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기 안타까운 이야기가 하나 있다. 2007년 경북대 병원에서 백혈병 진단을 받은 정종현 어린이에 관한 이야기이다. 종현이는 백혈병 진단 후 3년 간 16차례에 걸쳐 항암치료를 받았다. 그리고 2010년 마지막 항암치료를 남겨두고 있었다. 이를 마치면 완치를 기대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뜻밖의 사고가 발생한다. 마지막 항암치료에서 담당 전공의의 실수로 정맥으로 투여할 항암제인 ‘빈크리스틴vincristine’과 척수강으로 투여할 ‘시타라빈cytarabine’이 서로 뒤바뀌는 사고가 발생한다. 종현이는 열흘 간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다가 9살의 짧은 생을 마감한다.
이후 종현이 부모는 사고 규명을 위해서 자체적인 조사를 벌인다. 그 결과 놀라운 사실이 밝혀진다. 이전에도 같은 사례가 있었으나 병원과의 합의에 의해 은폐되었다는 것이다. 문제의 심각성에 공감한 이들의 주도로 앞으로는 이런 문제가 재발되지 않도록 하는 ‘환자안전법’ 일명 ‘종현이법’이 2014년 12월 29일 국회를 통과한다.
사람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존재하는 병원에서 왜 이런 사고가 일어나게 되었을까. 나는 의사들이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없도록 하는 병원의 업무 관행과 권위 중심 문화가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세계 최고의 병원으로 손꼽는 존스 홉킨스 병원Johns Hopkins Hospital에도 과거에 비슷한 시행착오가 있었다. 『존스 홉킨스도 위험한 병원이었다 원제 : Safe Patients, Smart Hospitals | 피터 프로노보스트, 에릭 보어 지음 | 강병철 옮김 | 청년의사 | 2012년 11월 20일 출간』는 이 병원의 마취과 교수이자 진료 안전성 전문가인 피터 프로노보스트Peter Pronovost가 쓴 책이다. 병원에서 환자의 안전을 위협하면서도 고쳐지지 않고 답습되던 문제들을 개선해 나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이야기는 18개월 된 아기 조시Josie가 어른들이 다른 일을 하고 있는 사이 욕조로 향했다가 뜨거운 물에 화상을 입는 사고로 시작한다. 곧바로 조시는 인근의 존스 홉킨스 병원에 입원하였다. 입원 당시 조시는 60%에 이르는 2도 화상을 입었다. 다행히 치료 후 점차 상태가 호전되어 퇴원을 준비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퇴원 직전 갑자기 찾아온 탈수와 패혈증으로 조시는 사망하게 된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의료진들이 조금만 더 관심을 기울였으면 조시는 아까운 목숨을 잃지 않아도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비극적인 일을 계기로 저자는 진료 안전성에 대한 개선 작업을 시작한다.
저자가 병원의 진료 안전성의 향상을 위해 도달한 결론은 두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체크리스트checklist의 구성 그리고 팀워크teamwork의 개선이다. 이 두 가지가 왜 중요한지 살펴보자.
첫번째로, 체크리스트는 해야 할 업무를 자세하게 나열한 것이다. 의사는 신이 아니다. 사람의 생명을 살린다는 역할 때문에 역사적으로 의사를 신의 대리인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는 옳지 못한 생각이다. 의사도 실수를 할 수 있다. 사람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지금까지는 병원에서 이루어지는 수련이라는 것이 ‘한 번 보고, 한 번 해보고, 한 명을 가르치는’ 방식이었다고 지적한다. 그렇기 때문에 늘 빠뜨리는 것이 생기고 사고가 생긴다고 말한다. 의사들이 자만심에 취해서 감으로 하는 일이 많다 보니 오류가 생기는 것이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 자세하고 실질적인 체크리스트를 만들어 공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타당한 이야기이다. 우리가 화장실을 가면 벽면에 무엇을 언제 청소했는지 확인하는 표가 있다. 화장실 청소도 같은 품질로 똑같이 해내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화장실 청소를 한 번 빠뜨리면 다소 불쾌한 분위기에서 일을 보는 것으로 그치지만 환자를 치료할 때 뭔가를 빠뜨린다면 그것은 생명을 위협할 수 있다. 그래서 저자가 말하는 체크리스트는 그 중요성이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두번째로, 팀워크의 개선이 중요하다. 저자가 말하는 팀워크란 달리 말하면 ‘상호 존중의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의사들은 모든 것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병원 내 다른 구성원도 각자의 위치에서 전문가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나는 병원에 처음 들어왔을 때 의사가 처방을 하는 일을 두고 ‘오더order내린다’고 표현하는 것에 못내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이는 ‘명령을 내린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의사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전달받는 간호사도 스스로 “오더 내려주세요.”라고 한다. 나는 각자 전문적 역할을 맡고 있는 사람들끼리 서로를 상하관계로 규정하는 방식이 불편했다. 그래서 나는 간호사들하고 일할 때에도 ‘처방 내린다’나 ‘오더 내린다’라는 표현보다는 ‘처방한다’는 표현을 쓰고 있다. 간호사들이 인식하거나 못하거나 상관없이 나는 그것이 편하다. 직장에서 함께 일하는 이들을 무의식중에라도 낮추어 보고 싶지 않다.
저자도 병원 내 구성원들이 환자의 건강이라는 한 가지 목표에 집중하여 서로가 존중하는 문화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말한다. 의사소통이 원활해지고 환자에게 가해질 잠재적인 위험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 환자 치료라는 공동의 목표 실현에 더욱 가깝게 다가갈 수 있다.
요컨대 저자는 환자 안전을 위한 개선책으로 체크리스트 구성과 팀워크 개선이라는 방법론을 제시했다. 나는 이 두 가지를 하나의 핵심 개념으로 묶을 수 있다고 본다. 그것은 ‘권위를 내려놓음’이다. 특히 의사들이 권위를 내려놓는 것이 중요하다. 권위보다는 역할에 전념하는 것이 환자 안전의 출발점이다.
의사들은 스스로가 실수할 수 있는 존재임을 인정해야 한다. 그래야만 실수에서 배울 수 있다. 권위를 앞세워 자기 자신은 실수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현실과 동떨어진 자기 기만일 뿐이다. 병원에서 이런 권위 의식은 환자에게 위험을 끼칠 수 있다.
최근 서울 양천구의 다나의원에서 최소 70여명에게 C형 간염이 집단 감염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원인이 주사기의 재사용이라고 하니 실로 충격적인 일이다. 이 사건의 배경에는 의사와 그 배우자의 권위적인 지시와 직원들의 무비판적인 실행이 있다. 이처럼 권위를 앞세우는 의사와 그 주변의 무비판적인 추종은 결국 환자에게 해를 끼친다.
존스 홉킨스 병원에서 회자되는 우스갯소리를 하나 소개한다. 2000년대 초 존스 홉킨스 병원장이 급한 볼일로 중환자실로 들어가려고 했다. 이때 20대 중반의 신입 간호사가 병원장을 가로막으며 “손은 씻고 들어가셔야죠!”라고 했다. 그러자 병원장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손을 씻으러 갔다고 한다. 그 일은 하나의 상징이 되었다. 10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 존스 홉킨스 병원의 수술장이나 중환자실에 들어갈 때는 사람들이 “저 손 씻었어요!”라고 하나의 관용구처럼 외치고 있다.
진료 안전성에 대한 인식이 자리를 잡는 것이 처음에는 어렵지만 한 번 뿌리를 내리면 그 자체가 상식이 되고 오히려 지키지 않는 이들이 지탄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그것이 존스 홉킨스 병원장일지라도 말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인식이 환자의 안전에 기여한다는 사실이다.
나는 몇 년 전에 지인의 초대로 미국 볼티모어Baltimore에 위치한 존스 홉킨스 의과대학과 병원에 다녀온 적이 있다. 세계 최고의 병원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대단한 시설이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내가 그 병원을 둘러보며 받은 인상은 예상과 사뭇 달랐다. 시설은 우리나라의 주요 대학병원이나 대기업 재단 병원에 비해 크게 나을 것이 없었다. 나는 무엇이 이들을 세계 최고로 만들었는지 궁금했다.
그리고 이제 그 답에 한걸음 더 다가선 것 같다. 존스 홉킨스 병원을 최고로 만든 것은 병원 곳곳에 깃든 환자 우선의 철학이었다. 결국 차이를 만드는 것은 외형이 아니라 내면이라는 진실을 새삼 느끼며 마지막 책장을 덮었다.
(다음 글이 곧 이어집니다.)
잘 읽었습니다.
저도 지난 주말 내내 병실을 지키다 와서 그런지
이번 글은 특히 더 와닿는 점이 많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