어도 꾹 참고 성실히 학업에 매진하라고. 물론 다 좋은 말이고 대체로 옳은 말이다. 그 말에는 자기 자식을 향한 부모의 진심도 담겨있다.

하지만 자녀가 그 말을 믿을지는 또 다른 문제다. 아이라고 해서 부모 말을 무조건 믿지는 않는다. 믿을 만하면 믿는다. 그렇다면, 부모의 말을 믿을 만하게 만드는 건 무엇인가. 과거에 부모가 보여준 모습이다. 부모가 작은 약속이라도 칼같이 지켰다면, 아이는 부모의 말을 믿을 것이다. 하지만 부모가 자기가 한 약속을 대충 눈치 보고 은근슬쩍 뭉개고 지나갔다면, 아이는 그 모든 순간을 올빼미처럼 다 지켜보고 기억 속에 담아둘 것이다. 

주말에 동물원에 가자고 했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그렇게 해야 한다. 마트에서 장난감 사달라고 떼쓸 때 다음 생일에 사주겠다고 말했다면, 정말 그렇게 해야 한다. 조금 다른 사례지만, 아이가 유튜브를 10분만 보기로 했다면 10분 후 아무리 격렬히 저항해도 유튜브를 꺼야 한다. 자녀에게 내뱉은 말은 반드시 그대로 지켜야 한다.

혹시 약속을 못 지켜도 이 조그만 녀석이 뭘 알겠나 싶을지 모르겠다. 나도 예전에는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지나가는 말로 한 약속일지라도 반드시 지켜질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기다린다. 물론 가끔은 아이도 잊어버리는 약속이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잊어버리지 않는 대부분의 약속을 고려하면 아이와 한 약속은 모조리 지키는 게 확률적으로 안전하다.

부모가 약속을 지키는 데 소홀히 해놓고, 나중에 가서 공부를 열심히 하면 더 나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고 한들 그 말이 먹힐 리 만무하다. 이제껏 번복되어온 수많은 약속과 마찬가지로 믿을 수 없는 말로 여길 것이다. 반면에 부모가 사소한 약속도 철저하게 지켰다면, 아이는 ‘공부’와 ‘미래’를 연결 짓는 부모의 말을 무겁게 받아들일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신뢰는 훗날 자녀의 참을성과 끈기에도 영향을 미친다. 학교 숙제를 하다가 놀고 싶은 마음이 생기더라도, 할 일을 먼저 하고 노는 게 바람직하다는 부모의 말을 믿는다면 스스로 그 마음을 다스릴 방법을 찾을 것이다. 이처럼 약속을 철저하게 지키는 것은 부모에 대한 신뢰로 이어지고, 더 나아가 집념과 의지, 궁극적으로는 자녀의 평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둘째, 봉사다. 자기가 가진 시간과 능력을 자신보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들을 위해 활용하는 것을 말한다. 나는 틈날 때마다 아이에게 봉사할 기회를 마련할 것이다. 그게 학원 몇 군데 다니는 것보다 훨씬 가치 있는 시간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남을 돕는 행위는 스스로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인지 깨닫는 동시에, 이미 주어진 환경을 돌아보고 감사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공부는 그런 자세가 갖추어진 후에, 자기가 알아서 하는 것이다.

어릴 적 기억이 하나 있다. 내가 살던 곳은 서울에서도 도심에서 좀 벗어난 한적한 곳이었다. 서울 아파트값이 오른다는 뉴스가 나올 때, 심지어 이쪽도 오르고 있다는 식으로 소개되는 동네다. 지금은 아파트 숲이지만, 80년대 중반에는 아직 주위에 논밭이 많이 남아 있었다. 겨울에는 그곳에 얼음을 얼려서 스케이트를 타고 놀았다. 나는 얼음의 투명한 정도만 보고도 그 위를 지나가면 깨질지 아닐지 알 수 있었다.

서울 시내에서는 쉽게 찾아보기 힘든 게 또 있었다. 무슨 무슨 재활원이란 이름을 가진,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정신지체아들을 위한 재활 시설이었다. 나는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한참 전부터 주말이 되면 부모님 손에 이끌려 그곳에 갔다. 특별히 뭔가 하기 위해서 간 게 아니다. 그저 그곳의 아이들과 어울려 밥을 먹고 숨바꼭질을 했다. 말 그대로 같이 어울려 놀았다.

내가 거기서 무엇을 느꼈을까. ‘불쌍한 이들에게 베풀라’는 교훈이었을까. 아니다. ‘다양한 삶의 형태가 있다는 것’ 그리고 ‘그들도 존중받을 하나의 인간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아이들보다 조금 더 많은 것을 누리고 있는 나를 되돌아보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요즘에는 어느 지역이든 재활 시설들이 새로 들어서려고 하면 기존 주민들이 혐오 시설이라면서 들고 일어선다고 한다. 그때마다 단골로 등장하는 게 아이들의 교육에 악영향을 미칠지 모른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내 생각에 진정으로 반교육적인 것은 재활 시설이 아니라 그 시설을 혐오 시설이라며 미워하는 주민들 자신의 사고방식이다. 오히려 재활 시설은 아이들의 교육이란 관점에서 더없이 귀중한 이웃이 될 수 있다.  다른 사람을 적으로 보는 걸 가르치는 게 아니라, 적이라고 생각한 이도 그저 다른 사람일 뿐이라는 걸 가르치는 게 교육이 진짜로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셋째, 자유다. 자기 스스로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아이가 원하는 것을 최대한 해볼 수 있도록 응원할 것이다. 그래야만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걸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신뢰가 부모에 대한 믿음이었다면, 자유는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다. 자기가 원하는 걸 스스로 찾을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다. 찾기 위해서는 실제로 해보아야 한다. 사실 우리 삶이라는 게 뭐 별거 있나 싶다. 길어야 100년인 시간 동안, 하고 싶은 걸 찾고, 찾았다 싶으면 해보고, 그러다가 아니다 싶으면 다시 찾는 부단한 과정의 연속이다. 그렇게 한 인생을 살다가 가는 거다.

자유를 위해서는 시행착오를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내 경우에는 IT 회사를 만들어 봄으로써 생각과 현실은 매우 다르다는 걸 느꼈다. 회사의 문을 닫으면서 직원들의 일자리를 찾아주고 나니 내게는 큰 빚이 남았다. 그리고 그 빚을 갚기 위해서 온갖 일을 다하면서 몇 년을 꾹 참고 버텼다. 그때 나는 자유에는 책임도 따른다는 사실도 배웠다. 그런 건 책으로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다. 오로지 몸으로 부딪치는 시행착오를 통해서만 배울 수 있다.

자유가 정말로 중요한 이유는, 그래야 후회가 없기 때문이다. 한 번 살고 가는 인생이라지만, 그래도 죽는 날까지 후회하는 일은 가급적 없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라도, 해보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자유는 더없이 소중하다.

신뢰, 봉사 그리고 자유. 내가 딸 아이의 교육 기준으로 삼고 싶은 세 가지다. 그렇다고 내가 이미 이것들을 실천하고 있기 때문은 아니다. 내가 이런 글을 쓰는 것은 오히려 실천하지 못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다. 이렇게 글을 남김으로써 내가 평소에 갖고 있던 아이 교육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고, 훗날 이 기준을 벗어나게 될 때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는 기준점으로 삼고자 한다.

만약 내가 약속을 해놓고 지키지 않는다면, 남들이야 어찌 되든 혼자만 잘살면 된다고 한다면, 고정관념에 젖어 도전을 막는다면, 내 딸아이는 이 글을 들고 와서 이거 아빠가 쓴 글 아니냐고 되물을 것이다. 그럴 때 쓰라고 남기는 글이다. 나는 적어도 내가 쓴 글이 나를 공격하는 형편없는 사람은 되고 싶지 않다.

나의 바람과 다짐을 섞어 쓴 두서없는 글이다. 하지만 아직 말하지 않은, 사실 가장 중요한 게 하나 더 남아있다. 신뢰도 좋고 봉사도 좋고 자유도 좋은데, 무엇보다도 내 딸아이의 몸과 마음이 건강하길 바랄 뿐이다. 부모 마음이 다 그렇듯.


이 글은 집필 중인 자전적 에세이 초안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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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마음이 다 그렇듯”에 대한 2개의 생각

  1. 좋은글 항상 감사드립니다.
    아이들과의 약속을 소흘히 한것에 대해 많이 속상하네요
    선생님의 글을 보고 다짐 하네요 모든 약속은 꼭 지켜야 한다는걸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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