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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에 대한 책임감

20년쯤 전의 이야기다. 나의 아버지는 이제 막 대학생이 된 아들에게 전부터 보여주고 싶던 것이 있었다. 바로 반평생을 은행원으로 일하며 삶의 터전으로 살아온 서울의 도심이었다.

하루는 날을 잡아 함께 나섰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가 서울역에 도착했을 때였다. 그곳은 세기말의 흥분과 바로 몇 해 전 우리나라를 휩쓴 IMF 사태로 억눌린 분위기가 서로 뒤엉켜 있었다.

눈에 잘 띄는 곳에서는 교회에서 나온 이들이 확성기가 터질 정도로 목청을 높이고 있었고, 눈에 잘 안 띄는 곳에서는 얼마 전까지 누군가의 가족이었을 사람들이 모든 것을 잃고 삼삼오오 모여서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또 다른 쪽에서는 한 무리의 노숙자가 헌혈을 마치고 얻은 것으로 보이는 빵과 우유로 끼니를 때우고 있었다. 빵과 우유를 허겁지겁 입에 밀어 넣기에 바쁜 노숙자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눈길이 갔다. 그런 모습을 본 아버지가 내게 조용히 물었다.

“저 사람들이 불쌍해 보이냐.”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아버지는 무덤덤하게 말을 이어갔다.

“저 사람들이 배고파서 헌혈한 피가 네 생명을 구할 수도 있음을 잊지 마라.”

나는 이 말을 듣고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노숙자, 달리 말해 내가 배려해야 할 대상이라고 여긴 소위 사회적 약자들이 어쩌면 나의 생명을 살리는 이들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날 아버지의 한마디는 앞으로 내가 업으로 삼게 될 의료에 대한 관점을 처음부터 다시 정의하게 하였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언젠가 의사가 되어 내가 배운 지식과 기술을 남에게 베푸는 것이 앞으로의 내게 주어진 소임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세상의 존중과 대우가 내심 기대되기도 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이 한마디는 우리가 모두 결국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있고 서로가 서로에게 빚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 많이 배운 사람이 위에 있는 것이 아니고, 가난한 사람도 아래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어 살아가고 있다. 그러므로 타인의 고통에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남의 일이 곧 나의 일과 같음을 잊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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