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로그의 반격

반격붕어빵에 붕어가 없다는 말은 우스갯소리지만, 바나나맛우유에 바나나가 없다는 것은 그저 웃어넘길 일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바나나맛우유에 바나나가 들어가 있을 거라고 기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나나맛우유가 처음 출시되던 1974년 당시 바나나맛우유에는 단 1%의 바나나 성분도 들어있지 않았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바나나 하나와 사과나무 한 그루의 가격이 비슷하던 시절이었다. (현재는 약 1% 정도의 바나나 성분을 함유하고 있다. 하지만 그마저도 맛 때문이라기보다는 ‘바나나’라는 단어를 쓰기 위한 법적 요건을 맞추기 위한 목적이라고 한다.)

그럼 바나나맛우유가 바나나맛우유이게 한 것은 정확히 무엇이었을까. 다들 예상했겠지만, 그것은 바나나 맛을 내는 합성감미료였다.

어디 바나나맛우유만 그럴까. 어릴 적 메로나를 먹으면서 멜론 맛을 상상했던 사람이 나 혼자는 아닐 것이다. 파인애플 맛 환타에 파인애플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는다는 걸 아는 사람은 또 얼마나 될까. 이처럼 합성감미료는 우리가 미처 알아채지 못한 사이에 일상 곳곳에 스며들어 진짜 맛들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사람에게는 이른바 오감이란 것이 있다. 감각이란 인간이 외부나 내부 환경의 변화와 상황을 감지하는 능력을 말하는데, 가장 주된 다섯 가지 즉, 시각, 청각, 미각, 후각, 촉각이 오감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이 오감을 조작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오감을 조작한다는 것이 뭔가 심오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알고 보면 이미 우리 일상에서 늘 겪어온 상황이다. 합성감미료가 진짜 과일 맛을 대신하거나, 방향제 스프레이가 옷에 배어있는 음식 냄새를 가리는 것이 좋은 예다. 그런가 하면 석유에서 추출한 성분으로 만든 인조 가죽은 진짜 가죽의 촉감을 흉내 낸다. 심지어 요즘 나온 알칸타라Alcantara라는 인조 가죽은 웬만한 천연 가죽보다 비싸게 팔린다고 한다. 요컨대 ‘가짜 경험’이 ‘진짜 경험’을 대신하는 세상이 되었다.

합성감미료, 방향제, 인조 가죽 … 미각, 후각, 촉각. 아직 언급하지 않은 두 가지가 남아있다. 그렇다. 시각과 청각은 이야기하지 않았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서일까. 물론 아니다. 사실 시각과 청각은 인간이 세상을 인지하는데 앞서 세 가지의 감각보다 훨씬 큰 비중을 차지한다. 연구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지만, 인간이 외부세계와 접촉할 때 쓰는 감각 가운데 시각이 70%, 청각이 20% 그리고 나머지가 10% 정도를 차지한다고 한다.

그나마 다행이다. 사람의 오감 중에 가장 중요한 시각과 청각은 아직 ‘가짜 경험’에 오염되지 않았으니까. 미각, 후각, 촉각이 화학물질에 취해 해롱대고 있으면 어떠하랴. 어차피 우리가 세상을 인식하는 90%를 담당하는 시각과 청각은 또렷하게 깨어서 우리를 지켜주는데.

정말 그럴까. 음. 지금 당신이 이 글을 보고 있는 화면. 오늘 아침 당신을 깨운 휴대폰 알람 소리. 그것들은 과연 무엇일까. 우리 일상 곳곳에서 우리 눈과 귀를 감싸고 있는 수많은 디지털 기기들. 그렇다. 우리 시청각도 결코 ‘가짜 경험’에서 자유롭지는 않다.

하지만 그곳은 원래 아날로그가 있던 자리였다. 십수 년 전만 해도 우리가 읽는 글의 대부분은 잉크가 종이에 스며들어 쓰여진 것이었다. 시계 분침과 초침은 화면 위가 아니라 실제 가느다란 바늘로 존재했으며, 알람을 맞추면 자명종 위에 달린 망치가 종을 때려서 시간을 알렸다. 그것은 스마트폰 스피커에서 나는 가짜 종소리가 아니었다. 우리가 보고 듣는 모든 것이 실제로 그 자리에 존재하는 ‘진짜 경험’이었다.

하지만 어느덧 주위를 돌아보니 실제로 존재하던 많은 것들이 사라지고 없다. 보이던 많은 것들은 화면 속의 화소가 되었고, 들리던 많은 것들은 조그만 스피커의 경박한 떨림이 되었다.

그동안 세상에는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디지털이 아날로그를 몰아내고 세상을 장악한 원동력은 무엇일까. 나는 디지털이 아날로그를 몰아낸 것은 디지털의 세 가지 특징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디지털은 아날로그에 비해 같은 일을 ‘더 적은 노력’으로 ‘더 적은 비용’을 들여서 ‘더 적은 시간’에 할 수 있다. 요컨대 편리성, 경제성, 즉각성이란 무기 덕분에 디지털은 아날로그라는 원주민을 몰아낸 정복자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승승장구할 것만 같던 디지털에 의외의 경쟁자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경쟁자는 다름 아닌 아날로그 세대의 상징과도 같은 레코드판, 필름 사진, 종이책이다.

캐나다 출신의 기자 겸 작가 데이비드 색스David Sax는 자신의 책 <아날로그의 반격 원제 : The Revenge of Analog | 데이비드 색스 지음 | 박상현, 이승연 옮김 | 어크로스 | 2017년 06월 30일 출간>에서 디지털로 점철된 현대 문물에 염증을 느끼고 다시 과거의 생활방식으로 돌아가려 하는 이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가 흔히 레코드판이라고 부르는 LP, 디지털 사진에 밀려 자취를 감추었던 필름 사진, 그리고 전자책에 밀려 자취를 감추었던 종이책의 부활을 조명한다. 은퇴하고 좋았던 시절을 회상하며 텃밭이나 가꿀 운명이던 아날로그는 어떻게 다시 세상의 주목을 받으며 화려하게 부활하였을까.

사람들이 아날로그에 다시금 관심을 갖게 된 이유, 내가 보기에 그것은 결국 ‘자기 만족’과 ‘자기 과시’라는 두 단어로 압축된다. 사람들은 스마트폰 스트리밍 서비스로 원하는 음악을 언제든 들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음에도 왜 다시 오래된 레코드판에 관심을 가지는 것일까. 레코드판은 손으로 집어 들어 쓰다듬을 수 있고, 거실 한켠에 책장을 마련하여 한 장 한 장 모아둘 수 있다. 말 그대로 실제로 존재하는 ‘내 것’이다. 하지만 온라인 가상 공간에 전기 신호 형태로 존재하는 음악은 그런 것이 불가능하다. 또한, 누군가 이 책 <아날로그의 반격>을 지하철 옆자리에서 읽고 있다고 상상해보자. 태블릿 컴퓨터를 들고 전자책으로 읽는 것보다는 아무래도 종이책으로 읽는 모습이 더 폼이 날것이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아날로그가 디지털보다 폼이 난다. 그게 바로 아날로그의 경쟁력이다.

이처럼, 아날로그는 ‘내 것’이라는 명확한 느낌을 보장하고, 또 한편으로는 ‘폼’이 난다. ‘자기 만족’과 ‘자기 과시’가 특별한 것이 아니다. 이렇게 보면 <아날로그의 반격>은 마케팅을 다루고 있는 듯하다. 실제로 저자는 소비자들이 디지털에 싫증을 느끼고, 오히려 복고적인 아날로그에 지갑을 여는 현상을 보여주면서, 사람들이 어떤 요소에 지갑을 여는지 짚어준다.

하지만 한 꺼풀 벗기고 들어가 보면, 저자는 아날로그의 부활에 비추어 현대 사회 사람들이 겪고 있는 가치 혼돈에 대해서 말하고 싶은 게 아닌가 싶다. 사실 디지털이 약속하는 삶에는 보다 더 근본적이고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 디지털이 제공하는 경험은 실체가 없는 가짜라는 점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디지털은 ‘더 적은 노력’, ‘더 적은 비용’, ‘더 적은 시간’을 들여서 아날로그와 흡사한 가치를 창출한다. 즉 편리성, 경제성, 즉각성에 최적화되어 있다. 하지만, 디지털이 아날로그와 비슷할 뿐이지 같지는 않다. 이는 마치 파인애플 맛 환타가 진짜 파인애플과 다른 것과 같다.

아날로그의_반격디지털은 ‘진짜 경험’을 모방한 ‘가짜 경험’을 제공한다. ‘진짜 경험’에서 핵심 가치(이를테면 종이에 쓰여있는 글씨)를 그럴싸한 ‘가짜 경험’(태블릿 컴퓨터의 화소로 표현된 글씨)으로 대체한다. ‘진짜 경험’이 ‘과정과 결과’라면 ‘가짜 경험’은 ‘오직 결과’에 머문다.

디지털에 대한 열광은 결과 지상주의의 한 단면이다. 결과 지상주의는 ‘그 과정이야 어떻든지 간에 원하는 결과를 얻으면 된다’는 가치관이다. 그리고, 디지털이 추구하는 결과들은 결국 하나의 큰 줄기로 모아지는데, 그건 바로 ‘돈’이다.

앞서 내가 디지털의 세 가지 특징으로 지목한 편리성, 경제성, 즉각성에 대해서 살펴보자. 같은 결과를 얻어내는 상황에서, 경제성은 그 자체로 더 적은 돈을 의미하니 물론이거니와, 더 적은 노력을 의미하는 편리성과 더 적은 시간을 의미하는 즉각성도 따지고 보면 결국 돈으로 연결되는 문제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력과 시간은 돈으로 사고팔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디지털이란 돈을 버는 (적어도, 돈을 절약하는) 수단이라고 볼 수 있다. 디지털이 세상을 점령한 이유는 그것이 어떤 식으로든 돈을 모으는 데 도움이 된다는 사실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암묵적인 합의가 있기 때문이다.

자. 여기서 다른 질문을 던져보겠다. 그렇다면 우리는 돈을 왜 모으는가. 그 돈이란 것이 과연 무엇이기에, 그것을 모으려고 하루 중 시간 대부분을 직장에서 써버리는가. 또 그 직장을 얻기 위해서 학창시절 대부분을 학교에서 경쟁하며 보내는가.

그것은 아마도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 아닐까. 그렇다. 우리는 ‘더 나은 미래’를 위한다는 이유로 돈을 번다. 지금보다 더 풍요로운 삶을 살게 될, 하지만 아직은 오지 않은 어느 날의 밑천을 대기 위해서 지금 열심히 일하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하지만 틀렸다. 우리는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 돈을 버는 게 아니다. 사실 우리는 ‘더 나을 것 같은 미래’를 위해서 돈을 벌고 있다. 이 두 가지는 실로 큰 차이가 있다.

우리는 스스로를 속이고 있다. 현재에 대한 불만과 미래에 대한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서. 돈을 많이 벌면 ‘현재보다 한층 더 나은 미래’가 기다릴 것이라고 스스로를 세뇌한다. 즉 돈이란 ‘지금, 여기’를 태워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훈훈하게 달래주는 연료에 다름 아니다.

다시 아날로그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아날로그는 디지털이 약속하는 편리성, 경제성, 즉각성의 유혹에 대한 정중한 거절이다. 아날로그는 ‘지금, 여기’의 소중함을 상징한다. ‘아날로그의 반격’은 그저 복고풍 유행이 아니다. 그동안 대체 가능한 것을 얻기 위해서 대체 불가능한 것을 소홀히 다루었던 관행에 대한 반성이다.

대체 가능한 것을 얻기 위해서 대체 불가능한 것을 포기하는 것은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돈을 위해서 현재를 포기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아날로그의 반격’, 그것은 사람들이 디지털이란 ‘가짜 경험’의 허무함에 눈을 뜨게 되었음을 의미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마치 바나나맛우유만 먹다가 진짜 바나나를 먹어보고, 역시 진짜가 더 맛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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