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세포 이야기

1951년 미국의 존스 홉킨스 병원에서 헨리에타 랙스Henrietta Lacks라는 31세의 여성이 자궁 경부암으로 사망한다. 이때 자궁 경부암 세포 표본이 연구실로 보내졌고, 연구자들은 이 세포에 독특한 특성이 있음을 알게 된다. 기본적으로 암세포의 한 종류인 이 세포는 그 특성을 그대로 유지한 채 무한 증식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생명 공학이라는 그림을 그리기 위한 흰 도화지 같은 세포가 발견된 것이다.

이 세포가 바로 오늘날 생명 공학에서 없어서는 안 될 재료인 헬라 세포HeLa cells이다. 헬라 세포라는 이름은 헨리에타 랙스의 앞글자를 따와서 지은 것이다. 헬라 세포는 그 유용성이 입증된 이후부터 전 세계의 수많은 연구소에서 생명 공학 연구에 널리 사용된다. 한 통계에 따르면 2018년 현재 전 세계 헬라 세포의 양을 모두 합하면 20톤에 이른다고 한다.

그동안 헬라 세포는 의학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예컨대 헬라 세포는 소아마비 백신 개발을 가능케 했고, 에이즈와 같은 난치병의 치료제 개발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어찌 보면 헨리에타 랙스라는 한 여인이 인류를 위해 큰 선물을 한 것이다.

하지만, 이와 관련된 불편한 진실이 있다. 이 세포를 얻게 된 과정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이 세포의 원래 주인인 헨리에타 랙스의 기증에 대한 동의가 없었다는 사실이 이후 밝혀졌다. 인종차별이 남아있던 당시 사회 분위기에서, 흑인이었던 헨리에타 랙스는 치료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다행스럽게 여기며 기증자로서의 최소한의 권리를 행사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시선을 현재의 우리나라로 돌려보자. 오늘날에도 수많은 환자들이 1951년 헨리에타 랙스와 비슷한 처지에 놓여있다. 의료 환경의 많은 영역이 장막에 가려져 있기 때문이다. 환자들은 자신의 하나뿐인 몸을 내어놓고 의사를 만나지만, 정작 자신이 무슨 치료를 받는지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절차라는 이름으로 박제화된 동의서에 순순히 서명한다.

환자의 ‘동의’가 ‘동의’로서 의미가 있으려면, 환자는 자신이 받게 될 처치에 대해 완전하고 충분한 정보를 얻을 수 있어야 한다. 달리 말해, 자발적 ‘동의’에 앞서 올바른 ‘정보’를 제공받는 것이 먼저다. 하지만 이러한 기본적인 전제조차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오늘날 우리나라 의료계의 안타까운 현실이다.

가장 대표적인 두 가지 예가 한약의 처방전을 공개하지 않는 문제, 그리고 수술실의 CCTV를 공개하지 않는 문제다. 이 두 가지는, 의료진이 자신의 직업적 권위와 배타적 독점성을 지키기 위해서 환자들에게 마땅히 알려줘야 할 ‘정보’들을 공개하지 않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현재 우리나라 의료계가 풀어야 할 문제는 단순히 환자의 ‘동의’가 아니다. 환자들의 ‘정보’에 대한 제대로 된 접근이 먼저 풀어야 할 숙제다. 물론 ‘동의’도 반드시 해결해야 할 중요한 문제지만, 이는 충분한 ‘정보’의 제공이 먼저 실현되고서야 그 의미가 있다. 게다가 제대로 된 ‘정보’ 없이 이루어진 ‘동의’는 그 자체로 위험하다. 환자에 대한 책임 전가의 구실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의료진의 전문성을 존중하여 믿고 맡기면 안 되겠냐고 한다. 나도 의사인데 그런 말이 인정될 수 있는 세상이 오면 좋겠다. 진심이다.

하지만, 그동안 우리 의사들의 행보를 봐서는 가능하지 않아 보인다. 예컨대, 최근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몰고 온 의료기기 영업사원의 대리수술 같은 범죄를 생각해볼 때, 이미 우리 의사들은 너무 멀리 와버렸다. 지금은 의사들이 반성을 해야 할 때이지, 존중을 요구할 때가 아니다. 그리고 존중은 억지로 요구한다고 가능한 것도 아니다.

환자의 ‘동의’가 없는 의료 행위는 그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그리고 ‘동의’는 올바른 ‘정보’가 주어졌을 때 비로소 ‘동의’로서 그 가치가 인정된다.

의료 윤리라는 것이 특별한 게 아니다. 단지 자기가 원치 않는 것을 남에게 강요하면 안 된다는 황금률의 한 버전일 뿐이다. 의사 자신이 환자의 입장에 서게 된다면, 자신이 잘 알지도 못하고 동의도 안 한 의료 행위가 이루어지는 것을 원치 않을 것이다. 사실 무척 쉬운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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