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래된 독자들은 다들 알지 싶다. 내가 쓴 서평에는 어떤 정형화된 흐름이 있다는 걸. 내 글은 보통 개인적인 일화를 하나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만약 적당한 이야깃거리가 없다면 그 당시 사회적인 이슈를 끌어오기도 한다. 그 또한 마땅치 않다면 영화를 소재로 하는 경우도 가끔 있다.
어쨌든 하나의 그럴듯한 이야기로 화제를 꺼낸다. 이어서 최근에 인상 깊게 읽었던 책 한 권을 소개한다. 책의 저자가 하려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그리고 왜 그런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지를 살펴본다. 책을 통해 새로운 관점을 얻게 되었다면 조금 더 자세히 짚고 넘어간다. 독자들에게는 내가 얻은 새로운 관점을 슬쩍 권해본다. 이때 책은 앞에 나온 상황에 대한 남다른 관점을 제시하는 매개체로 중심을 잡아준다. 그동안 백여 편이 넘는 서평을 쓰는 동안 어느덧 익숙한 패턴으로 자리 잡았다.
『의사의 감정 다니엘 오프리 지음 | 강명신 옮김 | 페가수스 | 2018년 06월 05일 출간』을 읽고 나서도 그런 방법을 시도하려고 했다. 마침 주제도 나쁘지 않았다. 의사라면 환자의 슬픔에 공감해야 한다는 게 이 책의 핵심 주제다. 이렇게 한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을 정도로 명확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책이다. 뭔가 근사한 글을 쓸 수 있으리란 자신감이 솟아났다.
『의사의 감정』은 뉴욕의 벨뷰 병원Bellevue Hospital에서 근무하는 의사 다니엘 오프리Danielle Ofri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뉴욕의 벨뷰 병원은 우리나라로 치면 공공병원에 해당한다. 중산층 환자도 진료한다지만, 아무래도 사회적 취약 계층의 버팀목으로서 존재 의의가 크다. 마침 내가 일했던 곳도 공공병원이다. 그래서 더욱 나는 이 책의 맥락과 어울리는 어떤 이야기를 내 기억 속에서 꺼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은 지도 벌써 한 달이 흘렀다. 글을 쓰고 지우기를 반복했다. 글 하나에 이렇게 오래 매달린 적이 전에 있었나 싶다. 결국에는 한 가지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환자의 슬픔에 공감한 기억을 꺼낼 수 없는 것은 기억력의 문제가 아니었다. 저자가 겪었던 감정들이 나의 기억에는 없었다.
『의사의 감정』의 처음과 끝을 관통하는 하나의 이야기가 있다. 줄리아라는 사람에 대한 저자 오프리의 기억이다. 줄리아는 38세의 과테말라 출신의 여성이다. 그녀는 야간에는 화장실 청소를 하며 하루하루 생계를 이어가는 불법 이민자다. 줄리아는 조금씩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했는데, 결국 울혈성 심부전이라는 진단이 내려졌다.
오프리는 줄리아의 주치의였다. 그녀에게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야 했다. 그게 오프리가 줄리아의 주치의로서 해야 할 일이었다. 오프리는 줄리아에게 “심장이식이라는 해결책이 있지만, 당신이 불법 이민자이기 때문에 살 수 있음에도 죽어야 한다.”는 냉혹한 현실을 알려야 했다.
하지만 오프리는 그럴 수 없었다. 이후 오랜 망설임의 시간이 이어진다. 결국 더 이상 미룰 수 없을 때가 되어서야 줄리아에게 그 사실을 알린다. 오프리는 의사이기 전에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잔인한 운명을 위로하기 위해 진심을 다한다.
오프리는 단지 위로만 전한 게 아니었다. 줄리아가 심장이식 수술을 받을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 오프리의 진심에 공감한 동료 의사들도 백방으로 뛰어다닌다. 여러 사람들이 뜻을 모은 끝에 드디어 줄리아는 심장이식 수술을 받을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얼마 후 줄리아는 오프리와 동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건강한 심장을 이식받는다. 성공적인 수술이었고 이제 회복될 일만 남았다.
하지만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회복을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줄리아에게 갑자기 뇌졸중이 찾아온다. 줄리아의 가슴에 자리 잡은 새 심장에서 건강한 박동이 전해지자, 그동안 병약한 심장에 적응한 뇌혈관들이 이를 버티지 못하고 터져버린 것이다. 줄리아는 그토록 기다리던 심장이식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만다.
오프리는 줄리아의 숨이 잦아드는 순간 그 곁을 지킨다. 그동안 함께 나누었던 슬픔과 기쁨의 순간들을 되돌아본다. 눈앞에 다가온 이별을 앞에 두고 아쉬워하는 둘은 서로에게 더 이상 의사와 환자가 아니다. 둘도 없이 소중한 친구다.

마지막 책 장을 덮으며 의사의 역할에 관하여 생각해보았다. 의사란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의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환자를 치료한다는 말, 의사의 역할을 모두 담기에는 부족하다. 의사의 역할은 환자를 치료하는 것에만 머물지 않는다. 환자의 아픔에 슬픔으로 공명하는 것도 의사가 저버려서는 안 되는 역할이다. 의사가 환자의 고통 앞에서 슬퍼하지 않는다면 처방전 끊어주는 자판기와 다를 바가 없다.
이제 와서 돌아보니 나는 환자의 슬픔에 공감하는 마음의 여유가 부족한 의사였다. 부끄러운 진실이지만 부정할 수 없었다. 그동안 나는 제 딴에는 환자의 처지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꽤 괜찮은 의사라고 자부했지만, 그것은 나만의 착각이었다. 환자의 아픔을 절실하게 느껴본 경험을 단 하나도 되살릴 수 없다는 게 그 증거였다.
어쩌면 나 혼자만 환자의 아픔에 공감한다고 믿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동안 근거 없는 자신감에 취해 “네, 걱정하지 마세요.”, “그건 원래 그런 거에요.”라고 말한 적이 적잖았다. 내가 그러는 동안 환자들은 얼마나 답답했을까. 정작 환자들은 소외되는 기분을 느꼈을 것이다.
『의사의 감정』을 통해 적어도 한 가지는 깨달을 수 있었다. 의사가 자신의 공감 능력을 믿는 것은 위험하다. 더 이상 공감하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기 때문이다. 단련하지 않는 근육이 약해지듯 돌아보지 않는 마음은 무뎌지기 마련이다. 나 자신을 돌아보고 하는 말이다.
(다음 글이 곧 이어집니다.)
언제나 술술 읽히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서평의 내용에 감동하고 성찰하는 삶의 자세를 다시금 다짐해 봅니다.
글 읽고 많은 생각 오 갑니다
그가 없는 것 내가 있고, 내가 없는 것 그가 있어, 서로 의사와 환자로 살아가는 세상
난 환 자로 더 많이 살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
감사합니다 좋은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