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참견

위대한 참견와파린Warfarin이라는 약이 있다. 이 약은 피를 굳지 않게 하며, 다른 말로 혈액 항응고제라고도 한다. 이는 혈전이 생기는 것을 막는 효과가 있다. 따라서 와파린은 혈전이 생길 위험이 있는 사람들에게 널리 쓰인다.

와파린이 쓰이는 경우 중 한 가지가 인공 판막이 있을 때다. 심장에는 판막이라는 구조가 있는데, 이 판막에 문제가 생기면 인공 판막으로 교체한다. 아무래도 원래의 판막에 비해서 혈류의 흐름이 변할 수 있고 혈전의 위험도 증가할 수 있다. 와파린은 이런 위험을 예방한다.

와파린과 인공 판막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다름 아닌 나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나는 매일 밤마다 와파린을 복용한다. 인공 판막 때문이다. 와파린을 복용하여 피가 굳는 속도를 보통 사람보다 두세 배 정도 낮게 유지한다.

이것을 전문 용어로 INR이라고 하는데, 피가 얼마나 천천히 굳는지를 말한다. 예를 들어, 나의 경우는 INR 2에서 3 정도가 목표 범위다. 보통 사람보다 피가 굳는 데 두세 배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뜻한다. 평소 나의 INR은 다소 기복이 있기는 하지만 목표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수준을 유지한다.

와파린은 꽤나 까다로운 약이다. 같은 양을 복용하더라도 몸 상태에 따라서 혈액의 굳기를 조절하는 정도가 달라진다. 심지어 술 한 잔을 마셔도 그 정도가 변한다. 그래서 나처럼 와파린을 복용하는 사람들은 길어도 3개월에 한 번은 정기적으로 혈액 검사를 하여, 혈액의 굳는 속도가 목표한 수준에 있는지 확인한다.

몇 년전에 있었던 일이다. 그 날도 정기적인 혈액 검사를 위해서 병원을 찾았다. 그런데 그날 진료실에서 INR 점수를 확인했을 때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무려 7이 넘었기 때문이다. 이제껏 그렇게 높은 수치를 본 적이 없었다. 이처럼 높은 수치는 피를 굳히는 기능이 아주 떨어져 있다는 의미다. 달리 말하면 조그만 충격에도 몸 어딘가에서 걷잡을 수 없는 출혈이 생길 수 있는 위험한 상태임을 뜻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특별히 그럴만한 이유가 없었다. 평소와 비슷한 생활 방식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숫자는 당시 매우 위험한 상태라고 명확히 보여주고 있었다. 주치의는 일단 응급실로 가라고 했다. 나는 곧바로 외래 진료실을 나와서 옆 건물의 응급실로 향했다.

응급실이 그처럼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곳인지 그 때 처음 알았다. 내 몸에 시한폭탄이 들어있을지 모르는데, 응급실에 있는 의료진들은 전혀 폭탄처리반처럼 보이지 않았다.

얼마 후 내 차례가 되었고, 응급실 담당 의사가 왔다. 몇가지를 물어보며 상황을 파악하더니, 다시 혈액 검사를 해보자고 했다. 혈액 검사 결과가 잘못되었을 수도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나도 그 의사의 판단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하기로 했다. 하지만, 다음에 이어진 그 의사의 말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그 응급실 의사는 일단 INR 점수가 매우 높으니 비타민 K를 투여하겠다고 했다. 비타민 K는 와파린과 반대 작용을 한다. 따라서 피가 잘 굳게 하는 효과가 있다.

나는 되물었다. “만약 당신 말대로 혈액 검사가 잘못되었다면, 비타민 K를 투여는 내가 인공 판막을 쓰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혈전의 위험을 높일 수 있다. 지금 비타민 K를 쓴다는 것은 혈액 검사 오류라는 당신 추정과도 맞지 않을 뿐더러, 내가 처할 위험에 대해서 충분히 고려한 판단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 담당 의사는 애써 불편한 표정을 숨기며 “그렇다면 아무것도 해줄 것이 없다.”고 말하였다. 나는 “어차피 결과가 나오는 데 한 시간 안쪽이 걸릴테니 결과를 보고 결정하도록 하자.”라고 말하며 담당 의사를 돌려보냈다.

두 번째 혈액 검사 결과는 나의 INR이 2.7이라고 알려주고 있었다. 즉 목표한 적정 범위 안에 있었다.

나는 ‘이건 아니라고 생각하는 일’을 마주하면 한 가지를 두고 곰곰이 고민한다. 이 일을 크게 벌일 일인가, 아니면 조용히 넘어갈 일인가. 결정 기준은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지 여부다. 고민한 결과 이번 건은 크게 벌일 만한 일이었다.

병원 차원의 진상 조사가 진행되었다. 결국, 첫 번째 혈액 검사를 담당한 의료진이 혈액 검사 기계의 보정calibration을 하지 않은 것이 원인임이 밝혀졌다. 저울에 비유하자면, 아무것도 올려놓지 않은 상태에서 눈금이 0을 가리키는 것을 확인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상태로 무게를 잰 것이다.

혈액 검사를 담당하는 진단검사의학과의 잘못이었다. 사실이 명백하게 밝혀졌다. 하지만 맨 처음 이 사실을 파악한 진단검사의학과 책임자는 자신의 책임을 축소하고 회피하기에 급급했다.

환자로 병원에 갈 때마다 종종 느끼는 것이지만 의료진들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는 것에 인색하다. 아마도 환자들이 작은 꼬투리를 잡아서 의료진들을 곤혹스럽게 할 거라는 걱정 때문인 것 같은데, 그 원인이 ‘실수조차 인정하지 않는 의료진들의 고압적인 태도’에서 비롯되었음을 모르는 것 같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무슨 계기 때문인지 그 책임자가 얼마 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정식으로 사과하겠다는 뜻을 전해왔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일이 더 커지는 것에 부담을 느껴서 그런 게 아닌가 싶다.

기계 관리만 잘했으면 내가 애초에 낼 필요가 없었을, 응급실 진료비와 추가 검사비는 돌려받았다.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다른 한 가지를 분명하게 요구했다. 나는 고개숙여 사과하는 진단검사의학과 의료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 당황스러워 하는 감정은 충분히 알겠다. 하지만 지금 더 시급한 것이 있다. 나와 비슷한 시기에 검사를 받은 이들 가운데, 기계 오류로 잘못된 혈액 검사 결과를 얻은 이들이 분명히 더 있을 것이다. 나에게 사과할 시간에, 속히 그 분들을 찾아서 문제를 바로잡아 주기 바란다. 그들을 찾아 정직하게 설명하고 제대로 마무리 한다면 나도 더 이상 문제삼지 않겠다.”

그리고 그제야 처음으로 내가 의사임을 밝히며 말을 이었다.

“사실 나도 당신들 같은 의사다. 그러니 이런 일을 바로잡을 수 있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의사가 아닌 이들에게는 영문도 모르고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상황이다. 앞으로 이런 일이 없도록 환자들 한 분 한 분에게 관심을 갖고 일해주기를 진심으로 당부드린다.”

나의 마지막 요구사항을 비롯하여 이후 일은 순조롭게 잘 처리되었다. 하지만 내 기억 속에는 몇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남아있다. 의사들이 갖고 있는 커다란 문제의 민낯을 그대로 드러낸 경험이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내가 느낀 문제점을 크게 세 가지로 추리면 다음과 같다.

첫째, 진단검사의학과 의료진은 혈액 검사 기계 관리를 소홀히 했다. 혈액 검사 결과로 약의 용량을 조절하고 그 약으로 인해서 환자의 건강이 좌우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면 결코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둘째, 응급실 담당 의사는 나의 혈액 검사 수치만 보고 기계적으로 약을 투여하려고 했다. 만약의 경우 그 약이 초래할 위험성을 환자만큼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환자 몸을 자신의 몸처럼 보살피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셋째, 모든 일이 밝혀진 후에도 책임자는 사과에 인색했다. 환자의 실망과 분노를 읽기 보다는, 자신에게 향할 지 모르는 책임의 부담을 더는 것을 여전히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는 왜 생긴 것일까. 병리학자이자 의사인 히노 오키오ひ野興夫는 <위대한 참견 원제 : 病氣は人生の夏休み | 히노 오키오 지음 | 김윤희 옮김 | 인플루엔셜 | 2016년 12월 20일 출간>에서 의사들의 ‘관심’과 ‘여유’가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환자 한 명 한 명이 살아 숨쉬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무시하고, 그저 처리해야 할 업무 대상으로 간주하는 의사들의 모습을 지적한다. 나 또한 이러한 저자의 견해에 공감한다.

저자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가 관심을 갖고 있는 시한부 암 선고 환자를 위하여 대담한 실험을 하나 구상하고 실행에 옮긴다. 이른바 ‘암철학 외래’다.

위대한_참견저자는 암 환자 그리고 그 가족과 소파가 놓인 차분한 공간에서 만나서 담담하게 이야기를 듣고,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도움이 될 만한 말을 들려준다.

저자와 환자 사이에는 진료 기록을 남길 컴퓨터도, 청진기도 없다. 그저 대화를 나누며 들 수 있는 차와 약간의 쿠키가 그들 사이에 놓인 것의 전부다. 그는 한 시간 정도 이야기를 나눈 후에 ‘언어 처방전’이라고 이름붙인 글을 환자에게 전해준다.

‘언어 처방전’에는 무슨 내용이 담길까. 저자는 ‘언어 처방전’에서 인생에서 진정으로 소중한 것은 그렇게 많지 않으며, 대부분은 나 아닌 다른 사람이 대신 할 수 있는 것들이라고 말한다.

이를테면, ‘가족과 함께하기’가 좋은 예다. 반면에, 남이 대신 할 수 있는 것, 예컨대 ‘회식’, ‘모임’, ‘상사 비위 맞추기’ 같은 것에는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암 선고를 받고 절망에 빠졌던 수 많은 환자들이 ‘암철학 외래’에서 삶을 잘 마무리 할 수 있는 해법을 얻고 돌아간다.

저자의 ‘암철학 외래’ 이야기를 들으며, 환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 만으로도 환자들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동안 의사들이 종종 가벼이 여겼던 그 고유의 역할 말이다.

이 세상에는 의사보다 의사가 아닌 사람이 훨씬 더 많다. 의사를 가족으로 둔 사람보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더 흔하다. 나는 그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렇지 않은 극소수의 사람들과 다르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건강하고 싶은 마음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이자 권리이기 때문이다.

나는 환자들을 볼 때 항상 마음 속으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다. 내 가족이 환자라도 이렇게 하겠는지. 내가 환자라면 이런 대우를 받고 싶은지. 그 질문에 떳떳한 의사가 되고 싶다.

오늘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말한 와파린과 혈액 검사의 경험을 시간이 지나도 잊을 수 없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내가 겪었던 일을 다른 환자에게 겪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솔직히 말해서 의사로서의 직업적 소명 같이 거창하게 부를 일이 아닐지 모른다. 그저 ‘내가 원치 않는 것을 남에게 행하지 않아야 한다’는 기본적인 양심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것을 ‘어떻게 행하는가’는 또 다른 단계의 문제다. <위대한 참견>의 저자 히노 오키오는 그의 ‘암철학 외래’ 실험을 통해 내게 그 길이 무엇인지 보여주었다. ‘관심’과 ‘여유’, 그리고 이 두 가지를 위해서 환자에게 더 많은 시간을 내어주어야 함을 말이다.


“위대한 참견”에 대한 14개의 생각

  1. 선생님 글을 읽다보니 한국의 ‘아툴 가완디’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개인적 경험과 의학적 사실, 현실의 문제 등이 잘 어우러져서 유익하면서도 재밌게 읽혔습니다. 종종 글 보러 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1. 제가 비록 아툴 가완디 같은 지성에 비할 바는 아니겠으나, 그저 제 앞의 환자들의 근심과 걱정을 그 분들 입장에서 진심을 다해 이해하고 싶을 뿐입니다.
      그 길 위에서 얻게 된 생각을 독자님 같은 분과 나눌 수 있다면 더 없는 기쁨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 인생에서 소중한 것,,그리고 여유…

    남은 제시간을 다시 생각하게 하며 격려의 글처럼 느껴졌습니다.

    항상 선생님 글 감사히 읽고있습니다

  3. 한마디로 선생님의 글에는 인간적 관심과 여유를 느끼게하고 모두가 존중받을 존재임을 알게 하는 글입니다~
    선생님의 지식이 자신을 위험으로부터 지킬수 있고 또한 환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경험이 되어 진정한공감을 전해받습니다~
    무한한 사랑을 느낍니다.😂

  4. 비염 치료차 한 대학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습니다

    한 움큼의 거즈를 콧속에 밀어 넣고 당겨 뺄 때
    나는 ” 아~ 아아~~” , 의사 양반은 ” 엄살 떨지 말아요, 뭐 이거 가지고~ ”
    여러분의 의사 중, 유독 그분은 말씨도 거칠었지만, 괭이로 땅 긁는 듯한 손놀림도 거칠어
    지금 생각해도 온 몸이 오싹오싹합니다

    ” 좀 아프실 거예요 조금만 참아보세요” 그 말 그리 어려웠던가~~?
    잠깐의 만남에서 두어마디의 말과 몇 센티 오갔던 그의 손 놀림이 30년 넘게 날 오싹하게 합니다

    그 생각 남아서 인지
    환자와 의사 간 아름다운 동행을 생각하시는 님의 글 마음 깊이 남습니다
    감사합니다

  5. 화가 나네요 …
    의사야 말로 공부만 잘한다고 면허를 줘서는 안될 거 같아요 ㅜㅜ
    환경이 저렇게 만들어 가는 걸지도 모르겠지만요.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