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가을부터 육아휴직을 쓰고 영국 런던에서 머물고 있다. 아내가 늦깎이 유학을 왔는데, 나는 초등학생인 딸 아이의 등하교부터 숙제까지 육아와 관련된 일을 거의 전담하며 아내가 공부에 전념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를 하고 있다. 아침마다 아이 머리 묶는 일은 여전히 아내의 몫이지만, 그래도 할 줄 아는 게 조금씩 많아지는 중이다.
주부, 아니 부모로서 제일 신경이 쓰이는 것은 역시 아이 학교와 관련된 일이다. 아이들 교육에 정성을 쏟는 부모 마음은 우리나라나 여기나 크게 다르지 않다. 부모들이 학교 일에 관심이 많고, 선생님들도 부모들과 소통하려고 무척 노력한다.
얼마 전 딸의 담임 선생님과 학부모 면담 시간이 있었다. 정기적으로 자녀의 학교생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였다. 딸 아이의 담임 선생님은 카리스마 넘치는 여자 선생님으로, 재잘대는 아이들을 휘어잡을 때의 모습을 보면 그저 대단하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다.
딸 아이는 다행히 학교생활에 큰 어려움이 없이 적응하고 있었다. 같은 반에 다른 한국인 학생이 없어서 위축되지 않을까 내심 걱정이 되기도 했는데, 나름 씩씩하게 잘 해내고 있었다. 부모로서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그렇게 우리 부부에게 주어진 면담 시간이 끝나갈 때였다. 담임 선생님은 혹시 더 궁금한 게 없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아내는 선생님이 아이들을 지도하느라 고생이 많겠다는 뜻으로 반에 학생들이 몇 명이나 되는지 물었다. 담임 선생님은 반 아이들이 모두 스무 명이었는데, 최근에 전쟁 난민 아이들이 새로 들어와서 인원이 조금 늘었다고 했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그때 나는 분명히 보았다. 같은 반에 난민 아이들이 함께 수업을 듣고 있다는 말을 전하는 담임 선생님의 표정을.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어떤 자부심이 뿜어져 나왔다. 그 모습은, 학교의 시설이 어떻고 선생님들이 얼마나 노력하고 있으며 그래서 정부로부터 얼마나 높은 등급을 받았는지 설명할 때와는 차원이 다른, 훨씬 우아하고 기품있는 것이었다.
나는 딸 아이의 반에 난민 아이들이 함께 있다는 담임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속으로 참 잘 됐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내 딸이 다양한 배경을 가진 아이들과 어울릴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어렵게 이곳까지 온 그 아이들도 이제부터는 좋은 세상을 경험할 수 있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옆에서 같은 이야기를 듣고 있는 아내를 슬쩍 쳐다보니 역시 평온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학부모 면담을 다녀오고 며칠이 지났을 무렵, 학교에서 부모 초대 행사가 있었다. 아이들이 준비한 합창 대회였다. 부모들이 관객석에 하나둘 자리를 잡고 약속된 시각이 되자, 새하얀 망토를 맞춰 입은 아이들이 강당 무대에 올랐다. 잠시 후 아이들은 담임 선생님의 지휘에 맞춰서 그간 갈고닦은 합창 실력을 뽐냈다.
나는 아이들 노래에 맞춰 박수 치고 틈틈이 딸 아이의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때 문득 난민 아이들은 누굴까 궁금해졌다. 나는 아이들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하지만 누가 난민 아이들인지 찾아보는 것을 곧 그만두었다. 거기에는 하나같이 해맑은 표정의 아이들이 있을 뿐이었다.
공연이 끝난 후 집에 돌아오는 길에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학교 강당에 앉아서 아이들의 재롱을 보며 웃고 박수 치는 동안에도 같은 하늘 아래 어딘가에서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을 터였다.
그와중에 많은 아이들이, 남아서 싸우기로 결심한 부모와 헤어져 낯선 땅으로 떠난다. 아마도 그들의 부모는 잠깐만 떨어져 지내는 거라며 아이들을 안심시켰을 것이다. 곧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만나자며 떠나는 아이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부모들도 이미 알고 있다. 조금 전 아이들을 향해 흔들었던 바로 그 손으로 곧 총을 들어야 한다는 것을. 후에 아이들이 다시 집으로 돌아오더라도, 그곳은 전과 같은 모습이 아닐지 모른다는 것을. 아이들을 기다리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그야말로 믿기지 않는, 믿고 싶지 않은 슬픈 현실이다.
역사를 돌아보면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언제나 가장 힘없고 여린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은 앞으로 살아갈 날이 많기에 전쟁의 충격과 상심으로 고통받게 될 시간이 길고 그 상흔도 오래간다. 그것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전쟁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어른들의 이기심으로 벌어진 이 비극을 하루빨리 끝내야 하는 가장 큰 이유다.
아무쪼록 딸 아이가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여러 친구와 진심 어린 우정을 나눌 수 있기를. 또한 그 난민 아이들도 이 세상의 밝은 면을 많이 경험하고 훗날 사회에서 자기 역할을 해낼 수 있기를. 부디 그럴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본다.
선생님의 자부심도, 승건님의 안도하시는 마음도 너무 아름답다고 생각해요. 항상 좋은글 잘보고 있고, 타지에서도 항상 평안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