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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폭력대화

비폭력대화

내가 지금 내 아이의 나이였을 무렵, 심심할 때면 아버지의 산악용 망원경을 집어 들고 아파트 9층 베란다에 나가 멀리 뒷산을 살펴보곤 했다. 산 정상에 조금 못 미친 곳에 헬기장이 있었는데, 운이 좋으면 헬기가 오르내리는 것도 볼 수 있었다. 초점을 잘 맞추면 마치 몇 걸음 앞에 있는 것처럼 다가왔다. 나는 실제로 보기 힘든 헬기가 눈 앞으로 다가오는 신기한 경험에 매료되었다. 그러다가 한 번은 문득 궁금해졌다. ‘만약 망원경을 거꾸로 들고 보면 어떻게 될까?’

정확히 반대의 현상이 일어났다. 바로 앞의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사과가 마치 창밖에 있는 것 마냥 멀게 보였다. 바로 보았을 때 먼 물체를 당겨온 에너지가 용수철에 응축되어 있는 듯, 거꾸로 보았을 때 눈 앞의 물체를 더 멀리 보내버렸다. 나는 뜻밖의 경험으로 알게 된 사실이 무척 신기했다. 이게 사실은 앞으로 마주할 현실의 예고란 걸 알기 전까지는.

알고 보니 망원경은 인간관계의 체험판이었다.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고 세상을 경험하면서, 내가 망원경을 거꾸로 보면서 느꼈던 생소함이 사실은 우리가 살면서 겪게 되는 여러 상황에서 숱하게 일어나는 익숙함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두 사람이 실제로는 같은 일을 마주하더라도, 서로의 입장과 관점에 따라서 완전히 다른 것으로 느끼는 경우가 그랬다. 아니, 오히려 비슷하게나마 느끼는 경우보다 그렇지 않은 경우가 실제로는 더 많았다. 나를 포함한 거의 모든 사람이 자신에게는 관대하고 남에게는 각박했다.

조만간 불혹을 바라보는 나의 삶을 돌아보건대, ‘몸이 힘들다 보면 마음도 각박해진다’는 경험칙을 몸소 겪어보기 가장 좋은 직업으로 종합병원 외과 레지던트만한 게 없다. 잠잘 시간마저 턱없이 부족한 가운데 눈앞에서 분초를 다투며 생과 사가 오가다 보면, 환자를 살피기 위해 동료를 살필 수 없게 되고, 동료를 살피기 위해 나를 살필 수 없게 된다. 결국 독기를 품지 않고는 정상적인 정신상태조차 유지하기 어렵다.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서 일단은 내가 살아야 하는 삶. 그게 외과 레지던트였던 것 같다.

그러다 보면 애석하게도 독버섯처럼 사람 사이의 관계에도 갈등이 싹트게 된다. 나는 전혀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닌데도 상대방은 뭐가 그렇게 못마땅한지 사사건건 불평하며 딴지를 건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대체 왜 저렇게 하는 말마다 무례하고 이기적일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안하무인으로 일관한다. (물론 나도 그랬겠지.) 자기 말은 항상 옳고 내가 하는 말은 그게 아니란다. 그럴 때면 사이다 없이 고구마만 입안에 밀어 넣은 것처럼 갑갑함이 느껴진다. (물론 남도 그랬겠지.)

그런데 정말 놀라운 게 무언지 아는가. 이렇게 눈엣가시 같은 사람이 어디를 가나 꼭 하나씩은 있다는 거다. 수술방에도 한 명, 병동에도 한 명, 의국에도 한 명. 두 명도 세 명도 아니고 꼭 한 명이다. 꼭 한 명이 딴지를 건다. 왜 그런 것일까. 나는 처음에는 그들이 문제일 거로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은 또 그럭저럭 괜찮았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서툴게나마 깨닫게 되었다.

나에게 문제가 있는 거였다. 그 여러 상황의 공통점은 그 자리에 내가 있다는 사실 아닌가. 그렇다면 어디를 가나 마주하는 딴지의 원인은 남이 아니라 나라고 해야 옳다. 상식적으로 그게 맞다. 결국 변해야 할 이는 남이 아니라 나였다. 처음에는 인정하기 쉽지 않았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명백한 진실이었다. 어디를 가나 튀어나온 못처럼 나를 다치게 하는 날카로운 갈등을 극복하는 길의 입구는 결국 나 자신이 변화하는 데 있었다.

그런데 이게 남들에게 나를 맞추겠다는 건 아니다. 남의 기준에 맞춰 살다가 인생이 재미없어진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나는 내가 사는 이유가 남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은 아니란 걸 안다. 내가 나의 만족스러운 삶을 위해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자발적으로 변화를 도모하는 것이 필요할 뿐, 누군가에게 나를 맞추는 것은 올바른 해결책이 아니다. 나는 변화의 목적어가 아니라, 변화의 주어이다. 나를 위해 내가 변화해야 했다.

그 길은 어디를 향할까. 입구는 찾았지만, 결국 그 길이 어디로 뻗어있을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가야 할 방향을 찾기 위해서 조용한 가운데 혼자 음악을 들으며 명상도 해보았다. 늦은 저녁 호수 공원을 도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산책도 해보았다. 이런저런 책도 찾아보았다. 책에서 얻은 이론은 현실과 다르다지만, 그런 다름조차도 현실에 도움이 되는 이론이니 말이다.

『비폭력대화 원제 : Nonviolent Communication | 마셜 B. 로젠버그 지음 | 캐서린 한 옮김 | 한국NVC센터 | 2017년 11월 25일 출간』는 말로써 겪게 되는 갈등을 풀어가는 데 의미 있는 지침이 될 만한 책이다. 이 책의 저자 마셜 B. 로젠버그Marshall B. Rosenberg는 반유대인적 정서가 팽배하던 시대의 디트로이트에서 성장기를 보낸 유대인이다. 저자는 숱한 차별과 폭력을 경험하면서, 갈등에 대한 평화로운 해결책을 모색한 끝에 새로운 대화법을 만들어내기에 이른다. 그것이 바로 비폭력대화이다. 비폭력대화는 책 이름이기 이전에 한 사람 인생의 정수가 담긴 대화법이다.

비폭력대화는 ‘연민의 대화’라고도 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연민’은 비폭력대화를 정의하는 핵심 단어다. ‘연민’이라고 하면 누군가를 가엽게 여기는 것을 먼저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는 그 의미가 좀 다르다. ‘그래, 듣고 보니 그럴 만하네’, ‘나 같아도 그럴 수도 있겠어’라며 서로의 감정을 공유하는 상태에 더 가깝다. 이처럼 비폭력대화는 서로가 대화를 나눌 때 마음의 벽을 허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비폭력대화는 크게 ‘네 가지 요소’와 ‘두 가지 측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네 가지 요소는 비폭력대화를 구성하는 것들로 ‘관찰, 느낌, 욕구, 요청’이 있다. 이 네 가지를 진료실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상황에 빗대어 하나씩 간단히 소개해보겠다. 내가 어떤 환자에게 약을 처방해 주었는데, 환자는 그 약을 제대로 먹지 않고 병세가 악화되어 다시 찾아왔다고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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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관찰’은 상황을 사견 없이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을 말한다. 관찰과 비교되는 것은 평가다. 내가 환자에게 “지난번 처방한 약이 남은 걸 보니, 약을 다 먹지 않았네요”라고 말하면 관찰이지만, “지난번 처방한 약이 남은 걸 보니, 약 먹는 걸 싫어하는군요”라고 말하면 평가다. 당연히 평가보다는 관찰이 비폭력적이다.

둘째, ‘느낌’은 상대의 행동을 보았을 때 느끼는 바를 말한다. 기쁨, 슬픔, 아쉬움 등의 감정이 여기에 해당한다. 앞서 관찰에 비교되는 것이 평가이듯, 느낌에 비교되는 것은 생각이다. “약을 다 먹지 않는 걸 보니 걱정되네요”라고 말하는 것은 느낌이지만 “약을 다 먹지 않는 걸 보니 낫기 싫은가 보네요”는 생각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유의할 점이 있다. “약을 다 먹지 않는 걸 보니, 낫기 싫은 것처럼 느껴지네요”는 표면적으로는 느낌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생각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물론 생각보다는 느낌이 비폭력적이다.

셋째, ‘욕구’는 느낌과 관련하여 자신이 무엇을 바라는지를 말한다. 여기서 유의할 점은 남이 아닌 자신의 욕구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게 중요한 이유는 내 느낌을 말하는 것은 내가 책임을 진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내가 느끼는 바에 대한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미루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컨대 “빨리 낫고 싶으실 텐데, 약을 제대로 먹지 않은 걸 보면 걱정되네요”와 “제가 주치의로서 당신을 낫게 하고 싶은데, 약을 제대로 먹지 않는 걸 보면 걱정되네요”를 비교해 보자. 후자가 앞에 앉아있는 환자의 치유에 대한 책임을 더욱 확실하게 표현한다.

넷째, ‘요청’은 상대방이 해주기 바라는 행동을 말한다. 이때는 두 가지를 기억해두어야 한다. 추상적이지 않고 구체적인 말을 사용해야 한다는 점과 부정적 표현보다는 긍정적 표현을 써야 한다는 점이다. “자꾸 약 빠뜨리지 마세요” 보다는 “처방하는 약을 한 달 동안 저녁마다 꼭 챙겨 드세요”가 좋다.

요컨대 비폭력대화의 네 가지 요소를 이루는 관찰, 느낌, 욕구, 요청은 ‘상대에게 객관적인 시각으로 주관적인 감정을 표현하고, 책임감 있게 바라는 바를 표현한 뒤에, 구체적이고 긍정적인 말로 변화를 요청’하는 것을 말한다. 이처럼 비폭력대화의 네 가지 요소는 그 자체로 기능적인 성격을 띤다. 사람으로 치자면 팔다리 즉 사지가 비폭력대화의 네 가지 요소다.

한편, 비폭력대화에는 두 가지 측면도 있다. 사람은 눈과 귀가 각각 두개씩 있기 때문에 사물을 입체적으로 보고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알아낼 수 있다. 마찬가지로 비폭력대화의 두 가지 측면도 상황을 입체적이고 다각도로 다루기 위한 것이다. 비폭력대화의 첫 번째 측면은 ‘네 가지 요소를 솔직하게 표현하기’ 그리고 두 번째 측면은 ‘네 가지 정보를 받아들여서 공감하기’다. 한 마디로 ‘말하기’와 ‘듣기’다. 내가 있으면 네가 있듯, 나의 측면이 있다면 너의 측면도 있다. 비폭력대화의 두 가지 측면은 네 가지 구성보다 이해하기는 쉽지만, 실제로 행동으로 옮기기는 더 어렵다.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그동안 나의 모습을 되돌아보았다. 역시나 나의 말과 행동에도 문제가 없지 않았다. 이제는 무엇이 잘못되었고 어떻게 고치면 좋을지 방법을 알았으니, 하나둘씩 바꾸어보고자 한다. 물론 나 혼자 노력한다고 모든 갈등과 반목이 한꺼번에 사라지진 않겠지만, 나부터 조금씩 더 나아지다 보면 세상 사람들도 분명 그에 응답할 것이라 믿는다. 만약 당신도 말로써 남에게 상처를 받는 성격이라면, 혹은 남에게 상처를 주고 있다는 말을 듣는다면, 『비폭력대화』의 일독을 권한다.

더욱 먼 거리를 가깝게 당겨볼 수 있는 좋은 망원경일수록, 거꾸로 보면 가까이 있는 물체를 더 먼 곳으로 밀어버린다. 세상을 자기 앞으로 바짝 끌어당겨 사는 사람일수록, 남들의 삶은 저 먼 세상의 이야기로 밀어버리는 게 되는 건 아닐까. 내 손에 들려있는 망원경이 지나치게 좋은 것은 아닌지, 그래서 바로 앞의 사람들의 삶조차 들여다보지 못하고 사는 것은 아닌지, 한 번쯤 곰곰이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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