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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리뷰를 시작하며

내가 이 블로그를 시작한 지도 어느덧 7년 차에 접어들고 있다. 일전에도 몇 번 언급한 적이 있지만, 블로그를 만든 계기는 무척 절박한 것이었다. 당시 나는 레지던트로 일하고 있었는데 몸과 마음이 극도로 지쳤었다. 그래도 몸이 힘든 것은 그나마 버틸 수 있었다. 진짜로 힘들었던 부분은 정신적인 스트레스였다.

병원이라는 공간은 사람을 살리기 위한 곳이다. 하지만 정작 그 안에서 직원으로 일하는 개개인들은 지극히 비인간적으로 다루어졌고 나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때마다 나는 도망치듯 책 속으로 파고들었고, 글을 읽으며 언젠가 이 지옥 같은 공간을 빠져나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으로 버텼다. 나는 살기 위해 책을 들었다.

시간이 흐르며 그렇게 읽은 책이 한 권 두 권 쌓여갔다. 한 번 읽은 책은 뒤로 던지고 또다시 다음 책을 찾아 펼쳤다. 책을 읽는 행위 자체에 몰두했고, 그 시간만큼은 힘겨운 현실에서 한 걸음 물러서 있을 수 있었다. 그렇게 수개월이 흘렀다. 그러다가 불현듯 허전함이 고개를 들었다. 책을 읽긴 읽었는데 기록을 하지 않으니 뭔가 남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새로운 도시를 여행하면서 사진 한 장 찍지 않는 것처럼 아쉽고 찜찜한 것이었다.

책을 읽은 소감을 글로 남기기 위해 블로그를 만들었다. 하지만 무미건조하게 책 내용을 정리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것은 나 아니라도 누구나 쓸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만의 생각을 담은 글을 쓰고 싶었다. 그래서 서평도 아니고 독후감도 아닌 독서록이라는 이름으로 글을 써내려갔다. 책 내용 자체보다 독서의 주체인 내가 중심이 된 글을 쓰고 싶었기 때문이다. 책에 대한 감상을 쓰더라도 그 내용과 연결될만한 내 경험을 담으려고 했다.

물론 독서록만 쓴 것은 아니다. 틈틈이 다양한 시도를 이어갔다. 여러 주제의 개인적인 생각들을 다룬 수상록도 있고, 유튜브의 짧은 영상 위주로 감상평을 남긴 시청록도 있다. 좀 더 나은 세상을 바라는 마음으로 쓰는 희망록도 있고, 내가 사용했던 물건들의 후기를 담은 사용기도 있다. 외부 매체에서 기고 의뢰가 들어온 뒤로는 그 글들을 모아서 기고록도 만들었다. 작년에 런던에 와서는 견문록도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블로그의 핵심이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고, 나 자신도 거기에 가장 큰 정성을 기울였다. 시간이 흐르며 독서 감상 글 중간 중간 소개했던 나의 개인적 경험들은 하나의 독립적인 이야기가 되었고, 급기야 출판사의 눈에 띄게 되었다. 그렇게 나의 이야기는 블로그를 벗어나 한 권의 책이 되어 더 넓은 세상으로 나오게 되었다.

이 모든 게 애초에 나를 둘러싼 울타리를 벗어나고 싶어서 벌인 일들이었다. 고백건대 독서, 글쓰기, 책 출간이 그 자체로 목적이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것들은 현실에 머물지 않기 위해 택한 수단이거나 그 과정에서 나온 부산물일 뿐이다. 이 블로그도 마찬가지다. 그 이름이 ‘서재’로 끝나고, 첫 화면에도 독서록에서 다룬 책의 표지들이 나오고 있지만, 그것들이 본질은 아니다. 이 블로그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기존 방식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도전 그 자체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영화 리뷰라는 새로운 영역에 도전해보려고 한다. 영화를 즐겨보면서도, 영화를 주제로 글을 써보겠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일전에 기고 의뢰를 받아서 영화 리뷰를 써본 적은 있었지만, 본격적인 글의 주제로 잡지는 않았었다. 내가 영화를 종종 보기는 하지만 영화 전문가들에게 비하면 배경 지식이 많이 떨어질 것이고, 인문학적 소양도 미천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라고 못할 게 뭐 있을까. 사람마다 경험과 가치관이 다 다른데, 그리고 그걸 수용하는 감수성도 다 다른데, 남이 무슨 영화를 보고 어떻게 느꼈던지가 뭐가 그렇게 중요할까. 나는 내가 보고 느낀 대로 글을 쓰면 그 또한 하나의 좋은 영화 리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일전에 기고받은 글로 영화 리뷰를 쓰면서 즐거웠던 기억이 난다. 당시에 나는 누군가가 나에게 글을 기고했다는 것을 내가 쓰는 글이 그럴만한 수준이 된다는 것으로 여긴듯하다. 아무튼, 그 덕분에 나는 남의 시선이 아닌 스스로 느낌에 집중해서 부담 없이 적어 내려갔었다. 돌이켜보건대 그 부담 없음이 글을 쓰는 즐거움의 가장 큰 원동력이었던 것 같다. 다시 그때의 마음으로 영화 리뷰를 시작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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