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로 건너뛰기

양산 쓰는 남자

푹푹 찌는 무더위가 매일 같이 이어지는 요즘이다. 아침 출근길에 나서면 아직 이른 시각인데도 벌써 공기가 후덥지근하다. 흡사 거대한 한증막을 지나 출근하는 기분이다. 몇 분만 걸어도 등줄기에 땀이 주르륵 내려온다. 거기에 직사광선까지 수직으로 내리꽂으면 정신이 아찔해질 지경이다.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선풍기 앞에 얼굴을 들이밀고 나서야 가까스로 정신이 돌아온다.

일단 건물에 들어와서 창밖에 지글지글 익고 있는 풍경을 바라보면 도저히 바깥으로 나설 엄두가 나질 않는다. 하지만 직장인이 밖에 나가는 게 싫다고 나가지 않을 수 있는가. 일이 있으면 나가야지. 얼마 전 외부 회의를 마치고 건물 밖으로 나오는 길이었다. 갑자기 쏟아지는 햇빛에 눈이 부셔 순간적으로 손을 눈썹 위로 올렸다. 그런데 옆에 있던 과장과 계장들은 좀 더 현명한 전략을 시연했다. 도구를 쓴 것이다. 모두 약속이나 한 듯 양산을 촥 펴서 머리 위로 올렸다.

양산을 쓴 여자들 무리 속에 나 혼자 햇볕에 머리를 태우고 있었다. 손으로 만져보니 뜨끈했다. 그 모습을 보기 안쓰러웠는지 일행 중 누군가 내 머리 위로 양산을 기울여 주었다. 처음에는 괜찮다며 사양했지만 결국 호의가 예의를 이겼다.

처음 경험해 본 양산의 효과는 그야말로 기대 이상이었다. 양산이 만든 음영 덕분에 더 이상 눈이 부시지 않았다. 양산의 진가는 시간이 지날수록 확실히 드러났는데, 목덜미를 가열하던 복사열이 차단되어 평소보다 땀도 흐르지 않았다. 이 좋은 걸 이제껏 모르고 있었다니.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인간은 도구를 써야 한다는 것, 그리고 오래 살고 싶으면 여자 말을 들어야 한다는 것.

이제 내 삶은 양산을 쓰기 이전과 이후로 완전히 나뉘었다. 이글거리는 태양은 더 이상 내 머리를 데우지 못한다. 등을 타고 흐르는 땀에 셔츠가 달라붙는 불쾌함도 이전에 비하면 한결 나아졌다. 실제로 양산을 써보기 전까지는 전혀 몰랐던 경험이다.

어느 뉴스 보도를 보니 땡볕 아래에서 사람의 머리 온도는 1분 만에 섭씨 50도까지 올라가는 데 양산을 쓰자 체온보다 아래인 섭씨 30도까지 떨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양산을 쓰는 것은 나무 그늘을 가지고 다니는 것과 같다고도 한다. 휴대용 나무 그늘이라니. 정확히 내가 경험한 바로 그것이다.

나의 고정관념을 흔든 것은 양산의 실용적 효과뿐만이 아니었다. 나는 이제껏 남자가 양산을 쓰고 다니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웬걸. 실제로 양산을 쓰고 길에 나선 40대 초반의 아저씨를 이상하게 쳐다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호기심 어린 시선조차 없었다. 그런데 아직 결론을 내리기에는 일렀다. 그것은 어쩌면 나와 함께 양산을 쓰고 걸어가고 있는 여자 과장과 계장들의 후광 덕분일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양산 쓰기가 혼자서도 감행할 만한 일인가를 시험해 보기로 했다. 마침 홀로 외근을 나갈 일이 있었다. 나는 보건소 건물을 나서며 양산을 펼쳐 들었다. 그리고 10여 분을 걷는 동안 주변 행인들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무관심한 듯 관심 있게 관찰했다. 과연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2023년 여름 부산, 남자가 폭염에 양산을 쓰는 건 그 누구의 이목도 끌지 않는 일이었다.

하긴, 내가 이전에 양산을 쓴 남자를 마주쳤더라도 아마 별생각이 들지 않았을 것 같다.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거나, 좀 더 인상 깊게 보았더라도 저렇게 하면 덜 덥긴 하겠다고 생각하며 내심 부러워했을 수는 있겠다. 아무튼 그런 생각이 내 머릿속에 머무는 시간은 10초 이상을 넘기지 않았으리라.

사실 길에서 마주치는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가 뭐 그리 중요한가. 설령 나를 조금 특이하다고 생각한들, 나에게 직접 다가와 왜 그러느냐고 묻지만 않는다면 나의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은 일이나 마찬가지일 텐데. 혹여라도 어떤 오지랖 넓은 이가 나에게 다가와 “남자가 양산을 쓰다니 정말 이상하군요.”라고 말한다고 해도 내가 그 사람의 기준을 따라야 할 이유도 없고 말이다.

우리가 살면서 정말 부끄러워해야 할 일은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다. 그런데 양산을 쓰는 건 전혀 그런 일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양산을 쓰는 걸 보고 또 다른 남자들도 양산을 쓸 결심을 한다면, 그래서 그들도 한낮의 땡볕을 피할 수 있게 된다면, 그건 분명 내가 그들에게 도움이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남자들도 양산을 쓰자. 뜨거운 햇볕 아래에서 괜히 고생하지 말고. 더운 여름철, 삶의 질이 확 올라간다. 내가 해보니 그랬다.

“양산 쓰는 남자”의 3개의 댓글

  1. 지인 중에 bts가 양산을 한번 써주면 남자도 다들 쓸 수 있을 거 같다고 한 말이 떠올랐습니다~ 무더위 조심하세요!

  2. ㅎㅎㅎ 저도 올해부터 양산 쓰고 다니는데요. 이렇게 좋은 걸 왜 안 쓰고 다녔을까 후회막급 했습니다! 그리고 요즘 양산 쓴 남자 정말 많이 보입니다. 젊은 사람 뿐만 아니라 어르신들도 많이 보입니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