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의학의 거의 모든 역사

현대의학의 거의 모든 역사시간이 지나야만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현재의 시점으로 과거를 바라보면 너무도 뚜렷하게 ‘보이는 것들’이지만, 그때 당시에는 그렇지 못한 일들도 있다. 마찬가지로, 지금은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들이지만, 시간이 흘러 지금을 되돌아볼 때 안타깝게 ‘보이는 것들’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시간이 지나야만 비로소 보이는 것들’의 집합이 바로 역사이다.

역사에 대해 내 나름대로 어설프게 정의해 보았지만, 이는 현대의학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당시에는 무심코 지나쳤거나 그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했던 발견들이 의학의 역사에도 드물지 않다. 당시에는 빛을 보지 못한 발견에서 얻게 된 지식들이 훗날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살리는 토대가 되었다. 그 과정에서 여러 연구자들의 시행착오가 있었고 숱한 희생이 있었다.

그 결과로 도달한 오늘날의 의학, 즉 현대의학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그리고 현대 의학은 어떻게 현재의 모습에 이르게 되었을까. 지금 우리가 누리는 현대 의학은 실제로 어느 정도 발전한 것이며 앞으로도 더 발전할 수 있을까. 현대의학이 이룩한 찬란한 위업에 넋을 잃고 있는 동안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없는 것일까. 여러 질문들을 마주하게 된다. 이런 질문이 가볍지 않은 이유는 의학이 우리의 생로병사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의학만큼 사람들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분야도 없기 때문에, 서점에 가면 의학을 주제로 다루는 교양 서적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현재 우리 삶의 방식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현대의학의 역사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책은 흔치 않다. 그런 점에서 제임스 르 파누James Le Fanu의 <현대의학의 거의 모든 역사 원제 : The Rise & Fall of Modern Medicine | 제임스 르 파누 지음 | 강병철 옮김 | 알마 | 2016년 02월 03일 출간>는 기존의 의학 교양 서적들 사이에서 단연 돋보인다.

저자는 1950년대를 기점으로 의학의 중요한 진전들이 이루어졌음에 주목하여 이 시기를 현대의학의 시작점으로 정의한다. 그 기준으로 저자는 현대의학의 12가지 결정적 사건 추리고 이를 집중적으로 살펴본다. 페니실린과 스테로이드의 발견, 인공관절과 인공호흡기의 개발, 개심술과 신장이식술, 소아암의 정복 등에 이르기까지 최근 반세기 동안의 현대의학의 발전을 왠만한 소설 이상의 흥미진진한 전개로 소개한다.

1950년대부터 시작하여 20여 년간 이어진 혁신적인 의학 발전의 시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대부분의 발전이 우연한 기회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달리 말하면 질병 치료의 방법을 알게 된 것이 인간의 능력이라기보다는 운에 가깝다는 것이다. 또한 그 운을 통해서 얻은 방법 자체도 사람이 손수 만든 것이 아니라 자연의 부산물들이다. 항생제, 스테로이드를 비롯한 우리가 알고 있는 거의 대부분의 약들이 그러하다. 이를 통해서 우리가 말하는 현대의학이라는 것이 사실은 인간의 능력보다는 운과 자연의 부산물을 통해 이루어진 것임을 깨닫게 된다.

저자는 12가지 결정적 사건을 중심으로 현대의학이 혁신적인 발전 단계를 거친 후, 1970년대부터는 발전의 동력을 잃고 정체하기 시작하였음을 지적한다. 이러한 정체의 원인을 진단하는데 ‘임상 과학’, ‘사회 이론’, ‘신유전학’, ‘다국적 제약회사’로 그 이유를 크게 나누어 설명한다. 하나하나 간략히 짚고 넘어가보자.

먼저 저자는 의사와 과학자들의 지적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 ‘임상 과학’의 실상을 진단한다. 말할 것도 없이 의학의 궁극적인 목적은 사람을 치료하는 것이다. 하지만 연구라는 미명하에 질병의 치료와는 무관한 연구들이 숱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이는 환자를 인간으로 보지 않고 질병이 담긴 그릇으로만 여기는 의학 연구자들의 잘못된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환자는 지적 탐구의 대상일 뿐이다. 이런 연구자들의 태도는 환자의 치료가 본질인 의학의 존재 이유를 왜곡시킨다.

이어서 대중은 물론 의료인까지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고 있는 ‘사회 이론’을 살펴본다. ‘사회 이론’이란 말이 바로 와닿지 않을 수 있는데, 쉽게 말하면 식단과 생활 방식을 개선함으로써 질병을 예방할 수 있다는 주장들이 이에 포함된다. 아마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여전히 식단과 생활 방식을 개선하는 것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의아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널리 알려진 방법들 가운데 다수가 실제로 과학적으로 검증된 것이 아니고 통계에 의한 궤변과 역학 전문가와 같은 일부 이해 집단의 목적에 맞게 변질된 것이다. 이로 인해서 사람들은 불필요하게 건강 염려증을 겪고 있으며 이에 수반된 과도한 지출도 따르게 된다.

저자는 ‘사회 이론’과 비슷한 시기에 대두하여 모든 질병의 해결책이 될 것처럼 떠오른 ‘신유전학’의 허와 실에 대해서도 살펴본다. 신유전학은 유전자를 기반으로 한 진단이나 치료 그리고 예방을 아우르는 분야를 말하는데, 저자는 신유전학에서 기대할 수 있는 효과가 실제보다 과장되었다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막강한 자본력을 앞세워 정부와 의료인을 매수하고 대중을 기만하는 다국적 제약회사들의 실상을 비판한다. 가장 흔한 사례가 학계에 있는 연구자들이 제약회사의 자본에 굴복하여 지식인으로서의 양심과 자존심을 저버리는 현상이다. 이 부분은 조금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제약회사가 제공하는 연구비는 관련 분야의 대학교나 연구소의 중요한 자금줄이다. 그렇기 때문에 연구자들은 의도적이거나 비의도적으로 제약회사의 이익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연구를 진행하게 된다. 그러다보니 연구 결과가 제약회사의 이익에 반하는 경우 은폐하거나 제약회사의 이익에 부합하는 결과만 부각하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난다. 그 결과 제약회사는 더 큰 돈을 벌게 되고 그 돈으로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며 연구 환경을 왜곡시키는 악순환이 이어진다. 이는 결국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무익한 약에 치료 효과를 기대케 하는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저자는 그 결과로 현대의학이 4가지 모순에 빠지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많은 의사들이 자신의 직업에 회의감을 느끼고 있으며, 대중은 점점 더 자신의 건강을 걱정하고 있고, 정규 의학을 벗어난 대체의학의 인기가 커지고 있으며, 국가적인 의료비의 지출이 점차 치솟고 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현대의학의_거의_모든_역사현대의학이 지난 반세기 동안 지나온 길을 돌아보고 그 과정에서 생긴 여러 문제점들을 살펴보며 내가 내린 결론은 ‘의학의 중심에 다시 인간을’ 돌려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환자를 연구 목적으로만 여기는 ‘임상 의학’의 추세나, 과학적 검증 없이 사이비 주장으로 일관하는 ‘사회 이론’, 아직 갈 길이 먼 ‘신유전학’ 그리고 자본의 논리로 생명을 위협하는 ‘다국적 제약회사’는 모두 사람의 생명보다 자신의 이해관계를 중심에 두는 현대의학의 어두운 면들이다.

비록 저자는 이 책의 중심 주제로 삼지는 않았지만, 나는 의학 발전의 주인공으로 역사에 이름이 남은 과학자와 의사들 뒤에 이름 없이 사라져간 수많은 귀중한 생명들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의학 기술은 그들의 희생이 아니었다면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한편, 인간은 의학기술의 도약을 돌아보며 스스로를 대단하다고 여기지만 그 도약의 순간에는 우연한 계기가 작용한 일이 적잖았다. 아니, 저자가 살펴본 바에 따르면 거의 대부분이었다. 대표적으로 현대의학의 첫 장을 연 페니실린의 발견도 아주 우연한 기회가 맞물려서 가능한 일이었다. 우리는 스스로를 대단하게 여기지만, 우리가 이루어냈다고 생각하는 많은 지식과 결과물이 실제로는 온전히 우리의 힘으로 이루어낸 것이 아닌 것이다. 우리는 ‘알고 있는 것’에 대해 겸손한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반면에 ‘알지 못하는 것’을 이용하는 것의 잠재적 위험성도 잊지 말아야 한다. 현대의학이 대단했던 발전의 역사를 뒤로하고 오늘날 혼돈스러운 시기를 맞이하고 있는 이유는 우리 인류가 ‘알지 못하는’ 영역에 크게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에 따르면 우리가 쓰는 약의 대부분은 아직까지도 그 효과가 발생되는 원리가 밝혀지지 않았다. 좋은 효과가 있다면 왜 그런지도 모르면서 쓰는 것이다. 따라서 어느 순간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을 때 더 큰 혼돈에 직면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

‘알지 못하는 것’의 위험성은 현대의학이라는 주제를 넘어서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특히 인공지능으로 더 편리한 세상이 펼쳐질 것이라는 기대가 충만한 현시점에서 진지하게 생각해볼 문제이다. 앞으로 사람들은 인공지능을 활용하면서 점차 스스로 더 똑똑해졌다는 환상에 빠지게 될 것이다. 데이터가 제시해주는 답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며 스스로 현명해졌다고 여기는 일도 벌어질 것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공지능이 자의식을 획득하여 인류의 통제를 벗어나는 공상과학적 상상이 아니다. 인공지능이 지금처럼 우리의 통제하에 있으면서 편리하게 그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상황을 말하는 것이다. 한동안 인간은 인공지능으로부터 얻은 답을 인간 자신의 능력의 확장으로 여길 것이다. 하지만 인공지능이 내어준 답에 대해서 우리가 그 알고리즘을 이해할 수 없게 된 순간부터 당혹스러운 실상이 드러나며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될 것이다. 우리가 현대의학의 발전을 견인한 다양한 약들 거의 대부분에 관하여 아직도 그 작용 원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처럼 말이다.

역사를 다루는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 종종 느끼지만, 지금의 기준으로 옳고 그름을 확정적으로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는 배움을 얻게 된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도 중요한 깨달음이다. 현재의 진실이 훗날 돌아보면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과거의 실수를 현재에 반복하지 않도록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는 것, 그 두 가지가 바로 역사를 공부하는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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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0월 20일 오전 7시에 공개됩니다.)

“현대의학의 거의 모든 역사”에 대한 6개의 생각

  1. 의학분야는 낯선분야이고
    더구나 의사가 아니면
    감히 가까이 할수없는데
    솔직한 글에 감사드립니다…^^

  2. 안녕하세요? 처음으로 글 남깁니다. 역사의 정의가 인상깊습니다. ‘임상과학’ 에 종사하며, ‘사회이론’을 이용하고, ‘다국적 제약회사’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는 분위기에 살고 있습니다. 겸손과 성찰이 필요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1. 전문가에게는 사람들의 존중에 따르는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중에게 올바른 시각을 제시할 수 있는 식견이 그 의무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담아낼 수 있는 겸손의 자세가 전문가가 갖추어야 할 덕목이 아닐까 합니다. 귀한 의견 감사드리고 앞으로도 많은 조언 부탁드립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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