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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표지 이미지

생각해보면 나는 이미 몇 번 죽었었다. 수사적 표현이 아니다. 의사들은 나를 살리려고 온 신경을 집중한 채 나의 가슴을 열어젖혔고, 나의 심장은 그 의사들이 실수하지 않도록 잠시 동안 멈춰 기다렸다. 흔히 말하듯 심장의 박동을 생명의 기준으로 삼는다면, 나는 이미 몇 차례 죽었다가 다시 살아 돌아온 셈이다.

그 경험은 나에게 지워지지 않는 세 가지 큰 영향을 남겼다. 첫 번째로, 삶에 대한 강한 집착이다. 모든 걸 내려놓고 포기하고 싶은 순간마다, ‘내가 이 삶을 어떻게 얻었는데.’라고 되뇌며 독하게 버텼다. 한편으로는 나를 살리려고 고생한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할 수 없었던 마음도 있었다.

두 번째로, 살면서 뭔가를 반드시 이루어내야 하겠다는 집착이 없다. 그게 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저 나를 사랑하는 가족을 중심으로 마음이 맞는 주변 사람들과 교류하며 주어진 삶이 끝날 때까지 평온한 시간을 보낼 수 있으면, 난 더 바랄 게 없다.

세 번째로, 그래서 나는 이 삶을 소중한 선물이라고 여긴다. 이 선물을 품은 내가 할 일은 뭔가 대단한 것을 이루기 위해 스스로 산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매사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어진 생명을 잘 지키며 남은 시간을 잘 누리는 것이라 믿는다. 그것이 내가 죽는 날까지 변치 않고 이어가고 싶은 삶의 방식이다.

얼마 전 인터넷 기사를 읽다가 나의 이러한 평소 생각과 많은 부분이 겹치는 글을 발견했다. 조선일보의 김지수 기자가 2019년 말에 이어령 선생과 나눈 인터뷰 기사였다. 당시 이어령 선생은 2017년 암 선고를 받은 후 항암치료를 마다한 채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집필활동을 이어오고 있었다.

인터뷰에서 김지수 기자는 이어령 선생에게 생의 진실이 무엇인지 묻는다. 그 질문에 이어령 선생은 “모든 게 선물이었다.”고 답한다. 그러면서 “내가 내 힘으로 이뤘다고 생각한 게 다 선물이었다.”고 덧붙인다. ‘삶은 곧 선물.’ 이제 삶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이어령 선생이 내린 결론이다.

이 인터뷰 기사는 이후 사람들 사이에서 큰 공감을 불러일으키면서 회자되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책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김지수 , 이어령 지음 | 열림원 | 2021년 10월 28일 출간>이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삶과 죽음에 대한 빛나는 대화’라는 부제의 이 책은 김지수 기자가 이후 1년여의 시간 동안 이어령 선생의 평창동 자택을 방문하여 인터뷰한 내용을 담고 있다. 보통은 저명인사들이 책을 낸 뒤 홍보의 일환으로 언론 인터뷰에 나서는 경우가 많은데 이 책은 반대로 인터뷰가 책 출간으로 이어진 셈이다.

이어령 선생은 1956년 한국일보에 <우상의 파괴>라는 글을 실으며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그의 나이 22살 때의 일이었다. 이어령은 그 글에서 인습에 매몰된 한국 문단 기성세대들의 권위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후 대학교수와 평론가로 활동하며 초대 문화부 장관으로 서울올림픽 개폐회식을 연출하는 등 우리나라의 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겼고, 2000년대 들어서는 디지로그, 생명자본을 비롯한 시대를 앞서간 발상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의 의식 수준을 끌어올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런 그도 머지않아 찾아오게 될 죽음을 앞두고 있다. 이어령 선생이 책에서 직접 밝힌 바에 따르면 올해 3월 이후에는 그를 볼 수 없을 거라고 한다. 한 시대를 이끌었던 거인, 이어령 선생이 우리 곁에 함께 할 시간도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이어령 선생은 책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을 통해 그동안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고, 죽음을 앞둔 소회를 담담하게 털어놓는다. 암을 투병하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고통을 담담히 털어놓다가도, 죽는 순간까지 지적 여정을 멈추지 않겠다는 의지만큼은 내려놓지 않는다. 그러다가도 어느 지점에서는 죽음을 통한 궁극의 안식을 내심 기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김지수 기자는 인터뷰 내내 안타까움을 숨기지 않는다. 그것은 죽음을 앞두고 있는 이어령이라는 한 인간이 처한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이기도 하지만, 이어령을 떠나보내야 하는 우리들의 처지에 대한 안타까움이기도 하다. 김지수 기자가 이어령 선생과 나누는 대화에서 한 마디도 놓치지 않기 위해 무척이나 애를 쓰는 모습들이 활자 너머까지 전해진다.

하지만, 너무 과하면 모자람만 못하다고 했나.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한 가지 아쉬움이 남았다. 이어령 선생이 남기고자 한 메시지를 떠나서, 기존의 권위를 타파하여 세상에 이름을 알린 이가 이제는 권위 그 자체가 되어버렸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질문과 대답이라는 인터뷰의 형식은 따르고 있었지만, 그들 사이에는 결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었다. 이어령 선생은 말하고 김지수 작가는 그 말을 떠받들듯 받아적었다. 스승의 말을 무비판적으로 따르는 모습은 이어령 선생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을 텐데. 끝내 아쉬움이 남는 이유이다. 책의 주제이자 공동 저자인 이어령이라는 인물이 그동안 우리 사회에 끼쳐온 영향력, 그리고 그의 상징과도 같은 반권위적 가치를 되새겨본다면 더욱더 그러하다.

한편으로 책을 읽는 내내 한 가지 의문이 가시지 않았던 부분이 있었다. 이어령 선생은 책에서 여러 차례 이 책을 사후에 내기를 바란다는 뜻을 밝혔다. 그런데 이 책을 이어령 선생이 살아있는 현재 시중 서점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은 어째서일까. 책 속 어디에도 이어령 선생의 바람과 다르게 이 책이 이어령 선생 생전에 나오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은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이 부분에 대해 저자에게 직접 물어보았다.

먼저, 김지수 기자 본인은 이 책에 코로나19와 관련한 생명의 반작용 등 지금 이 시대의 이야기가 담겨 있기 때문에 시의성이 있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이어령 선생도 책에서는 사후에 출간되길 원한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독자들의 반응을 함께 보고 싶어 했다고 한다. 의문은 해소되었으나, 애초에 그런 내용을 책에 명시했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다.

마지막으로, 이 책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을 위해 덧붙이자면 앞서 소개한 기사올해 1월 김지수 기자가 이어령 선생을 다시 인터뷰한 기사를 먼저 읽어보길 권한다.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에 담긴 내용은 기본적으로 이 두 기사의 확장이다. 핵심 내용은 기사에서 나온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새로운 발상으로 우리나라 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이어령이라는 인물이 삶의 마지막 순간을 앞두고 남기는 메시지를 손에 잡히는 책 한 권으로 간직하고 싶은 독자라면 이 책은 꽤 좋은 선택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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