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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과 인간

디지털과 인간

여느 때처럼 침대 위에서 알람 소리를 들으며 눈을 떴다. 항상 그렇듯 5분 후에 알람이 다시 울리도록 해놓고 이불을 끌어올렸다. 보통은 5분씩 서너 번 더 미룬 후에야 잠을 깬다. 그래서 전날 잠자리에 들기 전에 알람을 20분 정도 앞으로 미리 당겨둔다. 내가 나의 게으름에 대처하다 터득한 나름의 전략이라고나 할까.

미룰 수 있는 만큼 미뤘다는 생각이 들 때쯤,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평소 집을 나가던 시간까지 20분밖에 안 남았다. 얼른 속옷을 챙겨서 화장실로 들어갔다. 후다닥 샤워를 하고 양치질까지 마치니 15분이 지났다. 어제 입었던 옷을 다시 걸치고 양말을 신었다. 마치 육상선수가 자기 기록을 확인하듯 다시 시계를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평소에 집을 나서던 시간에서 2분 정도 지나갔다.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다. 신발을 구겨신는 것과 동시에 집을 나섰다.

매연과 교통 체증을 뚫고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옷을 갈아입으러 갱의실로 향했다. 순식간에 옷을 갈아입고 의국으로 뛰었다. 손목에 찬 시계를 보니 아침 미팅까지 아직 3분이 남았다. ‘휴… 다행이다.’ 속으로 생각했다. 의국 바로 앞에서 평소 걸음으로 속도를 줄였다. 그다음 태연하게 문을 열고 들어가서 자리를 잡았다.

당직자들에게서 지난밤에 있던 주요 사항에 대한 인계를 받고 이런저런 업무적인 이야기를 나눴다. 짧은 미팅이 끝나고 각자 자기 환자를 보기 위해서 흩어질 때였다. 나도 중환자실부터 시작해서 담당 환자의 회진을 가려고 자리를 일어섰다. 그러면서 혹시 밀린 카톡이 있나 확인하려고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뭔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처음 알아챘다.

휴대폰이 없었다. 재빨리 기억을 되감아 보았다. 전혀 모르겠다. 그냥 가능성이 있는 곳만 떠오를 뿐이다. 집에 두고 왔을까. 확실하지는 않다. 어쩌면 식탁에 올려두고 온 것 같기도 하다. 아니면 오는 길에 흘렸나. 그럴지도 모르겠다. 일단은 가까운 곳부터 찾기 시작했다. 원래 사람 심리가 쉬운 것을 먼저 하려는 경향이 있지 않은가. 하지만 갱의실 캐비닛에는 없었다. 잠깐 들렸던 화장실과 손을 씻은 세면대 옆도 가보았다. 그곳에 휴대폰을 둔 기억이 있어서라기 보다는 기억이 없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살펴봤다. 하지만 혹시나가 역시나였다. 휴대폰은 그곳에도 없었다.

주위에서 잠시 휴대폰을 빌려 내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반대편에서 전화기가 꺼져있다는 안내음이 나온다. 아차. 배터리가 간당간당하더니 완전히 방전된 모양이다. 휴대폰을 바꾼 지 2년이 넘어서니 요사이 충전선을 연결해도 실제로는 충전이 잘 안 되는 일이 많았다. 접속 단자를 이리저리 비틀면 그제야 휴대폰 맨 윗줄에 번개 표시가 뜨고는 했다.

주인 잃은 내 휴대폰은 어디에 처박혀 있는 걸까. 확실하지는 않지만 출근길에 휴대폰을 들여다본 기억은 없다. 일단 집에 두었을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결국 이러나저러나 퇴근해서 집에 돌아갈 때까지는 휴대폰 없는 하루를 보내야 했다.

휴대폰 없는 하루가 이처럼 불편한 것인지 몰랐다. 휴대폰 없을 때에는 어떻게 살았는지. 그나마 병원 곳곳에 유선 전화기라도 있었으니 다행이었다. 하지만 전화기로 다른 사람의 개인 휴대폰에 전화를 거는 일은 여전히 문제였다. 병원 사람들 중에서 내가 전화번호를 제대로 기억하는 사람이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유선 전화기를 쓰는 것에 익숙해질 때쯤 새로운 근심이 고개를 들었다. ‘전화기가 꺼져있는 동안 혹시 중요한 연락을 놓치지 않을까’ 하는 우려였다. 완전히 근거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루 종일 병원 안을 오가면서 “전화가 안돼네요?”라는 말을 수시로 들었다. 카톡에 안 읽은 메시지가 넘쳐날 거란 생각으로 이어지니 초조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래 봐야 소소한 잡답이나 포털 사이트에 뜬 기사 링크처럼 오늘 확인하나 내일 확인하나 별 차이 없는 내용들이 대부분이겠지만 말이다.

이런 뜻하지 않은 상황은 어떤 불안감 같은 것을 가져왔다. 그것은 내가 나 아닌 나머지 사람들이 모여있는 세계에 연결되지 못하는 불안감이었다. 사람들과 통화할 수 없는 상황, 수시로 카톡을 확인할 수 없는 상황, 습관적으로 읽던 인터넷 뉴스 볼 수 없는 상황은 사람을 초조하게 하고 불안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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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금단증상은 걱정했던 것만큼 오래가지는 않았다. 오후쯤 되니 불안감은 어느새 해방감으로 바뀌어 있었다. 시도 때도 없이 통화에 응하지 않아도 될 자유, 카톡을 확인하지 않아도 될 자유, 인터넷 뉴스를 읽는 대신 조용히 사색에 잠길 수 있는 자유였다.

어느덧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출근할 때와 마찬가지로, 하지만 순서는 반대로 옷을 갈아입기 위해 갱의실로 향했다. 열쇠를 돌려서 개인 캐비닛을 열었다. 그때 위칸에 눈에 들어오는 매끈한 물건이 놓여있었다. 전원이 나간 상태로 죽어있는 내 휴대폰이었다. 분명 아침에 살펴보고 갔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그 순간 가장 먼저 든 생각이 무엇이었는지 아는가. ‘지금 휴대폰 충전을 하러 다시 의국에 올라가야 하는가’였다. 꺼져있는 휴대폰은 보이지 않는 휴대폰보다 더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나는 잠시 고민한 후 그냥 꺼둔 상태로 귀가하기로 했다. 휴대폰에서 자유로운 시간을 다만 한 시간이라도 더 누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전원이 나간 휴대폰을 가방 깊숙한 곳으로 집어넣었다.

병원을 나와서 집으로 향하는 버스를 잡아탔다. 뒷좌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버스 안의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흔들리는 버스 안에는 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공통점이 있었다. 열에 아홉은 하나같이 스마트폰을 들고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었다.  앉은 사람이나 일어선 사람이나 가릴 게 없었다. 그 모습이 너무 판에 박은 듯 똑같아서 섬뜩한 느낌마저 들었다. 턱을 괴고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버스 밖의 사람들도 다르지 않았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 횡단보도에서 길을 건너기 위해 멈춰있는 사람들, 이들 거의 모두가 스마트폰으로 무언가를 하는 데 몰두하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나는 세상에서 한 발짝 물러서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우주정거장에서 지구를 바라보는 느낌이 아마도 이런 게 아닐까.

『디지털과 인간 원제 : When Digital Becomes Human | 스티븐 판 벨레험 지음 | 이경식 옮김 | 세종연구원 | 2017년 05월 20일 출간』의 저자 스티븐 판 벨레험Steven Van Bellegem은 이제까지의 디지털 기술의 발달은 ‘인간이 디지털적’으로 변화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집집마다 개인용 컴퓨터가 놓이기 시작했을 때, 스마트폰이 세상에 선보였을 때, 사람들은 어김없이 그 흐름을 따라잡기 위해서 분주했다. 하지만 이제 그 흐름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저자는 앞으로의 디지털 기술의 발달이 ‘디지털이 인간적’으로 변화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되면, 과거에는 디지털 기술에 능한 사람들이 세상을 주도하는 위치에 있었지만 이제는 그런 구분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사회 전반적으로 인간 고유의 특성이 더욱 귀하게 여겨질 것이다. 이를테면 상대방의 슬픔과 기쁨에 대한 진심 어린 ‘공감’이나, 옳다고 여기는 가치에 전념하는 ‘열정’이 좋은 예다. 앞으로는 디지털 기술에 얼마나 능숙한지 보다 ‘공감’과 ‘열정’ 같은 인간적인 면모를 갖추었는지가 더욱 중요한 시대가 올 것이다.

지금 우리들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여러 가치 판단 기준은 훗날 낡은 것이 될 것이다. 좀 더 자유롭게 살고자 만든 디지털 도구에게 오히려 종속되었던 우리들의 모습은 지나간 시대의 어두운 기억쯤으로 여겨지게 될 것이다.

후세 사람들의 시선을 미리 경험해보는 좋은 방법이 있다. 혹시 버스나 지하철을 타게 될 일이 있다면 스마트폰을 가방에 넣고 대신 주위를 둘러보도록 해보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스마트폰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지, 새삼 발견하고 놀라게 될 것이다.

아마 그런 사람들의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으면 당신 만이라도 그들로부터 탈출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될 것이다. 방법은 어렵지 않다. 스마트폰 대신 주변 사람들과 더 많은 교감을 나누고 진심으로 좋아하는 일을 찾아 나서라. 그것이 바로 ‘디지털이 인간적이 될 때’를 준비하는 길이기도 하다.

“디지털과 인간”의 6개의 댓글

  1. 저도 어제 핸드폰을 두고 출근했답니다. 물론 깜박해서죠. 아이셋 중 초1친구가 가장 마음에 걸려 불안하기도 했는데 평소보다 훨씬 일에 집중할 수 있었구요. 무엇보다 다른 사람의 말을 훨씬 잘 듣게 되더라구요. 나는 항상 핸드폰에서 의식의 한자락을 넘겨주고 있었구나. 그런 생각을 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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