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기적

30년 만에 다시 찾은 일상.

20세기 초 뉴욕의 브롱스, 11살 레너드는 평소처럼 친구들과 뛰어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레너드의 손이 주체할 수 없게 떨리기 시작한다. 증세는 점점 심해져서 나중에는 글씨를 쓸 수 없을 정도가 되었고, 레너드는 결국 학교까지 그만두기에 이른다. 시간이 흐를수록 레너드의 병세는 악화되어간다. 기면성 뇌염(Encephalitis Lethargica)으로 알려진 병의 희생자가 된 것이다. 레너드는 이후 30년 동안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이들과 함께 배인브리지 병원에 수용되어 희망 없는 삶을 이어간다. 성인이 된 레너드는 몸이 굳고 항상 잠에 빠져있는 상태에 이른다.

1969년의 어느 날, 의사 세이어는 일자리를 찾아 배인브리지 병원에 오게 된다. 그는 그곳에서 몸이 뻣뻣하게 굳어 휠체어에 의지한 채 살아가는 환자들을 마주한다. 병원에 있던 다른 의사들은 포기하고 죽을 날만 기다리던 환자들이다. 하지만 세이어는 잠들어 있는 이 환자들 안에 언젠가 깨어나기를 기다리는 영혼이 있다는 희망을 놓지 않는다.

그즈음 세이어는 엘도파(L-Dopa)가 파킨슨 병의 치료제로 새롭게 떠오른다는 소식을 접한다. 그는 엘도파가 환자들을 질병으로부터 구해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고, 레너드를 첫 대상으로 하여 치료를 시작한다.

치료가 시작되고 며칠 후, 엘도파 치료를 받던 레너드는 기적처럼 깨어난다. 치료를 이어가면서 레너드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건강한 사람과 다름없는 생활로 돌아간다. 그렇게 레너드는 세이어 박사를 만나고 30년 만에 처음으로 잃어버린 일상을 되찾는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

영화 <사랑의 기적>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영국 출신의 신경과 의사 겸 작가인 올리버 색스가 쓴 회고록 <깨어남 (원제 Awakenings, 1972)>이 이 영화의 원작이다. 영화 속 의사 세이어의 실제 모델이기도 한 올리버 색스는 1966년 뉴욕의 마운트 카멜 요양병원에서 난생처음 보는 환자들을 마주했다. 이 환자들은 밀랍인형처럼 미동도 없이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올리버 색스는 환자들에 대해 조사하던 중, 그들이 모두 20세기 초 전 세계에서 유행했던 뇌염의 희생자들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는 이 병이 파킨슨 병과 유사점이 있다는 것에 착안하여, 1969년 당시 파킨슨 병 치료제로 새롭게 떠오르고 있던 엘도파를 환자들에게 시험적으로 투여했다.

그러자 며칠 만에 환자들의 증세는 급격히 호전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기적은 몇 주를 채 넘기지 못했는데, 극심한 안구운동 발작과 살갗이 벗겨져 피가 흐를 정도로 뺨을 긁는 틱장애 같은 부작용이 환자들에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레너드 역의 로버트 드니로가 이 모습을 소름이 끼칠 정도로 실감 나게 연기한다.

실제로 환자 레너드 역을 맡은 로버트 드니로는 환자들을 직접 찾아다니며 그들의 행동을 면밀하게 관찰했다고 한다. 의사 세이어 역을 맡은 로빈 월리엄스도 원작자인 올리버 색스를 직접 찾아서 여러 조언을 듣고 왔다고 한다. 그런 노력 덕분일까, 올리버 색스는 영화가 발표된 이후 한 인터뷰에서 로빈 윌리엄스의 말투와 몸짓이 너무나 자신을 닮아 거울을 보는 기분이라 하기도 했다.

평생 동안 잠을 자는 병, 기면성 뇌염이란.

영화의 중심에 있는 기면성 뇌염은 1916년 겨울 유럽의 대도시에서 갑자기 나타나서 10년 만에 홀연히 사라진 질병이다. 발견자의 이름을 딴 ‘폰 에코노모 뇌염(von Economo encephalitis)’이란 이름이 있지만, 이 병을 겪고 회복된 일부 환자들의 잠만 자는 증세가 너무도 특징적이라 잠자는 뇌염이란 의미의 ‘기면성 뇌염’으로 흔히 불린다.

바이러스가 원인인 것으로 추정되는 이 병은 10년의 유행기간 동안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지로 퍼져나갔다. 그 과정에서 500만 명이 목숨을 잃었는데, 이는 환자 전체의 약 1/3에 이르는 수치이다. 그 밖에 1/3은 후유증 없이 자연 회복되었고, 또 다른 나머지 1/3의 살아남은 환자들은 레너드처럼 의식은 있으나 완전히 깨어있지는 않은 기면 상태에 빠져들었다. 이들은 남은 일생동안 병원에 입원한 채로 떨림, 강직, 운동마비 등 500여 가지 증상으로도 고통받았다. 2003년 마지막 기면성 뇌염 생존 환자인 필립 레더(Philip Leather)가 사망한 이후로 새로운 감염 사례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우리는 과연 깨어있는가.

지식과 경험은 삶을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자산이다. 특히 어떤 일을 성공적으로 해냈던 경험은 그 이후의 삶에 큰 자신감으로 작용한다. 하지만 때로는 이러한 성공의 경험이 새로운 발전을 막는 장애물이 되기도 하는데, 사람이라면 자신에게 이미 익숙한 방법을 따르는 본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경향은 소위 전문가라고 불리는 이들에게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배인브리지 병원에서 기존에 있던 의사들이 기면성 뇌염 환자들을 방치하고 있던 이유는 지금까지 그들의 경험에 비추어봤을 때 다른 치료가 무의미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세이어는 배인브리지 병원에 오기 전까지 지렁이 연구가 경력의 전부인 사실상의 비임상 연구자였다. 명색이 의사라고는 하지만 세이어는 그때까지 환자 진료 경험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오히려 그 덕분에 기존 의사들과는 다른 새로운 관점으로 기면증 환자들을 치료해나간다. 그는 성공의 경험에 얽매일 여지없이, 그저 무엇이 환자에게 도움이 될지를 찾는 일에만 전념한다. 결국 세이어는 엘도파라는 치료제에 대한 정보를 접하고 이를 과감하게 시도하기에 이른다.

이는 단지 의사들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오늘날 세상은 전에 없이 복잡해졌고, 수많은 분야가 톱니바퀴 맞물리듯 돌아간다. 그리고 각 분야에는 저마다 전문가들이 자리 잡고 있다. 이 전문가들은 그동안 축적해온 성공의 경험이라는 기반 위에 서있다.

각자의 분야에서 전문가라고 불리는, 그리고 스스로 그렇게 불리기를 바라는 이라면, 한 번쯤 자기가 고정관념이라는 꿈에 빠져있는 것은 아닐지 돌아볼 일이다. 20세기 초 세계를 휩쓸고 간 뇌염이 그 후 수십 년 간 환자들을 꿈속에 헤매게 한 것처럼, 성공의 경험이 고정관념이란 꿈을 꾸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세이어가, 그리고 올리버 색스가 정말 깨우고 싶어 했던 건 어쩌면 우리들의 고정관념이었을지도 모른다.

이 글은 (사)한국건강관리협회에서 발행하는 월간지 <건강소식> 2019년 9월호에 실린 기고문입니다. <건강소식>은 월 32,000부가 발행되는 매체로 (사)한국건강관리협회 유관기관 및 보건복지부 산하 정부기관, 전국 병원과 보건소, 협회 검진기관 고객들에게 배포되는 건강 관련 소식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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