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의학의 결정적 순간들

시간이 지나야만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현재의 시점으로 과거를 바라보면 너무도 뚜렷하게 보이지만 그때 당시에는 그렇지 못했던 것들이다. 마찬가지로, 지금은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들이지만 시간이 흘러 지금을 되돌아볼 때 안타깝게 보이는 것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시간이 지나야만 비로소 보이는 것들의 집합을 다른 말로 ‘역사’라고 한다.

‘역사’에 대한 내 나름의 정의다. 이 정의는 현대의학의 역사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무심코 지나쳤거나 그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했으나, 훗날 현대의학의 토대로 평가받는 사건들이 드물지 않다. 이런 일들이 이후 현대의학의 향방에 끼친 영향을 생각하면, ‘결정적 순간들’만큼 이를 지칭하기에 적절한 말도 찾기 힘들 듯하다. 지금부터 현대의학을 만든 ‘결정적 순간들’ 몇 가지를 되짚어보며 지난날 의학의 발전을 이끌어온 힘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생각해보고자 한다.

현대의학의 ‘결정적 순간’이라고 부를만한 가장 최초의 사건은 페니실린Penicillin의 등장이다. 페니실린은 인류가 발견한 최초의 항생제로서 1941년에 처음 임상에서 사용되었다. 페니실린이 등장하기 전에는 피부의 작은 상처부터 치명적인 패혈증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일생동안 경험할 수 있는 다양한 세균성 감염 질환에 대한 치료제가 사실상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지금은 나무 가시에 찔리는 게 대수롭지 않은 일이지만, 당시에는 그런 사소한 일로도 죽음에 이를 수 있었다.

페니실린과 그 뒤이어 나온 항생제들 덕분에 인류는 역사상 처음으로 감염병에 대항해 싸울 수 있는 무기를 갖게 되었다. 현대의학의 역사가 페니실린의 발견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닌 이유다. 재미있는 사실은 페니실린의 발견 과정에서 여러 우연들이 절묘하게 이어졌다는 점이다.

페니실린의 발견은 지금으로부터 거의 한 세기 전인 192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런던의 세인트 메리 병원에서 일하던 미생물학자 알렉산더 플레밍Alexander Fleming은 막 여름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참이었다. 그가 실험실에 돌아와 보니 휴가를 떠나기 전 배양접시들을 창가에 방치해 두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못쓰게 된 배양 접시들을 버리려고 정리하려던 찰나, 플레밍은 포도상구균을 기르던 배양 접시에서 특이한 현상 하나를 발견한다. 배양 접시 중에는 곰팡이가 핀 것이 있었는데, 희한하게도 그 곰팡이 주변에는 포도상구균이 자라지 못하고 있던 것이다.  플레밍은 곰팡이 주위로 포도상구균이 자라지 못한 이유가 곰팡이에서 만들어진 어떤 물질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아낸다. 이후 플레밍은 이 곰팡이가 푸른곰팡이라는 사실을 밝혀내고, 푸른곰팡이가 만들어낸 세균 성장 억제 물질에 페니실린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여기까지는 페니실린의 발견과 관련하여 꽤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하지만 페니실린의 발견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비화가 있다. 플레밍이 푸른곰팡이에서 포도상구균의 성장을 억제하는 물질이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발견한 이후에 다른 과학자들도 플래밍의 실험을 여러 차례 반복한다. 하지만 그들은 거듭된 실험에도 불구하고 플레밍과 똑같은 결과를 얻는 데는 실패한다. 왜 그랬을까. 플레밍이 페니실린을 발견하기까지 크게 세 가지의 우연이 겹쳐서 찾아왔기 때문이다.

첫째, 페니실린을 만드는 푸른곰팡이는 자연계에 흔하게 존재하는 곰팡이가 아니었다. 플래밍의 연구실 아래층에는 곰팡이를 연구하는 실험실이 있었는데, 푸른곰팡이는 그곳에서 날아온 희귀한 종류의 곰팡이였다. 둘째, 플래밍이 휴가를 떠나며 배양접시를 창가에 두지 않고 평소처럼 배양기에 넣어놓았다면, 이 곰팡이는 배양접시에 내려앉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플래밍은 휴가를 떠나며 배양접시를 배양기에 넣어두는 것을 깜빡하고 창가에 방치해 두었다. 셋째, 포도상구균은 섭씨 35도에서 잘 자라는 데 반해 푸른곰팡이는 그보다 낮은 기온인 섭씨 20도에서 잘 자란다. 플래밍이 휴가를 떠나는 동안 런던에는 며칠 동안 이상저온 현상이 있었고 곧이어 기온이 다시 상승했다. 그 덕분에 푸른곰팡이가 며칠 동안 충분한 양의 페니실린을 생산했고, 뒤이어 포도상구균이 성장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 결과적으로 페니실린 때문에 포도상구균이 성장하지 못한 부분과 나머지 포도상구균이 충분하게 성장한 부분이 육안으로 보기에도 뚜렷이 대비되었다. 만약 당시 런던에 이상저온 현상이 발생하지 않았다면 푸른곰팡이가 배양접시에 내려앉았더라도 포도상구균의 성장이 억제된 뚜렷한 모습이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플래밍도 페니실린을 발견하지 못했을지 모른다.

페니실린이 항생제의 시대를 연 지 몇 년 후, 현대의학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중요한 치료제가 등장한다. 오늘날 스테로이드Steroid라는 이름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는 코르티손Cortisone이다. 1949년 내과 의사 필립 쇼월터 헨치Phillip Showalter Hench는 메이요 클리닉에서 중증 류머티즘성 관절염 환자를 치료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환자의 증세는 계속해서 악화되어갔다. 환자는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관절의 염증과 통증으로 고통받았다.

그러던 어느 날, 헨치는 염증을 완화시키는 치료제로 가능성을 보이던 부신 분비물의 대량 합성이 성공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는 곧바로 이를 준비하여 자신의 류머티즘성 관절염 환자에게 투여했다. 그러자 이제껏 다른 방법으로는 개선의 기미가 보이지 않던 환자의 증세가 급격히 호전되기 시작했다.

이 부신 분비물이 바로 코르티손이다. 오늘날 코르티손을 비롯한 스테로이드는 신체의 염증 반응을 조절함으로써 치료 효과를 나타낸다. 염증은 신체의 정상적인 치유 과정의 하나이기도 하지만 과도한 염증은 그 자체로 극심한 통증과 손상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스테로이드는 이 과도한 염증을 조절하여 신체가 스스로 치유하도록 돕는다. 항생제가 세균이라는 외부의 적을 물리친다면, 스테로이드는 염증 반응을 조절함으로써 인체의 자가 치유능력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요컨대 1940년대는 오늘날 내과적 치료의 근간을 이루는 항생제와 스테로이드가 탄생한 현대의학의 여명기였다.

1950년대에는 개별 치료제를 넘어서는 좀 더 적극적인 치료법들이 등장한다. 이 무렵 등장하기 시작한 집중치료는 오늘날 우리가 종합병원에서 볼 수 있는 중환자실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병원의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환자에게는 심장 모니터, 혈액 내 산소 포화도와 이산화탄소 수치를 측정하는 기기, 혈압측정기 등 온갖 복잡한 의료기기들이 연결되어 있다. 어느 한 가지 중요하지 않은 장치가 없지만, 그 가운데서도 인공호흡기는 환자의 생명 유지에 직접적으로 관여한다. 집중치료를 말할 때 인공호흡기를 빠뜨릴 수 없는 이유다. 사실 집중치료라는 것 자체가 인공호흡기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공호흡기의 역사가 곧 집중치료의 역사인 것이다.

인공호흡기의 기원은 1952년 덴마크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코펜하겐의 블레그담스 병원에서는 소아마비에 걸려 호흡곤란을 겪고 있는 어린이들 수십 명이 누워있었다. 소아마비는 척수 신경을 침범하는 바이러스성 질환으로, 침범된 신경이 조절하는 근육의 마비가 특징적인 증상이다. 바이러스가 침범한 범위에 따라 팔다리가 마비될 수도 있고, 호흡근의 조절을 담당하는 신경을 침범하면 호흡 부전으로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 당시 블레그담스 병원의 의료진들은 이 어린이들의 호흡을 보조하기 위해서 고무 주머니에 연결된 튜브로 어린이들의 폐 속에 공기를 넣고 빼기를 반복했다. 그 결과 90%에 이르던 소아마비 사망률이 25%로 줄어들었다. 이 일을 계기로, 호흡부전에 빠진 환자들의 호흡을 보조하는 인공호흡기와 이를 이용한 집중치료의 필요성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집중치료는 이후 이어진 외과적 치료의 혁신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수술을 받은 직후 환자의 신체 상태는 무척 불안정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특별한 준비가 필요하다. 만약 이 불안정한 상태에서 환자의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수단이 없다면, 그 어떤 의사도 환자에게 수술을 권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외과적 치료의 발전은 집중치료의 등장과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1953년에 이르면 역사상 가장 도전적인 수술이 성공하기에 이른다. 매사추세츠 종합병원에서 일하던 흉부외과 의사 존 기본John Gibbon이 자신이 직접 개발한 인공심폐기를 사용해 선천성 심장병을 치료하기 위한 개심술에 성공한 것이다. 개심술은 말 그대로 심장을 열어젖히고 직접 손을 써서 문제가 생긴 부분을 고치는 수술을 말한다. 개심술을 하기 위해서는 수술 과정 중에 잠시나마 심장이 멈추어 있어야 한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사람들에게 심장이 멈춘다는 것은 곧 죽음과 같은 의미였다. 심장이 멈추어있되 죽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장치가 필요했다. 바로 그런 목적으로 고안된 기계가 바로 인공심폐기이다. 세계 최초의 개심술 성공은 인공심폐기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 시기에는 개심술 외에도 갖가지 수술들의 성공이 이어진다. 특히 이식 수술의 영역에서 외과 의사들이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가는데, 이는 단순히 손상된 부위를 고치는 것을 넘어서는 것이라는 데 그 의미가 있다. 1954년 조셉 머레이Joseph Murray의 일란성 쌍생아 사이의 신장이식, 1963년 토마스 스타츨Thomas Starzl의 간장이식, 1966년 윌리엄 켈리William Kelley의 췌장이식, 1967년 크리스천 버나드Christian Barnard의 심장이식 및 1968년 덴턴 쿨리Denton Cooley의 심폐 동시이식에 이르기까지, 외과 의사들은 새로운 도전을 멈추지 않고 이어간다. 거듭 강조하지만 이러한 놀라운 성과는 외과 의사들 혼자 이루어낸 것은 아니다. 집중치료나 인공심폐기와 같은 생명 유지 기술의 발전에 힘입은 결과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들을 다시 요약해보자. 1940년대 페니실린과 코르티손을 필두로 내과적 치료제가 대거 등장했다. 이어지는 1950년대에는 생명이 위태로운 환자들의 생존을 돕기 위한 집중치료가 시작되었고, 인공심폐기의 도움을 받은 개심술도 성공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손상된 장기를 교체할 수 있는 수준까지 도달했다. 그리고 그 이후로 지금 이 순간에도 현대의학의 혁신은 끝나지 않고 있다. 이쯤에서 우리는 세 가지 사실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첫째, 현대의학의 역사에서 중요한 발전의 상당수가 우연한 기회에 이루어졌다. 달리 말하면 의학의 발전이라는 여정에서 인간의 능력 못지않게 운이라는 요소도 중요하게 작용했다. 둘째, 그 운을 통해서 얻은 결과물조차도 사람이 처음부터 손수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라 자연의 부산물들을 활용한 것들이 많았다. 항생제, 스테로이드를 비롯한 우리가 알고 있는 여러 치료제들이 그러하다. 게다가 이들 치료제의 기전이 밝혀진 것도 그중에서 아주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셋째, 혼자서 가능한 것은 없다. 의학의 발전이란 얼핏 보면 어떤 특정한 결정적 순간의 천재적인 사람들의 공로 덕분에 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주의를 기울여서 그 맥락을 더 깊이 들여다보면, 우리가 혁신이라고 여기는 것도 결국 그에 앞서 있던 또 다른 혁신에 이어지는 과정의 단편일 뿐이다. 예컨대, 외과 의사들이 새로운 수술에 도전할 수 있었던 것은 수술 전후에 환자의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역사를 돌아볼 때마다 ‘인간’이 ‘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된다. 우리가 과거를 돌아보며 ‘결정적 순간’들이라고 기억하는 것들도 사실 자연이 개입한 ‘우연’과 여러 사람들이 참여한 ‘협업’의 소산이었다. 그것은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개인으로서 인간의 한계를 자각하고 ‘겸손’과 ‘협력’의 가치를 소중히 여길 때, 지금 이 시대도 훗날 현대의학의 ‘결정적 순간’들로 기억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서울대학교병원에서 발행하는 계간지 <매거진 봄(VOM)> 2019년 여름호에 실린 기고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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