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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삶

단순한 삶

여행을 다니다 보면 그곳에 눌러 앉아 계속 살고 싶은 마음이 생길 때가 있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마을을 만나면 그런 마음이 고개를 드는데, 신혼여행으로 다녀온 이탈리아의 아시시Assisi가 나에게는 특히 그러했다.

아시시는 이탈리아 중부의 비옥한 움브리아Umbria 평원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다. 로마에서 기차로 2시간 가량 걸리는 이 곳은 ‘평화의 도시’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실제로 그 이름에 걸맞게 고요함과 여유로움이 감도는 곳이다.

아내와 나는 아시시에 있는 동안 호텔이 아닌 수녀원에 머물렀다. 신혼여행과 수녀원이라는 조합이 어색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덕분에 우리는 다른 여행지에서는 쉽게 느끼기 어려울 소박함에서 오는 감동을 한껏 마음에 담고 돌아올 수 있었다.

아시시에서 맞이한 첫날 아침, 수도사들이 머물기 위해 마련된 방에서 잠을 깬 아내와 나는 벽 한쪽에 난 작은 창문을 열어 젖혔다. 눈 앞에는 넓은 평원 위로 조용한 안개가 나지막이 깔린 풍경이 펼쳐졌다. 그리 크지 않은 뒷마당으로 나가 여유로운 아침 맑은 공기로 가슴을 채우고, 수녀님이 준비해주신 정갈한 빵 몇 개와 커피로 아침 식사를 했다.

길을 나선 아시시는 곳곳마다 흡사 거대한 브로컬리처럼 보이는 풍성한 올리브 나무들이 심어져 있었다. 바닥에는 아스팔트가 아닌 닳고 달아 매끈해진 돌들이 박혀있었다. 그리 넓지 않은 길 양옆으로 수세기는 족히 넘게 한 자리를 지켜왔을 석조 건물들이 사이좋게 늘어서 있었다. 우리가 흔히 유럽의 오래된 도시를 생각하면 떠올리는, 하지만 이제는 다른 유럽에 가도 쉽게 찾아보기 힘든 그런 풍경이었다.

평화롭고 고요한 아시시의 골목을 거닐며, 우리는 그간 일상에서 흐트러졌던 마음의 평안을 얻고 단순한 삶의 가치를 되새겨 보았다. 우리는 오랜 시간 길을 거니는 동안 앞으로 펼쳐질 우리의 삶을 어떻게 채워가면 좋을 지 묻고 답하며 잔잔한 대화를 이어갔다.

아시시를 떠나는 날 아침 우리는 시청 광장을 다시 가보았다. 아시시에서 유일하게 관광객들이 붐비는 장소인 시청 광장은 한낮과는 또 다른 모습으로 우리를 맞이했다. 이른 아침이라 관광객들은 눈에 띄지 않았다. 대신 길바닥을 쓸고 닦는 청소부부터 카페 문을 열기 위해 채비를 하는 점원이 분주히 움직였다. 하루를 맞이하는 사람들 사이로 새로 떠오르는 햇살이 내비쳤다. 떠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아시시는 우리에게 감동을 안겨주었다. 아내와 나는 아시시를 떠나며 결혼 10주년 기념으로 다시 이곳에 오자고 약속했다.

우리가 소설에서 감동을 느끼는 이유는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현실에서 쉽게 경험하기 어려운 섬세하면서도 놀라운 경험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시시에서 내가 느꼈던 것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한다. 나는 그곳에서 우리의 일상에서 이미 자취를 감추어버린 평화로움과 고요함을 느낄 수 있었다.

반면에, 오늘날 우리의 삶은 실로 팍팍해지고 있다. 도시 속 삶에서는 더 이상 인간적인 요소를 찾아보기 힘들다. 학교에서, 직장에서, 가정에서 우리는 인간이 아닌 부수적인 것들에 더 관심을 쏟는다. 우리들이 바로 인간임에도 도시 속 삶에서 인간은 뒷전으로 밀린다.

서로가 대하는 방식도 슬픔을 자아낸다. 타인을 존중하고 신뢰를 느끼는 것에서 오는 기쁨 보다는 서로 경계하고 무시하는 모습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대체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가. 그것이 옳지 못하다는 것을 다들 알고 있지 않은가. 혹시 옳은지 아닌 지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을지 몰라도, 적어도 그런 식의 삶이 힘겹다는 것에는 공감하지 않는가.

그런가 하면 인격이 아닌 권위에 의지해서 다른 이들을 억누르는 행태는 또 어떠한가. 자기 자신도 실천하지 못하는 것을 남에게 강요하는 이들을 우리는 주변에 쉽게 볼 수 있다. 아마 당신도 이 글을 읽으면서 머리 속에 떠오르는 누군가가 있을 것이다.

그들은 뭐든 남들이 자신보다 우월한 것이 있으면 참지 못한다. 결코 남이 옳다는 것을 인정하는 법이 없다. 아마 이 글을 읽으면서 자신은 아니라고 생각하겠지만.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 아닐 수 없다. 그러면서도 남에게 어른으로 존중받기를 원한다니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타인에 대한 이해와 공감의 노력을 접고 오로지 권위로 타인을 억누르려고 하는 이들에게서 나타나는 또 다른 특징이 있다. 사실 그들 자신도 다른 이들에게서 인간적으로 존중 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

그래서일까. 그들은 비싸고 화려한 물건들로 자신들의 존재적 위기감을 가리려고 한다. 그들은 비싼 차를 타고 고급 식당에서 저녁을 먹는 모습을 보여주면 사람들이 저절로 자신을 올려다 볼 것으로 믿는다.

이상한 일이다. 눈길을 끌 요량으로 남들의 마음을 불편케 하는 온갖 행동을 해놓고는, 그렇게 한 결과 남들이 시기하고 무시하면 오히려 불평한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무언가 본질적인, 그러면서도 지금보다는 훨씬 단순했던 원래의 우리 모습을 되찾을 수는 없을까. 그런 질문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고 『단순한 삶 원제 : La vie simple | 샤를 와그너 지음 | 문신원 옮김 | 판미동 | 2016년 05월 26일 출간』이란 책을 펼쳐 들었다.

오늘날 새삼 조명을 받기 시작한 ‘단순한 삶’의 원류가 되는 『단순한 삶』은 무려 100년도 더 전에 쓰여진 고전이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핵심 메세지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프랑스의 개혁 사상에 큰 영향을 미친 샤를 와그너Charles Wagner가 1895년에 쓴 이 책은 그가 아내와 바스티유 빈민가 아파트에서 검소한 생활을 하며 쓴 책이다. ‘존재의 행복과 힘과 아름다움은 단순함의 정신에 그 원천을 두고 있으며, 단순한 삶이 곧 가장 인간적인 삶’이라는 중심 메시지를 담고 있다.

저자는 ‘단순함’이 기술이기에 앞서 마음가짐임을 지적하며 그 본연의 정신에 집중하여 ‘진정한 단순함’이란 무엇인지 차근차근 풀어 나간다. ‘단순함’이란 일종의 정신 상태로, 자신이 원하는 존재 방식에 가장 큰 관심을 기울일 때 가장 단순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일깨운다.

권위, 과시욕 그리고 가족을 소홀히 여기는 삶의 태도는 우리의 삶을 ‘단순함’에서 멀어지게 한다. 저자는 어떻게 하면 이런 것들을 바로잡을 수 있을지 이야기한다. 권위에 대한 욕심, 남에게 자랑하고 싶어하는 과시욕을 다스리고 우리의 삶의 중심을 가족으로 돌려놓는 것, 그것이 ‘단순한 삶’을 향한 첫 걸음이라고 말이다.

단순한_삶

책장을 덮으며 나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았다. 나 스스로는 권위적인 모습은 없었는가. 과시욕을 품지는 않았는가. 창피하지만, 아니라고 답하지 못하겠다. 우선 이 블로그에 담는 글에서 조차 나는 때때로 권위적이고자 노력하였음을 고백한다. 사실 그럴만한 자격이 되지 않음에도 대단한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또는 무의식중에 권위를 내세우곤 했다.

나는 종종 글을 통해서 ‘내가 이런 생각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다. 달리 말해서 지적 과시욕을 극복하지 못했다. 지식이란 것은 남에게 과시하기 위한 장식품이라기 보다는 사회에 변화를 일으킬 수 있도록 주어진 책임과도 같다. 지식이란 갖고 있는 자가 갖지 못한 자를 위해서 베풀어야 하는 사회적 책임이고, 그것은 오로지 가진 사람이 가지지 못한 사람에게 호의적으로 대할 때에만 유익하다. 하지만 나는 내가 그간 책을 통해서 얻은 가벼운 지식과 얕은 생각들 조차도 나 자신을 화려하게 꾸미는데 썼었다. 반성하고 있다.

또한, 내 글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퍼져나가는지에 대해서 신경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 블로그를 소박하게 내 생각을 담는 그릇으로 만들어 가는 것으로 족하면 좋으련만, 나는 내 글을 읽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에 항상 관심을 가져왔다.

초심으로 돌아가 단순해져야겠다. 앞으로는 주제넘게 남을 가르치려 하기 보다는 나 자신을 돌아보기 위해 노력할 생각이다. 더 많은 사람에게 글을 전하기 위해서 머리를 싸매기 보다는, 이미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과 공감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

가족을 향한 마음도 더욱 단단히 해야겠다는 결심을 한다. 밖에서 이름을 알리기 보다는 안에서 가족들의 이름을 불러주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쏟을 것이다. 훗날 내 아이들이 이 글을 읽으면서 “아빠가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 만큼은 제대로 지켰구나.”라고 느꼈으면 좋겠다.

오늘날 아시시가 평화의 도시로 알려지면서 수많은 사람에게 마음의 안식과 영혼의 휴식을 제공할 수 있는 것은 그곳에서 청빈한 삶을 실천한 성 프란치스코San Francesco과 성녀 클라라Santa Clara의 모범적인 삶이 있었기 때문이다.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서 한때 집안의 명예를 드높이고자 전쟁에도 참여하기도 했던 프란치스코는 걸인들의 삶을 목격하고 삶의 목표를 다시 세운다. 세속과 인연을 끊고 소박하고 가난한 삶을 스스로 선택한다.

귀족의 맏딸이었던 클라라도 부유하고 화려한 삶을 스스로 포기한다. 그녀는 프란치스코를 도와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구제하는데 일생을 바친다.

아내와 내가 아시시에서 마음의 평화를 얻고 올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까마득히 오래 전에 세속을 벗어나서 단순한 삶을 선택했던 두 성인의 가르침이 그곳에 깃들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비록 그들처럼 후세에 알려지진 않아도 상관없다. 다만 남에게 과시하거나 보여주기 위해 나의 하나뿐인 삶을 허비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로 인해 남이 힘들어하지 않고, 드러나지 않더라도 남에게 도움이 되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나는 그저 나 자신을 돌아보며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으로 족하다. 그 과정에서 사랑하는 가족들과 행복한 삶을 살다 갈 수 있다면, 나는 정말 그것으로 충분하다.

“단순한 삶”의 10개의 댓글

  1. 정신없이 하루의 계획들을 나열하며 사는 스스로를 돌아보게 합니다.
    그냥 살아도 될 것을ᆢ
    고맙습니다! 좋은 글~^^

  2. 주~욱 내려 읽다가
    한 동안 머~엉했습니다
    지나간 분주했던 날
    꼭 그리했어야 했는지 되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3. 이십대때 절에서 살았던 단순한 일상이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해주었습니다 ᆞ다시
    사회로 나와서 적응이 힘들더군요 ᆞ그 시절이 행복한 일상이었던걸 다시 느끼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글 종종 보러 오게습니다

  4. 나로 인해 남이 힘들어하지 않고, 드러나지 않더라도 남에게 도움이 되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저의 삶을 한마디로 요약한 내용같아 기쁨니다.
    좋은 글 항상 잘 읽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5. 단순한 삶은 읽어야 할 책 목록에..
    아시시는 가볼 여행지 목록에..
    기록해두었습니다.

    집 안 가득 넘쳐나는 짐들로 헉헉대는 요즘,
    저희 부부에게도 단순한 삶은 화두로 다가오네요.

  6. 좋은 책소개 그리고 사유,자기반성이 묻어나는 향기읽는 글
    깔금하고 정갈한 아침으로 출발하게 되어 감사드립니다.

  7. 제 안에 권위의식으로 가득차 있는 모습을 다시 한번 상기키면서 반성하게 됩니다. 아시시 단순히 성인과 수도원으로만 알고 있었네요. ㅋㅋ 무지함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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