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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속 ‘웰다잉’

‘웰다잉Well-dying’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점차 늘고 있다. ‘웰다잉’을 글자 그대로 옮기면 ‘잘 죽는다’는 뜻이다. 아직 그 정의가 명확하게 정리되지는 않았지만, ‘품위 있고 존엄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이라고 하면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웰다잉’이란 말이 낯설어도, ‘웰빙Well-being’이란 말은 한 번쯤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알다시피 쾌적한 환경에서 즐겁게 사는 걸 ‘웰빙’이라고 한다. ‘웰다잉’은 그것을 죽음에 적용한 것이다. ‘웰빙’의 죽음 버전이 곧 ‘웰다잉’이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웰다잉’이란 저마다 꿈꾸는 이상적인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더 나은 삶의 마지막을 준비해 가는 과정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죽음을 편안하게 이야기한다는 게 말처럼 쉽지는 않다. 일례로, 의사들은 자기 환자와 그 가족들에게 환자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전해야 할 때 큰 어려움을 느낀다. 곧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건 환자와 가족 모두에게 큰 고통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현대 사회에서 죽음은 가급적이면 서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주제이다.

하지만 죽음에는 또 다른 면도 있다. 인류 역사상 죽음만큼 수많은 사람들이 오래도록 고민해온 주제도 드물다. 종교나 문화라는 것도 결국은 인류가 죽음이라는 미지의 영역을 이해해 온 하나의 방식의 집합이라고 할 수 있다. 가장 궁금해하면서도 그와 동시에 가장 금기시되는 대상인 죽음. 사람들은 어째서 죽음에 대해 이처럼 이중적인 태도를 가지게 된 것일까. 수많은 종교와 문화가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일상 속에서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길 꺼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에 그 힌트가 될지도 모르는 오래된 이야기가 하나 있다.

이솝 우화 ‘여우와 신포도’. 어릴 적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이야기다. 어느 날 길을 가던 여우가 나무 위에 매달린 먹음직스러운 포도를 발견한다. 하지만 포도가 나무 위에 너무 높이 매달려있어서 여우는 도저히 닿을 방법이 없다. 결국 여우는 포도를 따 먹을 수 없는 현실을 깨닫는다. 여우는 마음속으로 ‘저 포도는 분명 신포도가 분명해’라고 말하며 발걸음을 돌린다.

우리가 죽음을 마주할 때가 바로 그렇지 않은가 싶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는 죽는다는 걸 알지만, 죽음의 실체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죽은 후에 ‘나’는 어디로 가게 되는지, 아니 그전에 ‘나’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가 죽은 후에도 어떤 식으로든 남아있기는 할 건지. 결국 우리는 여우의 길을 택한다. 더 이상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 나아가 죽음 자체를 이야기하면 안 될 대상으로 바꾸어 버린다.

반면에, 죽음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다른 방법을 권한다. 예컨대 ‘죽음이란 무엇인가’의 저자 셸리 케이건Shelly Kagan 교수는 ‘죽음에 관한 더 많은 대화’야 말로 죽음에 대한 막연한 공포를 극복할 수 있는 해법이라고 강조한다. 죽음이라는 금기 아닌 금기를 마주할 때마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현대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큰 메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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