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며칠 사이 부쩍 추워졌다. 비가 좀 오는가 싶더니 두꺼운 옷을 꺼낼 겨를도 없이 날씨가 매섭게 변했다. 환절기, 특히 겨울로 넘어가는 이즈음은 감염병 대응 업무를 보고 있는 공무원으로서 특히 긴장되는 시기다. 춥고 건조한 날씨에 인플루엔자 환자가 늘어나는 데다가, 올해는 코로나19의 재확산까지 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2020년과 2021년 모두 11월 말부터 확연한 증가세를 보이다가 12월에 폭증, 이듬해 1월 들어서야 감소세로 돌아서길 반복했었다. 지금은 그야말로 전운이 감도는 시기다.
하지만 사람들이 코로나19을 바라보는 시각은 예전 같지 않다. 주위에서 확진되었다가 회복한 사람도 적잖고, 2년 넘게 이어진 방역으로 쌓인 피로감도 상당하다. 일각에서는 실내 마스크 의무 해제에 대한 기대감도 높아지고 있다. 이제 비로소 코로나19라는 어둡고 긴 터널의 끝이 보인다고도 한다.
그러나 터널 끝이 보인다는 건 우리가 아직 터널 속에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실내 마스크 의무 해제도 본격적인 겨울철로 들어서는 지금은 시기상조라는 게 책임 있는 전문가들의 공통된 시각이다. 여전히 하루 50명 내외의 사람들이 코로나19로 세상을 떠나고 있다. 아직은 코로나19 재유행에 대한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이유다.
그중에서도 감염병에 취약한 이들은 코로나19가 종식될 때까지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하는 대상일 수밖에 없다. 대표적인 예가 요양 병원이나 요양원에서 지내는 노인들이다. 감염병은 체력이 저하된 이들에게 더욱더 치명적이기 마련인데, 같은 시설 안에서 모여서 지내고 있으니 더욱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최근 부산시청 감염병관리과 공무원들은 코로나19 동절기 예방 접종을 독려하기 위해 부산 시내의 요양 병원과 요양원들을 일일이 찾아다녔다. 두 명씩 한 팀을 이뤄서 각 병원의 직원들과 입원 환자들의 동절기 코로나19 예방 접종 현황을 확인하고, 집단 면역을 위한 적정 수준의 접종률에 도달할 수 있도록 병원 관계자들을 만나 당부했다.
사실 병원 방문을 나서기에 앞서 적잖이 조심스러웠다. 혹여라도 백신 접종 권유가 그들에게 부담으로 전해지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우리를 피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기우였다. 내가 만난 대다수의 시설 관계자들은 백신 접종에 적극적이었고, 동절기 예방접종이 코로나19의 재확산을 막기 위한 최선책이라는 걸 이해하고 있었다.
물론, 백신에 대한 불신도 없지는 않았다. 직원, 환자, 보호자 가운데는 백신에 대한 불안감을 가진 이들도 있었다. 이전에 코로나19 백신을 접종한 뒤 불편감이 심했거나 자신이나 주변에서 백신을 맞고도 코로나19에 걸렸기 때문에 백신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었다. 대부분 개인적인 경험에서 비롯된 것들이었지만 그들 각자에게는 엄존하는 감정이었다.
반면에, 백신이 설령 코로나19에 걸리더라도 중증, 더 나아가 사망의 가능성을 낮추는 효과가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이들도 많았다. 자신이 코로나19에 걸렸지만 큰 탈 없이 회복한 건 백신 덕분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그런 분들을 만나면 감염병 대응 업무를 보고 있는 공무원으로서 큰 보람을 느낀다.
그런가 하면, 내가 보기에는 굳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으로 걱정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전에 맞은 백신과 같은 회사의 백신이 아니라는 이유로 꺼리는 경우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실제로는 바로 전 백신과 이번 동절기 추가 접종 백신의 제약사가 달라도 문제가 없다. 하지만 자신과 가족의 몸에 백신을 맞아야 하는 사람으로서는 신경이 쓰일 수 있겠다는 걸 깨달았다.
그때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의사이기 때문에 알 수 있는 것이 있고 의사이기 때문에 알 수 없는 게 있었다. 공무원이기 때문에 볼 수 있는 게 있고 공무원이기 때문에 볼 수 없는 것도 있었다. 접종을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을 접종을 설득하는 나의 입장에서 짐작조차 못 한 부분이 있었다.
미국의 정치철학자 존 롤스는 <정의론>에서 ‘무지의 장막’이라는 일종의 사고 실험을 제시한다. 이에 따르면 사람들이 저마다 처한 상황이 무엇인지 알 수 없고 그래서 유불리를 따지지 않는다면 사회 전체로 볼 때 더 나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예컨대, 자신의 성별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정치적 성향이 보수인지 진보인지, 경제적으로 부유한지 빈곤한지에 대한 인식을 내려놓아야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감염병 대응 업무를 하고 있는 나 자신에게 적용해 보면 어떨까. 내가 코로나19 예방접종을 권해야 하는 역할을 잠시 잊었을 때 접종을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더 나은 방안을 제시할 수 있을까. 내게 주어진 역할과 목표를 잠깐 잊어버리는 것이 더 공정하고 합리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데 도움이 될까.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코로나19 관련 업무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무지의 장막’, 내가 공무원으로 일하는 동안 주기적으로 맞아야 할 필수 예방접종이 아닐까 싶다. 머잖은 미래에 코로나19가 종식되고 코로나19 예방접종이 필요 없어지더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