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할 때 그 마음으로

시작할 때 그 마음으로여기에 굴뚝 청소를 하고 나온 두 아이가 있다. 첫 번째 아이의 얼굴에는 시커먼 그을음이 묻어있고, 두 번째 아이의 얼굴에는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두 아이 중에서 얼굴을 씻으러 갈 사람은 누구일까. 얼굴이 더러운 첫 번째 아이일까.

아니다. 실제로는 깨끗한 두 번째 아이가 씻으러 간다. 더러운 아이의 얼굴을 보고 ‘나도 저렇게 더럽겠구나’ 생각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얼굴이 더러운 아이는 스스로 깨끗하다고 생각하며 씻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탈무드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도 적용해 볼 수 있다. 첫 번째 아이는 ‘종교인’, 그리고 두 번째 아이는 우리 같은 평범한 ‘세속인’으로 말이다.

종교는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인간의 구원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실제로 종교가 하는 것은 그 반대인 경우가 많다. 수 많은 사람들의 삶을 도탄에 빠뜨리고 전쟁터로 내몬다. 종교의 이름으로 문명을 파괴하고, 같은 인간을 노예로 삼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그런가 하면 어떤 종교인들은 평범한 세상 사람들이 피땀 흘려 일한 대가를 감언이설로 갈취하며 크게 힘들이지 않고 살아간다. 헌금하면 죽은 후에 천국이 기다리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그 헌금으로 호의호식하는데 몰두한다. 바쁜 시간에 전화해서는 “좋은 땅 소개하려고요.”라며 꼬득이는 이들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정말 그게 좋은 것이면 본인들이 하시던가.

자신들은 신의 뜻을 대변한다고 말한다. 어떨 때에는 스스로가 정말 그렇게 믿는 것 같다. 순진하게 땀흘려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보면서 자신들도 그럴 것이라 착각하는 것일까. 마치 앞의 이야기에 나온 첫 번째 아이처럼 말이다.

종교가 타락하고 있는 동안, 오히려 세속은 종교적인 이상을 실현해 나아가고 있다. 과거에 비하면 인종차별과 성차별은 많이 개선되었다.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장치도 꾸준히 마련되고 있다. 민주주의도 성숙하고 있다.

완벽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아직 갈길이 멀다. 여전히 불평등과 갈등은 세상 곳곳에 남아있다. 하지만 이 세상은 분명 더 좋은 쪽으로 한 발 한 발 나아가고 있다.

요컨대, 세속은 종교의 가르침을 쫓아 상호 존중와 포용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반면에, 종교는 세상 사람들의 이기심을 조장하고, 자신들의 탐욕을 합리화하며, 점점 천박해져 간다. 종교가 세속보다 더 세속적이고, 세속이 종교보다 더 종교적인 아이러니한 현실이다.

내가 너무 종교를 가혹하게 평가한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런데 실제로 다양한 배경과 입장을 가진 이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면 이런 생각을 가진 이가 나 혼자는 아닌 듯 하다.

그런 인식 때문일까. 종교인이 세상에 귀감이 되는 일을 하면, 역설적이게도 더 깊은 인상을 남긴다. 특히 서로 다른 종교에 속한 성직자들이 경계를 뛰어넘어 어울리는 모습은 사람들에게 적잖은 감동을 준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사례가 그렇다.

1997년 12월 14일, 서울시 성북구에 있는 길상사吉祥寺의 낙성법회落成法會에 천주교의 큰 어른인 김수환 추기경이 예고 없이 찾아왔다. 낙성법회란 사찰의 건물이나 불상을 완성했을 때 이를 축하하는 의식이다. 이 자리에서 추기경은 불교 신자들과 함께 어울려 음악회를 즐기고 축사를 했다.

그로부터 두 달여가 흐른 1998년 2월 24일, 법정은 100주년을 맞은 명동성당의 제대에서 강론을 했다. 김수환 추기경의 길상사 방문에 대한 답례이기도 했다. 신부가 절로, 승려가 성당으로 서로 오가며 종교의 벽을 허문 이 때의 사건은 당시 IMF 사태로 상처받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잔잔한 감동과 위로를 전했다.

이런 의미있는 강론이었음에도, 당시 명동성당 측에서는 미처 녹음을 못했다고 한다. 하마터면 강론의 내용이 구전으로만 남을 수도 있었다. 다행히도 그 자리에 있던 이해인 수녀가 따로 녹음해 두어서 CD로 보관하였고, 이후 그 자리에 없던 사람들도 이 강론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법정의 제자이기도 한 승려 현장은 <시작할 때 그 마음으로 법정 글, 현장 엮음 | 책읽는섬 | 2017년 01월 03일 출간>라는 책에서 그 강론의 전문을 소개한다. 법정과의 인연으로 출가한 것으로 알려진 현장은 법정의 조카이기도 한데, 당시 강론의 전체 내용을 처음으로 세상에 공개했다.

강론의 내용을 따라가보면, 법정은 무소유의 삶을 권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한다. ‘무소유의 삶이란 아무 것도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 것’이라는 게 핵심이라면 핵심이다.

알다시피, 무소유는 법정이 늘상 강조하던 것이다. 그래서 강론으로 무소유를 강조하는게 새롭지는 않다. 그러면서도 나는 한편으로 의아했다. 왜 하필이면 다른 종교인들 앞에서 강론을 하는 흔치 않은 기회에 또 다시 무소유를 꺼내드는가. 종교 간의 화합 같은 내용이 더 없이 잘 어울릴 자리일텐데 말이다.

책 한 장 한 장을 넘기는 동안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가서야 그 이유를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법정이 다른 종교인들 앞에서 무소유를 말한 이유는 아마도, 상대를 배척하는 마음의 뿌리에 욕심이 자리잡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나는 법정이 말한 ‘불필요한 것’이 ‘종교를 앞세워 다른 이들을 배척하는 마음’이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시작할_때_그_마음으로법정의 가르침이 아니라도, 우리는 남을 배척하는 게 나쁘다는 걸 안다. 너무 당연한 명제인 나머지 평소 그 이유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 보지는 않는다. 하지만 만약 그 이유를 알 수 있다면, 남을 배척하지 않는 삶의 자세를 지니는데 더 큰 동기가 생기고, 결과적으로 그렇게 사는 데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남을 배척해서 안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이를 나름대로 정리해보니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 확고한 믿음이나 입장도 따지고 보면 결국 외부에서 주입된 생각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종교적 신념이나 정치적 견해가 그렇다. 당신이 지금은 아주 당연하게 믿는 많은 것들은 사실 태어날 때에는 당신 안에 없던 것들이다.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머릿속에 자리잡고 뿌리내리기 시작한 것들이다.

나는 이것을 다른 이름으로 부른다. 바로 ‘권위’다. 권위는 남이 주입한 생각에서 비롯된다. 밖에서 온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일지 말지는 오로지 각자의 선택에 달렸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선택권을 포기하고 만다.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생각해보자. 남들이 당신에게 주입한 생각이 당신에게 주인 행세를 한다면 정말 불쾌한 일이 아닐까. 심지어 남들이 주입한 생각이 당신더러 대리전을 치르라고 한다면, 그 말을 순순히 따라야 하겠는가. 스스로의 존엄성을 지키고 싶은 사람이라면 그래서는 안될 것이다.

특정 종교적 또는 정치적 입장에서 상대방을 배척하고 싸움에 나서는 것은 누군가를 위해 대리전을 치르는 것과 같다. 당신은 결코 만날 수 없는, 화려하게 치장된 방 안에서 당신의 생각을 조종하는 극소수의 최상층을 위한 대리전 말이다. 그런 일에 인생을 낭비하기에 당신은 너무 소중하다.

둘째, 다른 이의 삶을 다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타인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각자의 살아온 경험과 서있는 입장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상대방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에는 이해하려고 애쓰지 마라. 억지로 이해시키려고 하지도 마라. 때로는 그냥 서로를 인정하는거다. 억지로 같아지려고 하기보다 그냥 다름을 ‘인정’하는 거다. 인정하고 공존하는 거다.

이해는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이지만, 인정은 서로의 다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틀림이 아니라 다름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당신은 평소에 ‘다른 종교’라는 말은 써도 ‘틀린 종교’라는 말은 쓰지 않는다. 당신도 이미 알고 있다는 말이다. 알고는 있으면서도 때때로 ‘다른 종교’를 ‘틀린 종교’를 대하듯 한다. ‘이해한 것 같은 착각’ 때문이다. 기억하자. 이해가 아니라 인정이다.

셋째, 무엇이 옳고 그른지 지금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역사가 증명한다. 예수는 반역죄로 십자가에 못 박혔고, 소크라테스도 젊은이들을 선동했다는 죄목으로 독배를 마셨다. 당대의 사람들로부터는 배척되었지만 후세에 가서 선구자로 인정받는 이들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지금은 당신이 타인을 틀리다고 하면서 배척하더라도, 시간이 흐르면 당신이 틀린 것으로 판명될 수 있다. 또, 거기서 더 시간이 흐르면 당신을 틀렸다고 한 이들에 대한 평가가 뒤집힐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한 줌의 지식을 근거로 남을 배척하는 것은 대단히 경솔한 태도다.

요컨대, 내가 옳다고 믿고 싶은 욕심. 남은 틀리다고 믿고 싶은 욕심. 그리고 지금 알고 있는 것이 앞으로도 옳을 것이라고 믿고 싶은 욕심. 이런 욕심들이 우리로 하여금 타인을 배척하게 한다. 불필요한 것을 버리는 것이 무소유라고 한다면, 이런 욕심들이 바로 첫 번째로 버려야 할 대상이다.

나처럼 평범한 사람도 글 하나를 쓰려면 깍지를 끼고 턱을 괴면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다. 독자들에게 글을 쓰는 이유를 온전히 전하고 싶기 때문이다. 하물며 법정이 명동성당까지 와서 또 다시 무소유를 이야기 했을 때에는 분명히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창밖의 쌀쌀한 날씨 만큼이나 매서운 IMF 사태로 그 어느 때보다 사람들의 마음이 닫혀버린 1998년 2월 말, 명동성당 제대에 선 법정은 ‘무소유’를 통해 ‘함부로 남을 배척하지 말라’는 말을 하려고 한게 아니었을까 싶다. 내멋대로 내린 결론이다.

“시작할 때 그 마음으로”에 대한 8개의 생각

  1. 감사합니다. 글 잘 읽고 갑니다.
    우선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타인을 사랑하는 마음이 시작 될수 있으며,
    제가 생각 하기에는 성당이나 교회 불교역시 사랑의 실천이란 점에서 공통점이 있는듯합니다.
    몇일전 이집트유물전에 갔었습니다, 그기에 적힌 내용중에서 나는 굶주린 자에게 빵을 주었고 헐벗은 자에게 옷을 주었다. 라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가 “함부로 남을 배척 하지 말라”라고 느끼셨다면 저는
    법정스님의 무소유가 최소한의 필요한것을 가지되 그 이상이 것을 가지고 싶다면 나누고 베풀수 있는 마음을
    가지는것이 어떨까? 라고 들리는것 같습니다. 이건 제 마음대로의 결정입니다. 따라 했다고 욕하셔도 할말은 없지만요^^
    미안합니다
    고맙습니다
    축하합니다
    사랑합니다
    용서 하세요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것은 마음의 작용이다.
    치유의 기가 햇살 처럼 내려와 온세상 모든이의 아픔과 고통이 사라진다.

  2. 헌금하면 천국 간다 말하고
    그 헌금 받아 호의호식하는 그 자들~
    이기심 조장하고 자신들의 탐욕을 합리화하는~
    감사합니다
    잘 정리해 주신 글 되돌려 봤습니다
    그러나 더 무서운 건
    그 걸 알면서도 숨죽이는 정치와 언론의 고상한 처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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