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아이처럼

프랑스 아이처럼자녀 교육에서 ‘절제와 자유’가 균형을 이루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그것이 생각만큼 잘 지켜지지 않고 있다. 최근에 접한 웃기면서도 슬픈 이야기를 하나 소개한다.

어느 휴일의 사람이 붐비는 백화점, 저 멀리서 후드티를 입은 7살 정도나 될 법한 남자 아이가 비행기 소리를 내며 돌진해 오고 있었다. 사람이 많은 곳에서 아이가 뛰어다니는데도 부모는 뭐하고 있나 의문이 들던 순간, 결국 사고가 터지고 말았다. 아이가 반대편에서 곱게 차려입고 걸어오던 할머니를 그대로 들이받은 것이다.

그 할머니는 짧게 “악!” 하는 소리를 내며 뒤로 넘어졌다. 아이는 잠시 뒤로 주춤하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 그대로 서있었고, 할머니는 잠시 후 몸을 추스리고 바닥에 부딪힌 엉덩이를 어루만지며 천천히 일어나려고 했다. 할머니는 자세를 가다듬고 헛기침을 몇 번 하였다. 자기 앞에 서 있는 아이에게 조심하며 다니라고 주의를 주려던 참이었다.

그때였다. 잠시 전까지는 안보이던 아이 엄마가 나타났다. 그러더니 방금 일어나서 옷매무새를 다듬는 할머니를 슬쩍 쳐다보고 바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자기 아이가 다친 데가 없는지 살펴보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다음 곧장 그 자리를 떠나려고 했다. 그 모습을 보던 할머니는 차분함을 잃지 않고 아이 엄마에게 한마디 하였다.

“아니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아이를 뛰어다니게 두면 어떻게 합니까.”

이 때 그 아이 엄마는 정중히 사과를 했어야 했다. 그런데 이어서 아이 엄마가 한 말이 가관이었다.

“아이가 그럴 수도 있지요.”

할머니가 얼마나 황당했을까. 여기서 이 이야기의 끝이 아니다. 그랬다면 굳이 여기서 소개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 품위 있는 할머니의 예상치 못한 반격으로 이 상황은 반전을 일으킨다.

그 할머니는 아이 엄마에게 화내기는 커녕 조금도 흥분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개를 끄덕거리며 아이 엄마를 향해 이렇게 말하였다.

“맞아요. 아이가 그럴 수도 있지요. 그런데 너가 이러면 안 돼지…”

당신은 이 이야기를 듣고 어떤 느낌이 드는가. 적지 않은 사람들이 할머니의 행동에 공감할 것 같다. 당신도 백화점이나 길거리, 아니면 엘리베이터나 아파트에서 제멋대로 구는 아이들과 이를 방치하는 부모들 때문에 불쾌했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직접 겪지는 않았을지라도 주위 사람들과의 대화 도중에 비슷한 일을 화제로 삼은 적은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가정 교육에서 절제와 자유를 잃어버린 문제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먼저, 절제되지 못한 가정 교육을 살펴보자. 부모들은 아이들이 원한다면 뭐든지 해주려고 한다. 이유가 무엇이건 자기 아이가 남에게서 안 좋은 소리를 듣는 것은 보지 못한다. 심지어 그 아이가 주위에 어떤 피해를 입히더라도 이에 대해서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아이의 기분이 상하지 않는 것이 지상 최대의 목표인 듯 아이를 키운다.

자기 아이만을 위하는 부모들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면, 하나같이 ‘자기 아이들이 기죽지 않게 하고 싶어서’라고 답한다. 그런데 나의 생각에는 그런 부모들이 조금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자기 아이가 기죽지 않는 것보다 부모 스스로가 기죽지 않는 것이 그들이 진짜로 바라는 것에 더 가깝다고 본다.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무분별하게 다 들어주는 것으로 부모로서의 역할을 훌륭하게 해내고 있다고 자평하고, 자신의 부모로서의 자존심을 지키고 싶어하는 것이다.

부모가 아이를 통해서 본인의 자존심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있으니 두번째 문제도 발생한다. 부모들의 자존심 충족을 위해 욕구를 절제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아이들이, 한편에서는 같은 이유로 자유롭지 못한 상황에 처해있다. 초등학교를 들어가기 전부터 시작되는 선행 학습 때문에 아이들은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스스로 고민해 볼 시간조차 갖지 못한다. 영어 선행 학습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이러한 선행 학습은 아이들에게 득보다는 실이 크다. 글을 잘 쓰기로 유명한 유시민도 자신의 저서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 유시민 지음 | 생각의길 | 2015년 04월 10일 출간>에서 영어 선행 학습보다 모국어를 잘하는 것이 아이의 발달에 중요하다고 강조한 바 있다. 아이에게 해가 되는 일로 아이들의 자유마저 박탈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를 통해서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고 싶어하는 부모들에게는 이런 말이 통하지 않는다. 그들은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자기 아이가 친척들 앞에서 유창한, 아니 유창한 것 같은 영어를 외워서 말하는 것이 본인들이 택한 ‘앞서가는 육아의 승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 아이들의 머리 속에서 어떤 혼란과 파괴적인 스트레스가 일어나고 있는지 관심조차 없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일까. 그 문제의 근원을 거슬러 가다 보면 한 가정에 아이들의 숫자가 적어진 현상도 일부 원인일 수 있을 것이다. 더 적은 아이들을 키우고 그만큼 아이 하나 하나에게 더 관심과 정성을 기울이는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큰 문제는 거듭 강조하지만 부모들이 스스로의 자존심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다. 그리고 이것은 심지어 자기 아이보다도 자신을 앞세우는 이기심이다. 그 이기심이 너무 큰 나머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아이들의 미래를 희생해서 부모 자신의 자존심을 채우도록 한다.

이 글의 맨 처음 나왔던 이야기도 이제 설명이 된다. 자기 아이의 잘못을 인정해버리면 육아를 책임진 자신의 자존심이 상처받기 때문에, 자기 아이가 백화점에서 애꿎은 할머니를 넘어뜨려도 ‘그럴 수 있는 일’로 치부해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할머니의 대응이 정곡을 찌른 이유는 바로 육아를 책임진 부모의 잘못을 드러낸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우리나라 아이들이 절제와 자유를 잃어버리게 된 것은 이기적인 부모들이 자초한 면이 크다.

그런데 이런 육아라는 과제가 이제 나에게도 아주 중요한 일이 되었다. 몇 주 뒤면 나도 아빠가 된다. 나는 우리 부부에게 찾아온 소중한 생명을 기다리며 하루 하루 꿈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지금까지는 먼 발치서 지켜보던 일들이 이제 눈앞의 현실이 되었다. 사랑스런 아기와 만날 때까지 내게 주어진 시간을 마냥 즐겁게 보낼 수 만도 없는 것은 아빠로서 아이를 잘 키워내야 할 책임이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사실 결혼 후 나와 아내는 틈틈히 육아를 대비하며 나름대로 준비를 해왔다. 특히 EBS에서 제공하는 육아 프로그램들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다. 관련 책들도 찾아서 함께 읽고 느낌을 나누며 부모가 되어가는 방법을 하나하나 배워가고 있다.

일련의 공부를 통해서 아이들의 학습 능력 향상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쉬움은 가시지 않았다. 진짜 중요한 ‘삶에 대한 태도에 대해 영감을 주는 것’은 찾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오래도록 고민해 본 바 그 삶의 태도라는 것이 ‘절제와 자유의 균형’에 다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던 중 아내가 발견해서 함께 읽자고 알려준 책이 <프랑스 아이처럼 원제 : Bringing Up Bebe | 파멜라 드러커맨 지음 | 이주혜 옮김 | 북하이브 | 2013년 03월 20일 출간>이다. 내가 프랑스라는 나라에 갖고 있는 선입견 때문인지 처음 책을 접했을 때 ‘과연 우리나라 정서에 맞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당시 다른 책들을 읽고 있었기에, 이 책을 빌려둔 후 며칠을 전자 도서관에 다운로드만 받아 놓은 상태로 두었다.

그러다가 문득 ‘이제 곧 아빠가 되는데 육아 서적보다 무슨 책이 더 중요하다는 말인가’라는 반성을 하였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더 육아 지식을 넓히고 싶은 마음을 갖고 서둘러 이 책을 펼쳤다. 즉 나의 시급한 현실의 필요 때문에 이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이다.

먼저 밝혀두고 싶은 것은, 나는 책을 읽고 나의 관점에서 느낀 점을 나누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것이다. 여기에 언급하는 내용들은 이 책의 체계적인 요약 정리가 아니다. 책 내용을 온전히 알고 싶은 사람은 꼭 책을 읽어볼 것을 권한다. 아이를 키우거나 키울 예정인 이들에게 충분히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다.

나만의 관점으로 이 책의 중요한 내용을 추려보자면 크게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참을성, 상호 존중, 독립심이다.

첫째로, 저자는 참을성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아이가 원하는 것이 있을지라도 욕구를 스스로 조절할 줄 아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고 강조한다. 저자는 기다림의 훈련을 대표하는 단어로 “기다려라!”는 뜻을 가진 프랑스 말 “아탕attend!”을 소개한다. 프랑스 부모들은 아이들이 무엇을 해달라고 할 때 수시로 이 말을 사용한다고 한다. 그렇게 기다리는 순간 순간 아이들의 참을성이 길러진다.

참을성의 중요성은 마시멜로 실험marshmallow experiment이라는 유명한 연구를 통해서 이미 밝혀진 바가 있다. 이 실험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실험은 실험자가 아이들에게 마시멜로가 담긴 접시를 앞에 놓아주고 자리를 비우는 것으로 시작한다. 자리를 비울 때 실험자는 몇 분 뒤 자리에 돌아올 때까지 마시멜로를 먹지 않고 참는 아이들에게 마시멜로를 하나 더 주기로 약속한다. 실험자가 돌아왔을 때, 마시멜로를 먹지 않고 기다린 아이와, 그 사이를 못 참고 먹어버린 아이로 나눈다.

원래 실험은 여기까지가 끝이었다. 그런데 마시멜로를 먹지 않고 참은 아이들과 그렇지 못한 아이들이 성인이 된 후 그들의 성장 과정을 우연히 추적하였다고 한다. 그랬더니 마시멜로를 먹지 않고 참은 아이들이 대학 입학 성적을 비롯해 더 큰 사회적 성취를 이룬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이 후속 연구가 전하고자 하는 바는 참을 줄 아는 아이의 사회적 성취가 더 크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마시멜로를 먹지 않고 참았던 아이들은 실험자의 약속을 믿고 기다린 것이다. 다른 사람을 신뢰할 줄 아는 아이라는 말이다. 그런 신뢰가 몸에 밴 아이들은 부모의 지도를 믿고 따를 것이다. 탈선이나 방황하지 않고 올바로 성장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즉 그 참을성의 뿌리에는 부모에 대한 신뢰가 있다는 것이다. 부모를 신뢰할 수 있기 때문에 기다릴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시멜로 실험에 대한 반론도 존재한다. 타인에게 무조건 신뢰를 주는 것이 과연 바람직하겠냐는 의견이다. 오히려 타인의 제안과 의견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생각하고 때로는 믿지 않는 것이 더 바람직한 것일 수도 있다. 나도 그런 면에서 마시멜로 실험에 대한 해석이 타인에 대한 신뢰에 대한 긍정적인 관점에 적잖이 치우쳐져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을성이 타인에 대한 신뢰로부터 온다는 주장이 타당하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타인에 대한 신뢰가 바람직한가 아닌가는 별개의 문제이지만 말이다. 그 타인을 부모로 한정한다면, 아이가 부모를 신뢰하는 것은 탈선과 방황을 막고 착실히 미래를 준비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에도 크게 반박하기 어렵다.

여기에서 한 단계 더 나가보자. 부모를 신뢰하게 만든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아닌 부모의 신뢰할만한 말과 행동이다. 자신들에게 했던 작은 약속도 칼같이 지키는 부모의 모습을 보고 아이는 믿고 따라도 되겠다는 신뢰를 가지게 된다. 이를테면, 다음 주말에 놀이 공원을 가자고 약속했을 때 어떤 일이 있어도 그 약속을 지키는 부모는 아이로부터 신뢰를 얻을 수 있다. 그 신뢰는 곧 부모의 말이 이루어질 때까지 믿고 기다리는 아이의 참을성의 뿌리가 되는 것이다.

저자는 이 실험을 창안하고 연구를 주도한 월터 미셸Walter Mischel 교수를 직접 만나서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마시멜로 실험을 넘어서 더 깊이 있는 대화를 이어간다.

둘째로, 상호 존중의 중요성이다. 저자는 아이가 인사 하는 습관을 갖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다른 사람의 집을 방문했을 때 반드시 인사를 해야 하며 이것은 단순히 예의의 차원이 아니라 상호 존중의 의미가 있다고 주장한다. 인사는 상대방을 존중하는 동시에 스스로가 존중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나에게도 성장 과정에서 인사 습관에 관한 뿌리 깊은 기억이 있다. 나는 중학교 이후로 대학에 입학할 때 까지 이모부에게 영어를 배웠다. 하지만 내가 이모부로부터 배운 것은 영어 뿐이 아니었다. 이모부는 스파르타식 훈육법으로 나에게 삶의 자세, 형제간 우애, 그리고 부모님에 대한 고마움 같은 것들을 집중적으로 가르치셨다.

영어 단어를 외우지 못하거나 성적이 좋지 않은 것으로는 그때마다 지적은 받았을지언정 크게 혼난 적은 없었다. 하지만 동생과 싸우거나 부모님 마음에 상처를 주는 행동을 할 때는 눈물이 쏙 빠질 정도로 처절하게 혼났다. 뿐만 아니라 이모부는 공부 이상으로 체력 단련을 중요시 여기는 분이었다. 땡볕에서 50 km 이상을 걷기도 했으며, 소나기 오는 날 운동장에 나가서 질퍽한 바닥을 기어가며 체력 훈련을 받기도 했었다.

부모님으로부터 나와 내 동생을 지도해주시기를 부탁받고 그렇게 하기로 결정하신 순간부터 이모부는 결코 자신들의 제자인 우리 형제에게 친절한 분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아주 엄하고 무서운 분이었다. 그 중에서도 인사에 대한 기준은 유독 엄격하였다. 반드시 상대방에게 정수리가 보여야 제대로 인사하는 것이라고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강조하셨다.

당시 인사에 대한 훈련이 얼마나 강력했는지 결혼 후 처음으로 아내와 함께 제주도의 이모부 댁으로 인사를 갔을 때 새삼 느끼게 되었다. 이모부가 제주도에 새로 집을 지으신 후 처음 찾아가는 것이라 어렵사리 집을 찾았다. 도착하자마자 인사를 하며 들어갔는데 그 때 속으로 아차 싶었다. ‘방금 내 정수리가 보일 정도로 고개를 숙인 걸까.’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어린 시절에 몸에 밴 습관은 나이가 들어서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남에 대한 존중의 표시인 인사를 어릴 적 잘 배워두는 것은 아주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셋째로, 저자는 프랑스에서 아이를 현명하고 독립적으로 키우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말한다. 프랑스에서는 아이가 열살이 되기 전에 집에서 멀리 떨어져 일주일 이상을 지내고 오는 것이 흔한 일이라고 한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아이가 독립심을 키울 수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프랑스의 유명한 어린이 심리학자 프랑수아즈 돌토Françoise Dolto의 말을 빌어서 아이에게 가장 이로운 것이 ‘무한한 행복’이 아닌 ‘합리적인 이해’라고 말한다. 아이가 원하는 것을 무조건 해주는 것이 아이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보다는 아이가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독립적으로 판단할 수 있도록 기회를 열어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 점에 있어서 나는 고등학교 시절을 잘 보냈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고등학교 3년 내내 집에서 자동차로 4시간이 꼬박 걸리는 기숙사 학교를 다녔다. 한 학기에 집에 가는 것은 명절 때 한 번 정도였다. 그 시간 동안 나는 학원이나 과외로부터 간섭받지 않은 진정한 학창 시절을 만들어 갈 수 있었다.

결코 편한 경험만은 아니었다. 1, 2학년 때 두 해 동안은 폭이 1미터도 안되는 나무 침상이 유일한 개인 공간이었고, 3학년 때 자취하기 위해서 얻은 학교 앞 판자집에서는 태풍 때문에 천장이 날아간 적도 있었다. 그날 밤하늘에 별을 보며 새벽 이슬을 이불 삼아 잤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처럼 우여곡절도 있었지만, 나는 그 모든 곤란과 시행착오를 내 손으로 해결하며 고등학교 시절을 버텨내었다. 지금 되돌아보아도 다시 없을 소중한 순간으로 기억된다.

나는 저자가 강조하는 프랑스 아이들의 독립심이 우리나라 아이들도 배워야 할 아주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내가 <프랑스 아이처럼>을 읽고 중요하게 생각한 내용이다. 지금까지 한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맨 앞에서 강조한 ‘절제와 자유’라는 두 단어로 돌아간다. 아울러 이 책의 시작과 끝을 관통하는 한 가지 핵심 단어가 있다. ‘틀’이라는 의미를 가진 프랑스어 ‘카드르cadre’이다. ‘그 안에서는 자율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되 알아서 조심하고 넘지 말아야 할 경계’를 의미하는 단어이다. 이는 곧 ‘절제와 자유’의 또 다른 표현인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프랑스의 부모들도 ‘절제와 자유’라는 생활 양식을 따른다는 것이다. 저자는 주중에 철저한 식이 조절을 하고 그 대신 주말에 마음껏 먹고 싶은 것을 먹는 프랑스 엄마들의 자기 관리를 주목한다. 이러한 원칙을 통해 나이가 들어도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있는 이들의 모습에서 저자는 ‘절제와 자유’를 발견했다. 프랑스 부모들 스스로가 ‘절제와 자유’를 삶 속에서 실천할 수 있었기 때문에 아이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앞으로도 자녀 교육에 있어서 ‘절제와 자유’가 중요하다는 점을 기억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 가정에 찾아온 소중한 생명을 ‘참을 줄 알고’, ‘자신과 남을 모두 존중하며’, ‘현명하고 독립적인’ 아이로 키워갈 것이다.


“프랑스 아이처럼”에 대한 2개의 생각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