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이 대중화 되면서 우리는 다양한 정보에 시간과 공간의 제약없이 다가갈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 스마트폰으로 가까운 영화관의 개봉 영화 시간표를 확인해서 그 자리에서 예약할 수 있고 스마트폰 지도를 통해서 가고 싶은 곳까지 거리와 걸리는 시간을 알아볼 수 있다. 이처럼 과거에는 할 수 없던 다양한 일들이 가능하게 된 사례는 하나 둘이 아니다.
하지만 아직 그러한 변화의 물결이 닿지 않은 영역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의료이다. 의료의 목표인 건강이 우리 삶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을 생각해볼 때, 의료에서 유독 변화의 속도가 더딘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의료는 스마트폰으로 영화 시간표를 확인하는 것이나 지하철 노선을 검색하는 것보다도 우리들 삶의 질을 크게 향상시킬 수 있다. 그래서 스마트폰으로 촉발된 모바일 혁신을 의료 영역에서 이루어내는 것이 시급하고 중요한 과제이다.
그런데 왜 의료에서는 다른 분야에 비해서 변화가 더디게 일어나는 것일까. 두 가지 장애물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의사의 권위 의식은 강한데 비해서 사람들의 권리 의식이 약하기 때문이다.
먼저 생각해 볼 것은 의사들의 권위 의식이다. 의사들은 사람들의 건강과 관련하여 자신들이 유일한 전문가라고 생각하고 있다. 일면 타당한 부분도 있지만 그런 자만심이 다른 의견과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게 하는 것이 문제다. 건강과 관련한 모든 문제는 오로지 의사 자신들을 통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의사들은 은연중에 환자들을 어린아이 취급하는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있다. 이는 환자들이 알아듣기 쉽게 자세를 낮추어 설명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이다. 병원 진료실에서 의사들에게 뭐라도 물어보려고 하면 “원래 그런겁니다”와 같이 대답하며 당신의 의견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 경험이 한번쯤은 있을 것이다. 당신에게는 정말 중요한 문제인데 말이다.
이런 의사들의 태도는 자신들의 무지를 권위로 가리려는 시도이다. 의사들은 전문성 추구와 부당한 권위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권위에 기대어 다른 의견을 거부하는 것은 자신감의 부족을 숨기기 위한 것일 뿐이다.
한편, 사람들의 권리 의식 부족도 의료에 혁신을 더디게 한 중요한 원인이다. 지금까지는 대부분의 의학 정보는 의사들과 소수의 관련 업계 종사자들이 독점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의학 정보란 백과사전에 나오는 보편적인 정보가 아니라 환자들 개개인의 혈액, 영상 검사와 같은 것을 말한다. 당신이 병원에서 시행한 검사 결과도 별도의 절차를 거치지 않으면 직접 확인하기 어려웠다. 뿐만 아니라, 당신이 입원 했을 경우 기록될 각종 간호와 진료 기록도 당신이 의지를 갖고 신청하기 전에는 접근하기 어렵다. 실상 당신이 검사 후에 의사에게 듣게 되는 것은 “괜찮습니다”나 “검사 좀 더 해볼까요”와 같은 대답이 대부분이다. 상황이 아주 안 좋을 때에야 비로소 극히 제한된 설명을 들을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책을 샀으면 당신이 원할 때는 언제든 읽을 수 있다. 돈을 내고 다운로드 받은 음악 파일은 당신이 원할 때 언제든 들을 수 있다. 이처럼 당신이 돈을 내고 검사를 받은 의료 정보는 당신의 재산이고 당신 소유이다. 따라서 마치 이메일에 접속하듯이 당신이 원할 때는 언제든지 당신에게 시행된 검사와 간호 및 진료 기록을 손쉽게 열람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람들이 자신의 정보에 대해서 더욱 주도적인 입장을 가져야 한다. 다행히 앞으로는 그럴 수 있다. 기술의 발달로 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의료 정보에 접근할 수 있도록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돈을 내고 받은 검사 결과에 대해서 그 주인은 자신임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오랜 시행착오를 거쳐서 이제 드디어 의사의 부당한 권위 의식과 환자의 권리 의식 부족이 해소될 조짐이 보이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변화의 한 가운데에서 스마트폰을 비롯하여 최근 등장한 새로운 기술들이 큰 역할을 하고 있다. 결국에는 기술의 발전이 의료의 중심을 의사에서 보통 사람들로 옮길 것이다.
저명한 심장 내과 의사이자 미래 의료 전문가인 에릭 토폴Eric Topol이 최근 내놓은 『청진기가 사라진 이후 원제 : The Patient Will See You Now | 에릭 토폴 지음 | 김성훈 옮김 | 이은 감수 | 청년의사 | 2015년 09월 14일 출간』에서도 의사와 환자 역할의 변화에 대해 다루고 있다. 저자는 스마트폰을 비롯한 기술의 발전이 의료계에 가져오는 영향을 심도있게 분석한다. 기술의 발달과 정보의 보편화가 오래도록 지속되어온 의사들의 의료 독점을 끝내고 의료 정보의 주도권을 사람들에게 돌려주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환자들이 자신들의 의료 정보에 대해 더욱 많이 알게 되고 의사와의 관계에서도 이전보다 훨씬 주도적인 역할을 맡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이 책은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는 의료계의 권위주의적 특징에 대해서 살펴본다. 그리고 이에 대항한 유명 인사들의 사례를 통해서 보통 사람들이 자신의 의료를 책임지기 위해서 어떤 태도가 필요한지 생각해본다. 2부에서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 관한 의료 정보를 다루면서 맞이할 수 있는 도전과 과제에 대해 고찰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3부에서는 이러한 거대한 변화가 세상에 미칠 영향에 대해서 전반적으로 살펴본다.
이 책의 원제 ‘The patient will see you’가 무슨 의미인지 살펴보자. 관용적으로 ‘The doctor will see you’는 병원에서 ‘의사 선생님이 곧 봐주실 거에요.’라는 말인데 이제 그 역할이 바뀌었다는 뜻이다. 즉 의사들만 독점하던 의료 지식들을 이제 보통 사람들도 다루게 된 세상이 되었다는 의미를 함축적으로 담고 있다.
한편, 한국어 제목 ’청진기가 사라진 이후’라는 제목도 이 책의 함의를 잘 나타내고 있다. 청진기라는 물건 자체가 변화에 소극적인 의사들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청진기는 1816년 르네 라에네크Rene Laennec가 발명한 이래로 기본적인 구조와 형태가 거의 변하지 않았다. 문제는 현재의 객관적인 시각으로 보면 청진기는 그다지 훌륭한 진단 도구가 더 이상 아니라는 사실이다. 휴대용 초음파기처럼 청진기를 대체할 수 있는 더욱 정확한 도구들이 이미 실용화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의사들은 청진기를 의사가 반드시 사용법을 숙지해야 할 중요한 도구라고 생각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청진기가 처음 발명된 당시에는 오히려 청진기에 대해서 의사들의 격렬한 저항이 있었고 보편화되기까지 20여년의 시간이 걸렸다. 이러한 사실에 미루어볼 때 ‘청진기’는 의사들의 권위 의식을 나타낸 단어이며 이 책의 한국어 제목은 ‘의사들의 권위 의식을 넘어선 미래 의료’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제 나의 이야기를 해보자. 나는 과거에 스마트폰을 이용해서 환자와 의사를 연결해 주는 사업을 했고 지금은 공공병원에서 외과 의사로 일하고 있다. 내 개인적인 경험들을 이 책의 내용에 비추어 보았다. 그리고 앞으로 공공의료가 두 가지의 큰 역할을 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지금부터 소개하는 것은 가난한 이들도 돈이 있는 이들과 마찬가지로 건강을 누릴 권리가 있다는 나의 소신과 원칙에 따른 생각이다.
첫번째는 공공의료에서 스마트폰과 원격의료를 적극 활용하여 저소득층의 의료 접근성을 높여야 한다. 통신기술의 특징은 한번 구축하면 그 이후에는 사용하기 위한 비용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이는 최선의 효율성과 경제성을 가능하게 한다. 달리 말하면 경제적으로 어려운 이들이 가장 쉽고 편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스마트폰을 이용한 원격의료라는 말이다.
혹자는 저소득층이라면 교육수준도 낮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이들이 최신 기술을 어렵게 느끼지 않겠는가 지적할 수도 있다.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실상은 다르다. 2013년에 미국에서 진행한 한 연구에 따르면 응급실에 입원한 노숙자의 70%가 휴대전화를 통해서 건강 관리를 받기 희망했다고 한다. 저자도 책에서 주장한 바와 같이 스마트폰을 이용한 원격의료는 경제적으로 소외된 이들에게 다양한 편의를 제공하는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두번째는, 저자가 앞으로 의료 기술의 발달로 가정 내 치료가 보편화가 될 것이라고 주장한 것에 따른 생각이다. 저자는 미국의 병원의 추세가 외래, 수술, 시술, 중환자 치료를 위한 시설은 확충하는 반면 입원을 위한 일반 병동은 축소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미 혈압이나 혈당을 집에서 측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닌 것에서 볼 수 있듯이 병원에 입원해서 하던 것들의 상당 부분이 집에서 가능해질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는 매우 타당한 분석이며 앞으로 우리나라도 그와 같은 흐름을 따를 것이라고 본다.
참 좋은 세상이다. 이제 병원에 입원하지 않아도 어느정도 돈을 들이면 집이라는 편안하고 익숙한 환경에서 병원과 마찬가지로 진료를 볼 수 있게 된다니.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우리가 누릴 수 있는 편의가 그렇지 못한 이들에게 재앙이 되게 해서는 안된다. 우리들이 필요 없다고 없앤 입원 병실이 누군가에게는 마지막 희망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나는 앞으로 공공의료가 그런 가정 내 치료 환경을 구축할 수 없는 가난한 이들을 위해 최소한의 입원 시설을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미래 의료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청진기가 사라진 이후』를 읽고 느낀 생각을 나누어 보았다. 의료계에 다가오는 새로운 혁신과 그 혁신에 의해서 변화될 의사와 사람들의 역할 변화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세상에 혁신을 일으키는 원동력은 무엇인가. 혁신은 소수의 기득권자들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보통 사람들이 스스로를 세상의 주인으로 인식할 때, 그 세상을 조금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서 혁신이 일어나는 것이다.
(다음 글이 곧 이어집니다.)
마침 이번 주 아툴 가완디 책을 읽었습니다. 신승건님 책 소개를 읽으니 가완디 책 내용과 이어지는 부분이 있어 읽고 싶어졌습니다. 그런데 책 분량이 만만치 않네요 ㅎㅎ
저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 (Being Mortal)’ 먼저 읽고 ‘나는 고백한다, 현대의학을 (Complications)’ 읽었습니다. 두 책 모두 다른 분의 표현처럼 ‘명불허전’ 이었습니다. TED 동영상도 찾아서 봐야겠네요.
형 저도 왔다가요
풍성한 연말 되시길
오늘도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