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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부르는 색깔들

19세기 말 퀴리 부부Marie and Pierre Curie는 라듐Radium이라는 새로운 물질을 발견하였다. 라듐의 초록색 형광 덕분에 처음에는 여러 분야에서 앞다투어 활용되었다. 치약부터 시계 숫자판의 야광 도료에 이르기까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활용법이 등장했다.

물론 지금은 라듐이 방사선을 내뿜고 있기 때문에 인체에 치명적이라는 사실이 널리 알려져 있다. 라듐이 인기를 끌던 당시의 이야기는 과학에 대한 무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로만 남았다.

역사를 살펴보면 비슷한 사례가 더 나타난다. 중금속 가운데 하나인 납은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밝은 흰색 물감을 만드는 데 사용되었다. 그런데 납에 노출된 화가들이 시력 손상 등의 심각한 후유증을 겪게 된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이후 의학의 발전으로 납 중독의 실체가 드러났고, 비교적 최근이라고 할 수 있는 1970년대에 이르러서야 납의 사용이 제한되었다.

또 다른 중금속 비소는 18세기부터 초록색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었는데, 이 또한 인체에 치명적이다. 오늘날 비소가 살충제의 성분으로 사용된다는 점이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비교적 최근의 사례로는 우라늄을 들 수 있다. 2차 대전 이후부터 우라늄은 각종 식기에 밝은 주황색을 입히기 위해 첨가되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우라늄이 내뿜는 방사능의 위험성이 알려졌고, 더 이상 어떤 그릇 공장에서도 주황색을 내기 위해 우라늄을 칠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때 만들어진 그릇 중에는 오늘날까지 남아서 우리에게 방사능을 쪼이고 있는 게 있을지 모른다.

이 이야기들은 기술에 대한 맹신이 가져올 수 있는 비극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당대에 주목받는 신기술도 시간이 지나고 보면 인명을 해치는 재앙일 수 있다. 그 말인즉슨, 지금 우리 주변에 있는 신기술들 가운데 아직 그 위험이 알려지지 않은 것들도 분명히 있을 것이고, 지금은 단지 그 위험성을 모르고 있을 뿐이다.

당연하다는 것, 상식이라는 것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현재의 시각으로는 당연하지만 훗날 돌아보면 어리석은 무지에서 비롯된 일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또 다른 방향에서 생각해보면, 현재 받아들여지고 있는 상식을 당연하게 여기는 동안에 무지에서 벗어날 기회는 점차 멀어진다고 할 수 있다. 새로운 생각과 시도가 싹틀 기회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게 곧 권위적 사고가 불러오는 폐해다. 권위를 앞세우는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는데, 과거의 지식으로 쌓아 올린 탑의 꼭대기를 지키려는 욕심에 사로잡혀 있다. 권위적인 사고가 태생적으로 미래가 아니라 과거를 향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결과적으로 권위적 사고는 한 시대의 지식수준이 다음 단계로 도약하는 걸 방해한다.

비소가 들어간 벽지 안에서 사람들이 쓰러져 가고 우라늄 찻잔에 죽음의 입맞춤을 하는 동안, 한편에는 당대의 권위자들이 있었다. 그들의 권위는 사람들에게는 통할지 몰라도 지식에는 통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이 모를 수 있다는 걸 몰랐다. 아니, 모른다는 것을 차마 인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정말 경계해야 하는 것은 무지 그 자체보다도, 권위적인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자신의 무지를 돌아보지 않는 거만한 태도다. 가장 큰 무지는 어쩌면 무지를 인정하지 않는 권위주의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죽음을 부르는 색깔들”의 2개의 댓글

  1. 주황색을 칠하려고 우라늄을 사용했다니, 정말 놀랍군요.
    권위주의에 사로잡혀 무지를 돌아보지 않는 것이 가장 무섭다는 말씀에 공감합니다. 내가 옳고 내가 정의롭다고 확신하고 그것이 진리인양 강요하는 것, 자기 의에 도취되는 교만이 가장 끔찍하죠.
    진시황이 불로장생의 영약을 구하다 수은에 중독되고, 무덤에까지 수은 강을 흐르게 했다던 것이 생각납니다. 공사를 하면서 얼마나 많은 인부들이 원하지 않은 수은에 접촉해야 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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