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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죽을 것인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

1999년 겨울, 나의 아버지는 이제 막 대학생이 된 아들에게 전부터 보여주고 싶던 것이 있었다. 바로 반평생을 은행원으로 일하며 삶의 터전으로 살아온 서울의 도심이었다. 우리는 하루 날을 잡고 아침 일찍부터 대중교통을 이용해 광화문으로 향했다.

그날 우리는 둘이서 교보문고에서 책도 좀 보고 시청 근처에 있는 화교가 하는 중국집에 가서 점심도 먹었다. 아버지가 자주 가는 곳이라고 하였다. 그 중국집에서 점심을 먹고 우리는 서울역으로 향했다. 쌀쌀한 날씨의 서울역 광장에 도착하니 내가 전에 본 적 없는 이질적인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그곳은 세기말의 흥분과 바로 몇 해 전 우리나라를 휩쓴 IMF 사태로 억눌린 분위기가 서로 뒤엉켜 있었다. 눈에 잘 띄는 곳에서는 교회에서 나온 이들이 확성기가 터질 정도로 목청을 높이고 있었고, 눈에 잘 안 띄는 곳에서는 얼마 전까지 누군가의 가족이었을 사람들이 모든 것을 잃고 삼삼오오 모여서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또 다른 몇몇 무리의 노숙자는 헌혈을 마치고 얻은 것으로 보이는 빵과 우유로 끼니를 때우고 있었다. 나는 그런 광경을 난생처음 봤기에 빵과 우유를 허겁지겁 입에 밀어 넣기에 바쁜 노숙자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눈길이 갔다. 그런 모습을 본 아버지가 내게 조용히 물었다.

“저 사람들이 불쌍해 보이냐.”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아버지는 무덤덤하게 말을 이어갔다.

“저 사람들이 배고파서 헌혈한 피가 네 생명을 구할 수도 있음을 잊지 마라.”

나는 이 말을 듣고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노숙자들 달리 말해 내가 배려해야 할 대상이라고 여긴 소위 사회적 약자들이 어쩌면 나의 생명을 살리는 이들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날 아버지의 한마디는 앞으로 내가 업으로 삼게 될 의료라는 것에 대한 관점을 처음부터 다시 정의하게 하였다.

나는 적어도 그때까지만 해도, 언젠가 의사가 되어 내가 배운 지식과 기술을 남에게 베푸는 것이 앞으로의 내게 주어진 소임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세상의 존중과 대우가 내심 기대되기도 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이 한마디는 우리가 모두 결국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있고 서로가 서로에게 빚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 많이 배운 사람이 위에 있는 것이 아니고, 가난한 사람도 아래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경쟁 위주의 입시 제도를 막 빠져나온 당시의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그것을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나는 외과 의사로 살아가고 있다. 내가 일하고 있는 곳은 공공 병원이기 때문에 이곳에 오는 환자들 가운데는 노숙자와 가난한 이들이 다른 병원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더 많다. 공공 병원은 민간 병원이 외면하는 이들을 지켜주는 최후의 보루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사회적 약자들의 경우 안타깝게도 가정이 무너지고 어디 하나 기댈 이웃조차 없어서 홀로 질병과 싸워야 하는 경우도 흔하다. 이곳에 오는 환자들에게 더 많은 관심과 배려가 필요한 이유이다.

한편, 내가 일하고 있는 외과에서는 주로 생명과 직접 연관되는 영역을 다루다 보니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이 생기기도 한다. 바로 환자들이 병원에서 삶을 마감하게 되는 경우가 그렇다. 외과 의사로서 사람을 살릴 수 있는 기쁨의 반대편에는 사람의 삶의 마지막을 지켜야 하는 슬픔이 자리 잡고 있다.

그 과정에서 나는 삶의 마지막이 유독 외로운 이들을 종종 지켜본다. 수십 년의 인생을 마감하는 때에 친구는커녕 가족조차 얼굴을 내비치지 않는 경우가 그러하다. 삶의 마지막 단계에 접어드는 순간 “연락할 사람이 없다.”는 환자의 말 만큼 잔인한 것이 없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의사로서 내 역할의 한계를 절감한다. ‘과연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인가’, ‘내 앞에 있는 이 환자가 죽음을 피할 수 없다면, 더 나은 죽음을 맞이하게 할 수는 없는가’, ‘그렇다면 과연 더 나은 죽음이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의문들이 마음 한구석에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누구도 찾지 않는 환자들이 더욱 안타까움을 느끼게 하는 것은, 지금까지 살아온 짧은 생애 중 겪었던 두 번의 중요한 가족의 임종과 이루는 극명한 대조 때문인지 모르겠다. 나는 10대 후반에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고 30대 초반에 외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두 분 모두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화로운 마지막을 맞이했다고 생각한다.

나의 할머니는 내가 중학교 3학년 때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내가 태어나기 직전 할아버지는 먼저 세상을 떠났고 그 이후로 할머니는 큰아들 집인 우리 집에서 함께 지냈다. 집에는 항상 할머니의 방이 있었다. 할머니는 위암을 진단받은 후에도 병원에 입원하거나 요양시설을 택하지 않고 우리 집에서 임종 때까지 함께 지냈다. 큰며느리인 나의 어머니는 할머니를 위해서 호스피스hospice 교육을 받았고, 가족 모두는 할머니가 암과 투병하는 동안 최대한 평화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노력했다. 마지막 날 할머니는 자신의 방에서 여러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눈을 감았다.

한편, 나의 외할아버지는 전립선암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외할머니와 단둘이 원래 살던 집에서 계속 함께 지냈다. 암 진단 후 집에서 멀지 않은 종합병원에 통원치료하러 다녔는데, 상태가 악화된 후 몇 번의 반복되는 입원을 거쳤다. 그러다가 입원 후 더는 집에 돌아가기 어려운 순간이 찾아왔다. 마지막 순간이 머지않았음을 느낀 가족들은 다 같이 며칠째 병원에서 외할아버지 곁을 지켰다. 진통제로도 통증이 가시질 않아 힘들어할 때는 가족들이 옆에서 계속 손을 잡으며 대화를 이어갔다. 마지막 순간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눈을 감았다.

두 분 모두 마지막 순간에 기계 호흡이나 심장 압박과 같은 생명 연장을 위한 물리적 조처는 취하지 않았고, 암에서 오는 통증을 줄이기 위해서 진통제만 사용했다. 또한, 두 분 모두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 자리에 있던 이들 모두가 곧 마지막 순간이 올 것임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고, 그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하였다. 돌이킬 수 없는 시간에 대한 아쉬움이 감당하기 쉽지 않았지만, 떠나는 분이 평화로운 가운데 삶을 마무리할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했다.

할머니와 외할아버지의 죽음을 앞두고 우리 가족은 많은 대화를 나누었고 여건이 허락하는 한 최대한 곁을 지켰다. 그리고 무엇보다 삶의 마지막을 앞둔 본인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귀를 기울였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이별의 순간을 차분한 가운데 지나올 수 있었다.

이런 나의 경험은 내가 의사를 업으로 삼은 후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다. 나는 ‘삶의 마지막 단계에 이른 이들이 어떻게 하면 인간다운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하는가’라는 질문을 마음속에 품게 되었다.

아직 그 답을 알지 못하지만, 이번에 접한 『어떻게 죽을 것인가 원제 : Being Mortal | 아툴 가완디 지음 | 김희정 옮김 | 부키 | 2015년 05월 29일 출간』는 내가 답을 향해 한 걸음 더 내딛도록 도와주었다. 그 자신이 외과 의사이기도 한 저자 아툴 가완디Atul Gawande는 책에서 의사의 역할을 다시 정의한다. 지금까지 의사들이 일방적으로 치료 방침을 제시하던 모습에서 탈피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대신 삶의 마지막 단계를 환자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안내자의 역할을 터득해야 한다고 말한다.

죽음

내가 의사로서 항상 아쉽게 생각하는 것도 그렇다. 우리 의사들은 기본적으로 환자의 생명을 최대한 연장하는 것을 소임으로 생각한다. 그 결과 생명의 연장이 가져올 고통과 부담이 환자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고려를 놓치는 경향이 있다. 때로는 환자가 고통 속에 힘든 삶을 이어가기 보다 스스로의 존엄성을 지키며 조용히 생을 마감하는 길을 택하길 원할 수 있다.

한편, 저자는 언젠가 죽음을 맞이하게 될 우리 모두에게도 메시지를 전한다. 생명 연장 자체에 대한 집착보다 자신에게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돌아보라고 말한다. 의사가 먼저 물어보기 전에 말이다. 무의미하고 고통스러운 연명 치료에 매달리는 상황이 오기 전에 삶의 마지막 순간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돌아보라는 것이다.

나는 이 책을 통해서 나름대로 느낀 바를 두 가지로 압축하고 싶다. 이 두 가지는 각각 가족적인 차원과 사회적인 차원에 해당하는 것이다.

우선 가족적인 차원에서 살펴보자. 죽음을 앞둔 이와 떠나보내는 이들 가운데 충분한 대화가 있어야 한다. 죽음을 앞둔 이가 어떻게 삶을 마감하고 싶은지 평상시에 이야기하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저자에 따르면 죽음을 앞두고 이에 대한 진솔한 대화를 나누는 것은 대화하지 않았을 때 놓칠 수 있는 많은 것들을 발견할 수 있게 해준다고 한다.

앞서도 말했지만, 의사들은 환자들의 생명 연장을 최우선 목표로 삼다 보니 환자를 고통으로 이끌 수 있는 치료를 권할 수도 있다. 그런 고통을 감내할지 아니면 고통 없이 조금 더 인간적인 죽음을 맞이할지 가족 간의 진솔한 대화를 통해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한편에서 사회적인 차원을 살펴보자.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누구도 삶의 마지막이 외롭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존엄성에 관한 문제이다. 인간답게 살아가는 것이 중요한 것처럼 인간답게 죽을 수 있는 것도 중요하다. 앞서 노숙자들의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이런 사회적인 차원에서 임종을 준비하는 것의 중요성을 되새기고 싶은 뜻이 있었다.

이 사람들도 우리와 같이 소중한 삶을 살다가는 사람들이란 점을 기억하자. 지금은 허름한 행색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내가 17년 전 아버지와의 대화를 통해 깨달은 바처럼, 우리는 결국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어 살다가는 존재들이란 점을 기억하자. 그들의 삶도 우리의 삶과 같이 소중하다는 점을 잊지 말자. 그리하여 우리가 인간적인 죽음을 중요하게 여기는 만큼 그들의 죽음도 인간적일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에서 의사들의 각성과 변화가 무엇보다 시급하다. 오로지 생명 연장에만 전념하고 각자의 전문 분야에만 머물러도 되던 상황과 비교해서 환자가 진정으로 바라는 바를 세심하게 챙기는 일은 의사들에게도 쉽지 않은 과정으로 다가올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힘든들 가족을 떠나보내는 이들의 마음만 할까. 자신의 삶이 거의 끝나감을 느끼는 본인만 할까. 그것은 의사가 전문가적 양심을 걸고 마땅히 감내해야 할 과제이다.

요컨대, 우리는 삶의 마지막 순간에 대해 서로 간에 진솔한 대화와 교감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가 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가족이 없거나 가진 것이 없더라도 인간적인 존엄성을 지키며 삶을 마무리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가야 할 것이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의 5개의 댓글

  1. 너무나 반가운 글귀가 눈에 들어옵니다.
    ‘생명의 연장이 가져올 고통과 부담이 환자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고려를 놓치는 경향’
    다양한 영역에서 전문가로 계시는 분들이 볼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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