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현하지 않을 자유

어린 시절 소풍 전날의 설렘을 기억한다. 과자와 음료수를 배낭에 채워 넣으며 다음 날 교실을 벗어날 생각에 마냥 행복했다. 다른 걱정거리가 없던 시절이다. 다만 그마저도 근심이라고 할 것이 하나 있다면 아침에 일어났더니 비가 오고 있을지 모른다는 불안감 정도가 전부였다.

하지만 이제는 소풍 하루 전날 비가 올지 걱정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미세먼지 수치가 얼마나 될지 먼저 챙겨본다. 혹시라도 내일 아침 짙은 미세먼지가 몰려온다는 예보가 있으면 차라리 소풍이 취소되기를 내심 바란다. 그게 오히려 마음은 편하다.

아직 기억에 남아있는 그리 멀지 않은 과거, 맑은 공기를 마실 수 있다는 사실은 그 중요성을 느낄 수 없을 만큼 당연했다. 이제는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게 무색해질 정도로 맑은 공기가 중요해졌다. 나는 요즘 하루에도 몇 번씩 미세먼지 앱을 열어보며, 당연한 것을 너무 당연하게 여긴 결과가 어떤 것인가를 생각한다.

그리고 여기, 우리가 이제껏 당연하다고 여겨온 또 다른 것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현대 문명 사회에서는 누구든지 자신의 느낌과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다. 내가 하는 말을 남이 막을 수 없는 것처럼 남이 하는 말을 내가 막을 수 없다. 소셜네트워크를 채우는 수많은 목소리들은 우리 시대가 표현의 자유를 얼마나 일상품처럼 소비하고 있는지 여지없이 보여준다.

하지만 오늘 내가 말하려는 게 ‘표현의 자유’ 그 자체는 아니다. 그 대척점에 놓여있을 법한 자유, 바로 ‘표현하지 않을 자유’에 관한 이야기다. ‘표현하지 않을 자유’란, 숨기고 싶은 혼자만의 생각을 드러내지 않을 수 있는 자유다.

‘‘표현하지 않을 자유’라니? 생각을 드러내지 않는 걸 누가 간섭할 수 있다고.’ 혼자만의 생각을 드러내지 않는 건 사실 너무 당연한 일이기 때문에 이것을 자유로 분류할 수 있을지조차 의문이다.

바로 여기에 맹점이 있다. 우리는 ‘표현의 자유’에 관해서는 적어도 그것이 침해되었을 때 얼마나 괴로울 것인지를 상상할 수 있다. 하지만 ‘표현하지 않을 자유’는 아직까지 잃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 소중함을 느껴볼 기회조차 없었다. 평소에는 굳이 생각조차 못 할 정도로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그만큼 취약하다.

그런데 앞으로는 ‘표현하지 않을 자유’의 소중함을 느껴볼 기회가 많아질 것 같다. 머리 위에 씌우는 작은 장치만으로 누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들여다볼 수 있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당신의 생각을 읽고 싶은 누군가가 당신의 머릿속을 손바닥 보듯이 들여다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들은 당신에게 물건을 팔고 싶어 하는 기업가일 수도 있고, 당신의 표를 원하는 정치인일 수도 있다.

이것이 진짜 무서운 이유는 따로 있다. 이런 기술이 원치 않는 방향으로 활용되더라도, 우리같이 평범한 사람들은 이에 저항할 방법이 없다. ‘표현의 자유’가 침해되었을 때 우리는 적어도 표현 그 자체를 수단으로 삼아서 억압에 저항할 수 있었다. 필요할 때는 ‘표현의 자유’를 잠시 보류하며 새로운 전략을 짤 수도 있다. 어쨌든 우리는 무언가 능동적으로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표현하지 않을 자유’가 위협받아도 그럴 수 있을까. 아마도 쉽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능동적으로 표현하건 하지 않건 우리의 생각은 읽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표현하는 것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영역이지만, 우리의 생각을 읽을지 말지는 우리가 온전히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이렇게 되물을 수도 있다. 자기 생각을 읽게 할지 말지는 자신의 동의가 필요한 것 아니냐고.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원칙적으로는 맞는 말이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렇지 않다. 예컨대 당신이 보험에 가입하고자 하는데 보험회사가 당신의 머릿속 생각을 읽는 대가로 보험료를 낮추어 준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당신이 구직자인데 이런 기술이 대기업에 취업하는 데 필요한 적성검사를 대신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원칙적으로는 거부할 수 있지만, 그로 인한 불이익이 따른다면 선택권이 완벽하게 보장된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혼자만의 생각이 있다. 자기만의 생각을 남에게 ‘표현하지 않을 자유’는 지금까지는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당연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당연했다고 앞으로도 그러리라는 법은 없다. 소풍날 아침의 청명한 공기가 더 이상 당연한 게 아닌 것처럼 혼자만의 생각을 ‘표현하지 않을 자유’도 당연하지 않게 될지 모른다.

‘표현하지 않을 자유’가 사라졌을 때 우리 삶이 어떤 모습일지 아직은 상상하기 어렵다. 아직 겪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만 한가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게 그리 많지 않으리라는 점이다. 그래서 더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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