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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의 즐거움

학문의 즐거움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공부가 성공에 이르는 지름길로 인식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과거 제도다. 여러 부정적인 면에도 불구하고 과거 제도에는 분명한 장점이 있었다. 관직과 신분이 세습되던 시대에 누구나 노력을 하면 관직에 오르고 높은 신분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기 때문이다. 이는 당시에 매우 획기적인 일이었다. 과거 제도는 공부라는 누구나 비교적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을 통하여 신분간 이동을 가능하게 하는 거의 유일한 길이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공부를 잘하는 것이 곧 사회적 성공으로 이어지는 길로 인식되기에 이른다.

공부에 대한 집착의 역사적 배경은 산업화 시대를 거치면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대학 입학과 각종 고시의 형태로 이어진다. 그러다보니 부모들은 자녀들이 학교에 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끝없는 공부의 길로 등을 떠민다. 자녀들도 그런 부모들의 욕망에 동화되어 오로지 공부만 잘하면 다 되는줄 아는 사고방식에 젖어든다. 사람들에게 공부는 더 나은 대학, 더 나은 직장과 자리를 얻기 위한 수단이 되어버렸다.

무언가가 수단이 되어버리면 그 자체의 즐거움은 사라지는 법이다. 취미로 스포츠카를 모는 젊은이와 돈벌이를 위해서 택시를 모는 기사가 느끼는 운전이 서로 다르듯이 말이다. 오랜시간 가만히 자리에 앉아있어야 하는 공부의 특성상 자발적 즐거움이 사라졌을 때 남겨지는 고통은 말할 수 없이 크다.

하지만 공부의 본래 목적인 배움은 원래 즐거운 활동이다. 사람이 ‘왜 스트레스를 느끼는지’를 생각해보면 배움이 즐거운 이유를 알 수 있다. 당신은 어떤 경우에 스트레스를 느끼는가. 해본 적 없는 일을 할 때, 처음으로 어떤 장소에 갈 때, 말이 안통하는 사람을 만날 때 스트레스를 느끼지 않는가. 왜 그럴 때 우리는 스트레스를 느낄까. ‘무언가를 모를 때’ 스트레스를 느끼기 때문이다. 무지가 고통의 근원이다. 그 고통의 근원을 해소해 주는 것이 공부이다. 따라서 공부는 고통을 해소하고 즐거움을 안겨주는 것이다.

하지만 말이 쉽지 나도 삶의 대부분에서 실제로 공부를 즐기지는 못했다. 뒤에 더 이야기 하겠지만 나는 운이 좋아서 인생에 공부가 필요하던 시기를 비교적 잘 넘길 수 있었다.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나와 비교할 수 없이 훌륭하고 큰 업적을 세운 어떤 수학자의 자기 고백을 들어보자.

『학문의 즐거움 원제 : 學問の發見 | 히로나카 헤이스케 지음 | 방승양 옮김 | 김영사 | 2013년 04월 11일 출간』은 유년시절 공부를 못하였지만 끈기있는 삶의 자세를 통해 훗날 수학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필즈상Fields Medal을 수상한 히로나카 헤이스케広中平祐의 자전적 에세이다. 어떻게 보면 뻔한 성공담처럼 보이는 저자의 이야기가 남다른 이유는 그가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자세 때문이다. 자신이 이룬 공적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학문에 대한 애정을 담담히 고백하는 저자의 모습에서 독자를 위하는 진심이 느껴진다.

학문의_즐거움

저자는 스스로가 천재가 아님을 자각하고 자신도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천재들 앞에서 좌절감을 느꼈음을 고백한다. 『학문의 즐거움』이라는 제목이 무색하게 저자 또한 공부가 결코 즐겁지만은 않았음을 담담히 밝힌다. 한 분야에서 최고의 경지에 오른 사람이 말하기에는 너무도 소탈하고 솔직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저자는 공부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뛰어넘을 수 있었던 힘은 ‘끈기’였다고 말한다. 스스로가 천재가 아님을 인정하고 나니 택할 수 있는 길이란 남들보다 더 많은 시간을 쏟아붓는 것 외에는 없었던 것이다. 나는 이러한 저자의 마음이 무엇인지 100% 공감할 수 있다. 나 또한 천재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입하는 방법으로 부족함을 메꾸려고 노력했다.

저자는 새로운 것을 창안하고 만들어내는 과정으로서의 공부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우리가 흔히 학문이라고 일컫는 것 말이다. 저자는 학문이라는 창조의 과정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을 3가지로 요약하고 있다.

첫째로, 무엇인가 새롭게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유연한 태도라고 말한다. 벽에 부딪혔을 때 한 발 물러서서 거리를 두고 상황을 재조명하는 것을 뜻한다. 경직된 사고를 경계하라는 말이기도 하다.

둘째로, 무엇인가 창조하는 과정에서는 일종의 욕망도 필요한데, 이 욕망이 자기 내부에서 생겨야함을 강조한다. 다른 말로 내적동기의 중요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남이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궁금함을 참지 못해서 공부할 때 가장 훌륭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셋째로, 무엇이든지 실제로 만들어 보았을 때에 비로소 진정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어떤 것이든 창조되고 나서야 비로소 의미가 생기고 스스로 걷기 시작한다.’라는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의 말을 인용하여 이를 설명한다. 일단 실행하면 성공이든 실패든 결과를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어떤 식으로든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힘이 된다.

나는 저자의 책을 덮은 후 마침 앞에 놓인 계란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계란을 안에서 스스로 깨고 나오면 병아리가 되지만, 남이 깨주면 계란 후라이가 된다. 이처럼 스스로 역경을 헤치고 끈기있는 도전을 하는 것은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가 마주해야 하는 숙명이 아닌가 한다.

저자의 노력과 끈기에는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나도 삶의 중간마다 나름의 근성을 통해 공부의 즐거움을 느낀 시기가 있었다. 그 시기들을 돌이켜보건데, 몸은 조금 힘들었을지 몰라도 모르는 것을 알아가는 기쁨에 하루하루가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내가 기억하기에, 공부의 재미를 처음 느꼈던 것은 초등학교 4학년 병원에 입원해서 창문 너머로 보이는 의학 도서관의 불빛을 보았을 때였다. 그때 밤새 꺼지지 않는 의학 도서관의 불빛을 벗삼아 나도 함께 다양한 책을 읽어나갔다. 당시 병원 입원이라는 어려움은 내게 극복해야 하는 장애물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내가 가야할 길이 까마득함을 더욱 절실히 깨닫해 해준 자극제이기도 했다.

두번째로 고등학교 3학년 때 기억이 난다. 나는 1년에 100만원짜리 군데군데 곰팡이 핀 자취방에서 대학 입학을 준비했었다. 밤이면 천장 위로 쥐떼들이 뛰어다니는 소리에 잠이 깨고 태풍이 오면 천장이 날아가는 허름한 곳이었다. 비록 거의 아무것도 갖추어지지 않은 곳이었지만, 역설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그 이유 때문에 나는 내가 해야할 본연의 의무인 공부에 매진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지금 세번째로 그때와 비슷한 느낌을 다시금 느끼고 있다. 매주 두 권의 책을 읽는 것은 나에게도 큰 도전이자 쉽지 않은 일이다. 병원에서 수술을 하고 환자를 보는 외과 의사의 삶과 매주 두 권의 책을 읽고 블로그에 글을 남기는 삶은 함께 병행하기에 가히 쉬운 조합이 아니다. 하지만 남이 시킨 것이 아니고 내가 스스로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기 때문에 책 한 권을 끝낼 때 마다 보람되고 글을 한 편 쓰고나면 뿌듯함이 남는다. 더욱이 독서와 글쓰기 모두 내가 못하는 영역이기 때문에 그야말로 ‘학문의 즐거움’을 실감하고 있다.

글을 마무리하며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이 있다. 저자는 운이 좋은 사람이다. 그리고 종종 글을 통해 고백하는 바와 같이 나도 운이 아주 좋은 사람이다.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는 밑바탕을 가졌기 때문이다. 아마 저자가 시종일관 겸허한 자세를 가지는 것은 그점을 깨닫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당신이 지금 여유있게 스마트폰으로 이 글을 보고 있다면, 당신도 어느정도 밑바탕을 가진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우리는 비록 산정상에 있지는 못할지라도 언제든 뜀박질해서 도약하고 싶을 때 발을 디딜 수 있는 단단한 바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그런 기반을 갖지 못하는 사람도 무수히 많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예전에 과거 제도가 도입되고 신분을 뛰어넘을 수 있는 새로운 길이 열린 것은 맞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여전히 그 경쟁에 참여할 여건이 되지 않는 가난한 이들이 훨씬 더 많았다. 오늘날에도 공부할 수 없는 여건에 놓인 이들이 여전히 많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더욱이 ‘공부하면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는데 왜 안하냐’라는 논리는 그럴 기회조차 없는 이들에게 두 번 상처를 주는 것이다. 솔직히 그런 이들도 엄연히 공존하고 있는 현실에서 나홀로 ‘학문의 즐거움’ 운운하는 것이 염치없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공부로 기회를 얻은 이들은 그 기회를 당연하게 여긴 나머지 남겨진 이들을 방치해서는 안된다. 기회를 얻은 이들에게는 자신이 얻은 것과 ‘같은 기회를 남들도 누릴 수 있도록 사회를 개선해 나갈 의무’가 있다. 이것은 물론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학문의 즐거움”의 1개의 댓글

  1. 이 글을 보고 저도 제 자신에 대해 되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좋은 글을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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