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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 사과의 기술

공개 사과의 기술

OECD에서 발표한 2016년 건강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연평균 14.9회 외래 진료를 이용한다고 한다. 적어도 한 달에 한 번 이상 의사를 만난다는 말이다. 이처럼 의사들은 우리의 일상 생활 속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

당신은 ‘의사’ 하면 어떤 기억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가. 긍정적인 것이 떠오를 수도 있겠다. 중환자실에서 밤을 세우며 위독한 환자를 살리는 모습, 흰가운을 보자마자 울기 시작하는 아이를 달래며 목 안을 진찰하는 모습. 이처럼 우리 주변의 의사들 가운데는 자신의 위치에서 묵묵히 맡은바 소임을 다하는 이들이 많다.

그런 의사들 덕분에 우리는 비록 몸이 아프게 되더라도, 곧 건강을 되찾아 소중한 사람들이 있는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

반면, 의사들 하면 떠오르는 것 중에는 부정적인 면도 있다. 소위 배운 사람들이라는 자만심. 자신들은 당연히 돈을 많이 벌어야 할 것으로 생각하는 이기심. 한 마디로 말해서 ‘사회 대다수의 구성원들과 괴리된 현실 인식’이다.

좋은 것은 그대로 두어도 좋지만, 나쁜 것은 더 드러내어 고칠 수 있도록 자극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그래서 오늘은 의사들의 부정적인 면, 그 가운데 특히 사과에 인색한 의사들의 태도에 대한 이야기로 글을 시작해보자.

최근 의사를 만났던 기억을 더듬어보자. 내가 불편한 것을 이야기하고 궁금한 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찾아간 의사인데, 오히려 내가 그 의사를 더 배려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을 느낀 적이 없었는가.

접수하고 의사를 만나기까지 하염없는 기다림. 비싼 검사는 다 받았음에도, 나중에 발견하지 못한 병이 있다고 드러났을 때의 배신감. 집도의만 믿고 가족의 수술을 맡겼음에도, 오히려 상태는 악화되고 죽음이 가까워지는 모습을 지켜보게 될 때의 분노감.

그때, 그 의사들은 과연 당신과 당신 가족에게 고개숙여 진심어린 사과를 건네었던가.

남을 위해서 자신의 노하우와 시간을 쓴다는 점에서 의사도 결국 서비스업이다. 상대를 배려하고, 부득이하게 피해를 끼친 것에 대해서는 사과를 하는 것이 서비스업의 기본이다. 아니, 모든 인간관계의 기본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의사들 가운데 그 ‘기본’에 충실한 이들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다.

오히려 많은 의사들은 자신의 잘못을 드러내어 사과하고 싶지 않을 때 다른 방법을 택한다. 대체로 다음의 세가지 방식 가운데 하나이다.

첫째, 환자가 이해하기 ‘어려운 용어’를 써서 말한다.

환자가 이해할 수 없는 의학 용어를 남발한다. 의사 자신이 불리한 부분을 언급하며 법적인 문제는 피해가지만, 환자에게 반론의 여지를 주지 않는다.

어려운 용어로 포장된 의사의 설명 때문에, 환자들은 두 눈 뜨고 코 베이듯 의사의 잘못에 대해서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친다.

둘째, 환자의 적절하고 타당한 지적을 ‘오해’로 규정한다.

의사들이 보는 교과서에서 하나의 특정 질병에 관해서 언급된 분량이 어느 정도인지 아는가. 보통은 한두 페이지, 많아야 서너 페이지다.

반면에 환자들은 어떤 질병이 자신이나 가족의 일이 되었을 때 충분한 시간을 갖고 수많은 정보를 섭렵한다. 인터넷으로 누구나 상당한 수준의 의료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게다가 사람은 무엇이든지 ‘자기 일’이 되었을 때 무서운 학습력을 발휘한다.

의사들은 의사의 판단이 틀릴 수 있음을 항상 생각해야 한다. 환자의 지적에 대해서 “그건 환자 분께서 몰라서 그러는 겁니다”라고 무시하기 보다는, ‘의사 자신이 몰라서 그러는 것’은 아닌지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야 한다.

셋째, 병원이나 의료 시스템에 자신의 ‘책임’을 미룬다.

의사의 잘못으로 치료비가 많이 나올 때가 있다. 의사가 일정 조율을 잘못하는 바람에 환자가 오래 기다리는 경우도 있다.

이처럼 명백히 의사가 잘못한 경우에도, 의사들은 환자가 겪은 피해의 원인을 병원의 시스템 문제나 의료의 법률적인 부분으로 돌린다.

나는 의사들이 이처럼 사과에 인색한 태도의 원인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내가 환자로도 살아보고 의사로도 살아보니, 의사들의 사과에 인색한 태도는 ‘내가 너희보다 많이 배우고 더 잘났다’는 비뚤어진 자존심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이 비뚤어진 자존심 때문에 의사들은 자신이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을 부정한다. 그리고 환자들에게 정직해야 하는 의무를 저버린다.

환자에게 제대로 사과하는 것. 그것은 곧 환자에게 정직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틀리지 않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지만, 동시에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나는 ‘환자에게 사과하는 방법’에 관심을 갖고 이를 배울 수 있는 책을 찾았다. 환자의 마음을 다치지 않게 하고, 환자의 권리도 지켜줄 수 있는 사과법을 배우고 싶었다.

하지만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도서관이나 서점에 가보면 ‘협상’이나 ‘설득’에 관한 책들은 넘쳐난다. 그런데 의외로 사과를 주제로 다룬 책은 거의 없었다.

그건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협상’이나 ‘설득’은 이기는 방법이다. 반면, ‘사과’는 지는 방법이다. 경쟁이 치열해진 사회가 사람들을 ‘이기는 방법’을 갈구하도록 내몰았다. 상대적으로, 사람들이 불리하게 될 수 있는 ‘사과’에는 관심을 거두게 했다.

그러던 중, 사과라는 주제에 대해서 폭넓게 다룬 책 『공개 사과의 기술 원제 : Sorry About That | 에드윈 L. 바티스텔라 지음 | 김상현 옮김 | 문예출판사 | 2016년 07월 20일 출간』을 접했다. 저자 에드윈 L. 바티스텔라Edwin L. Battistella는 오랫동안 언어에 대한 연구에 매진해온 언어학자다. 그가 쓴 책 『공개 사과의 기술』은 사람들 사이에서 사과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여준다.

총 10장으로 구성된 『공개 사과의 기술』은 사과의 언어적학적 측면과 다양한 실제 사례를 살펴본다. 1~4장은 사과의 절차와 사과에 사용된 언어를 소개한다. 5~6장에서는 사과가 고백이나 변명과 어떻게 다른지 살펴본다. 7~8장에서는 개인적인 범위를 넘어서는 전국적인 사과와 국제적인 사과를 살펴보고, 9~10장은 사과의 동기와 대중문화에 나타난 사과를 논의한다.

요컨대, 저자는 사과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여줌으로써, 사과의 본질을 제시한다. 즉, 사과에 사용되는 언어, 철학, 사회학 등을 살펴보며, 진실한 사과와 그렇지 못한 사과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알아본다.

저자는 사과를 몇가지 단계로 분석했다. 또한, 사과에서 쓰이는 단어의 표면적인 의미나 함의에 대해서도 깊이있게 설명했다.

공개_사과의_기술

하지만 내가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얻은 결론은 저자가 주목한 것과 다르다. 사과의 기술적 측면, 달리 말해서 사과의 표현 방식은 사과의 핵심이 아니다. 내가 내린 결론은 아주 단순하고 간결하다.

사과의 본질, 그것은 ‘권위를 내려놓는 것’이다.

앞서 함께 살펴본, 의사들이 사과를 해야하는 것이 마땅한 상황에서 선택하는 그릇된 행동의 예를 다시 떠올려보자. ‘어려운 용어’를 쓰면서 자신의 잘못을 가리는 것, 환자의 의견을 ‘오해’로 몰아붙이는 것, 다른 쪽에 ‘책임’을 전가하는 것.

모두 의사들 자신의 권위로 환자를 압박하거나, 또는 권위가 손상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거짓된 행동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궁극적인 해법은 ‘권위를 내려놓는 것’ 외에 없을 것이다.

시야를 넓혀보면, 사과에 소극적인 것은 비단 의사들에게서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다. 다양한 직종과 역할에서 나타난다. 특히, 권위와 평판으로 먹고 사는 소위 ‘배웠다는 이들’이 사과에 인색하다.

왜 그럴까. 아마도 이들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이기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어서,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지는 것이 무엇인지, 자신을 낮추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다.

세상을 살다보면 언제나 항상 이길 수는 없다. 질 수 밖에 없는 상황도 있다. 지는 것이 옳을 때도 있다. 이제는 이기는 방법 못지않게 제대로 지는 방법이 필요한 시대다.

환자를 보는 순간 순간마다 ‘권위를 내려놓는 것’, 그리고 사과할 때 ‘정직하게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이 그들을 대하는 자세의 기본임을 기억해야 하겠다.

“공개 사과의 기술”의 3개의 댓글

  1. 공개사과의기술
    정말잘읽어습니다
    저도사과받고싶은의사선생님이있습니다
    고관절수술을잘못해놓고사과한마디없이수술기록전부를챙겨주면서타병원에전화예약까지해주환자로서보호자로서고맙다는말을해야할지화를내야할지아직까지고민하고있습니다
    ㅇ병원정형외과오모교수님사과하십시요

  2. 신승건님
    긍금했고 기다렸습니다~
    사과의 본질이
    “권위를 내려놓는 것” 이라면
    권위있는 자가 망서리는 그것은
    권위 없는자가 무릎 꿇고 빌어서 구해야
    하는 용서보다 얼마나 고급스러운 말인가를
    헤아려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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