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학 교수나 회사 고위 임원들 중에는 맞춤법에 남달리 엄격한 이들이 있다. 한 손으로 안경을 만지작 거리며 혹시라도 틀린 글자는 없나 종이에 얼굴을 파묻고 샅샅이 훑어 내려간다. 정작 더 중요하게 살펴야 할 내용의 충실도보다 띄어쓰기나 철자를 고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쓴다. 완벽주의자라서 그렇겠거니 하며 긍정적으로 생각해보려 하다가도, 그들의 연구나 경영 실적을 접하게 되면 나도 모르게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영국의 행정학자 노스코트 파킨슨Northcote Parkinson은 일찍이 “사람들에게는 중요한 문제일수록 짧게 다루거나 뒤로 미루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그 대신에 사람들은 쉬운 문제를 더 많은 시간을 들여 꼼꼼하게 다룬다. 쉬운 문제 앞에서 편안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마치 신입 사원이 가져온 서류의 맞춤법을 지적하며 만족감을 느끼는 상사처럼 말이다.
우리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문제들도 그렇다. 다루기 어렵고 많은 시간을 통한 고민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바로 그 어려움 때문인지 실제로는 깊게 다루어지지 않는다. 이를 테면 ‘우리 삶의 의미’, ‘인류의 미래’와 같은 문제가 그렇다.
이런 것들에 대한 깊이 있는 고민은 우리가 살면서 방향을 잃고 헤매일 때 나침반 처럼 올바른 길을 제시한다. 당신이나 나나 정신없이 돌아가는 일상을 살고 있지만, 잠시 시간을 내서라도 우리 삶과 미래에 관하여 진지하고도 꾸준한 대화를 이어가야 하는 이유다. 내가 이 블로그를 집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캐나다 토론토에서는 금광 재벌 피터 멍크Peter Munk의 후원으로 매년 두 차례씩 ‘멍크 디베이트Munk Debates‘라는 이름의 토론회가 열린다. 여기서는 ‘세계가 당면한 가장 중요한 문제’를 주제로 다룬다. 이 토론회의 참가자들은 국제적으로 실력이 검증된 지식인들로 구성되며, 2인 1조를 이루어 격렬한 토론을 벌인다.
『사피엔스의 미래 원제 : Do Humankind’s Best Days Lie Ahead? | 알랭 드 보통 , 말콤 글래드웰, 스티븐 핑커, 매트 리들리 지음 | 전병근 옮김 | 모던아카이브 | 2016년 10월 24일 출간』는 2015년 11월에 열린 멍크 디베이트를 엮은 책이다. 토론 주제는 인류의 미래, 즉 ‘인류의 앞날에 더 나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가’이다.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심리학자인 스티븐 핑커Steven Pinker와 세계적 과학 저널리스트 매트 리들리Matt Ridley가 찬성 팀으로, 우리나라에서도 인기가 많은 작가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과 독보적 경영저술가 말콤 글래드웰Malcolm Gladwell이 반대 팀으로 나뉘어 격론을 벌인다. 찬성 팀은 각종 수치를 들어 인류의 미래가 밝다고 확신하는 반면, 반대 팀은 철학적 문제를 제기하며 역공에 나선다.
이 책은 내용과 더불어 그 구성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흥미롭게도 찬성 팀의 주장을 담은 글은 페이지의 왼편에 반대 팀의 주장을 담은 글은 페이지의 오른편에 치우치게 구성했다. 중간에 배치된 사회자의 발언을 중심으로, 좌우에 상반된 의견을 배치하여 토론의 긴박감을 살렸다.
이 구조는 아마도 탈무드תַלמוּד에서 빌려온 온 것임이 분명해 보인다. 우리가 흔히 유대인들의 지혜를 담은 책이라고 알고 있는 탈무드는 히브리어로 ‘가르침’ 또는 ‘배움’이라는 의미다. 말 그대로 유대인 사회의 모든 지식과 지혜를 망라한 책이다. 탈무드는 종교적인 경전일 뿐만 아니라 유대인 사회의 각종 관습과 규율을 망라한 판례집이기도 하다.
사실 우리나라 서점에서 접할 수 있는 가벼운 이야기 책은 탈무드의 진짜 모습이 아니다. 유대인의 탈무드는 그 구조부터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유대인들이 실제로 읽는 탈무드를 펼쳐보면, 중심을 차지하는 글인 미슈나משנה와 그 주위를 둘러싸며 배열된 글인 게마라גמרא로 구성되어 있다. 미슈나는 논쟁의 대상이 되는 상황에 대한 서술이고, 게마라는 그 상황에 대한 랍비들의 해석이나 견해를 담은 글이다.
상황을 놓고 벌어지는 치열한 논쟁을 종이 위에 그대로 재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양한 시각이 공존하며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것. 그것이 탈무드의 핵심이다. 탈무드의 형식을 빌려서 ‘멍크 디베이트’를 책으로 만든 게 누구의 발상인지는 몰라도 아주 탁월한 선택인 듯 싶다.

이제 다시 토론의 내용으로 돌아가보자. 먼저 찬성 팀의 생각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렇다. 스티븐 핑커는 역사를 돌아보면 인류는 점점 더 오래 살고 건강해졌으며, 이런 사실은 각종 자료가 뒷받침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앞으로도 더욱 밝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같은 찬성 팀의 매트 리들리는 인류의 기술과 지식이 되돌릴 수 없을 만큼 광범위하고 견고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평가한다. 인류가 과거의 험난한 시절로 돌아가는 일은 없을 거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반대 팀의 생각은 다르다. 말콤 글래드웰은 인류가 발달시킨 강력한 기술이 역으로 인간을 파멸로 이끌 수 있음을 경고한다. 전기를 만드는데 사용된 원자력이 폭탄으로 활용되어 더 많은 인간을 죽일 수 있게 된 것을 예로 든다.
알랭 드 보통은 말콤 글래드웰 처럼 반대 팀에 서있으면서도 조금 결이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그는 물질적인 만족이 행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그보다는 정신적인 만족의 여부가 인류의 미래를 결정하는 데에 더욱 중요한 요소라고 말한다.
공명이란 어떤 물체가 직접 맞닿아있지 않은 다른 물체를 진동시키는 현상을 말한다. 서로 다른 사람의 생각 사이에서도 이런 공명과 비슷한 현상이 일어날 때가 있다. 알랭 드 보통의 생각을 따라가는 동안 나의 느낌이 그랬다. 내 생각을 소개하면 이렇다.
인류는 이제껏 ‘생산’이 더 나은 미래를 약속한다고 믿어왔다. 더 많은 음식, 더 많은 옷, 더 많은 자동차가 곧 더 나은 미래를 의미했다. 양적 성장 후에는 질적 향상으로 그 안에서 관심사가 이동하기도 했지만, 어쨋든 ‘생산’의 연장선 위에 있다는 점에서는 결국 같았다.
생산된 모든 것들은 누군가에게 소유된 형태로 존재했다. 공원이나 도서관처럼 예외적으로 공공의 목적을 위해 운영되는 것도 있지만, 생산된 무언가의 대부분은 개인적 소유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사회 전체로 보았을 때에는 생산이 넉넉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소유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이들의 몫이었다.
한편, 소유한 사람이 쓰지 않는 동안에는 쓰지 않은 채로 낭비되었다. 예컨대 자동차는 만들어진 후 폐차에 이르는 시간의 95% 가량을 주차장에서 보내지만, 그렇다고 다른 사람이 그 시간 동안 활용할 수 없었다. 요컨대 ‘생산’의 시대에는 편중과 낭비라는 근본적인 결함이 있었다.
이를 해결하고자 나타난 것이 ‘공유’이다. 그 시작은 인터넷을 통한 정보의 공유였다. 물론 정보 공유의 수단을 들자면 인터넷에 앞서 인쇄술, 그리고 그 이전의 점토판의 발명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하지만 인터넷은 그 비용과 속도를 그 전과 후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바꾸어 놓았다.
정보에 이어서 사람들은 인터넷으로 집과 자동차 같은 개인 소유물을 공유하는 방법도 터득했다. 내가 쓰지 않는 동안에 누군가 필요한 사람이 내 물건을 쓸 수 있도록 하는 게 가능해졌다. 사람들은 편중과 낭비를 줄일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또 다른 중요한 의미가 있다. ‘생산’의 시대에는 선택된 이들에게만 혜택이 돌아갔다면, ‘공유’의 시대에는 그보다 더 많은 이들에게 혜택이 돌아간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직접 물건을 소유할 능력이 없더라도 말이다.
그렇다면 공유가 우리의 더 나은 미래를 약속한다고 할 수 있을까. 아니다. 공유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바로 소외된 사람들의 존재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풍요로움을 나누고 누리는 동안, 어딘가에서는 공유의 생태계에 들어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공존’이라고 생각한다. 생산과 공유, 그리고 공존은 언뜻보기에는 비슷하지만 명백한 차이가 있다. 생산은 ‘물건’의 양을 늘리고, 공유는 그 접근을 늘리는 것이었다면, 공존은 소외된 ‘사람’을 줄이는 것이 관건이다. 나는 ‘공존’이 더 나은 미래의 궁극적인 모습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생산’의 시대를 지나 ‘공유’의 시대에 도달했다. 이제 우리가 힘써 도달해야 하는 곳은 ‘공존’의 시대다. ‘인류의 앞날에 더 나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가’라는 문제의 답은 ‘우리가 공존을 터득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결정되지 않을까. 내 생각은 그렇다.
(다음 글이 곧 이어집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이 졸업하신 대학과는 다른 한 대학의 의예과 학생입니다.
선생님의 글, 평소에 잘 읽고 있습니다. 댓글을 다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네요.
현재 제 앞에 놓인 여러 과제 중에 가장 쉬운 과제부터 꼼꼼하게 하고 있던 저였기 때문에
이 글 초반부를 읽고 상당히 뜨끔했습니다…… ^^
중요한 것을 먼저 하는 것은 참 힘든 일 같아요.
저는 경험이 많이 쌓이면 이러한 경향성이 차츰 없어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중요한 것이 뭔지 잘 파악하는 능력은 많은 경험으로써 생기지만
중요한 것을 먼저 보는 힘 자체를 계속 유지하려면 이를 위해 항상 의식적으로 깨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공존하기 위해서도, 우리는 공존해야 함을 항상 의식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존이 왜 우리에게 유익한지에 대해 우리 모두가 생각해 보고, 그에 따른 답을 각자의 머리속에 갖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만 공존이라는 키워드를 마음에 두며 살아갈 수 있으니까요.
언제나 담백하고, 재미있고, 깊은 내용의 글을 올려 주셔서 고맙습니다.
생산 > 공유 > 공존이란 핵심 가치의 변화가 한눈에 들어 옵니다. 좋은 지적이십니다. 다만 생산, 공유는 사용자 또는 개인의 주관적 가치가 기준이지만 공존은 객관적 가치가 더 중요하겠지요. 즉 나보다 남을 배려하는 문화, 시스템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 일부에서 존재하지만 대부분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을 테니 쉽지않은 주제입니다.
글 잘읽었습니다.
얼마전 모 TV프로그램에서 사회적 정의란 다함께 더불어 잘살아가는 사회 라고 하든말이 생각 나네요.
공존이라함은 서로 도우며 살아간다 라는 의미 이지요.
즉 자신의 것을 조금 덜어 내어 나눌수 있는 마음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미안합니다.
고맙습니다.
축하합니다.
사랑합니다.
용서하세요.
얼씨구 ~좋~다~
치유의기가 햇살처럼 내려와 온세상 모든이의 아픔과 고통이 사라진다.
행복한 하루 되세요^^
공존의 시대를 열기 위해서는 구성원간의 공의가 있어야할 겁니다. 나를 뛰엄는, 소유를 뛰어넘는 공의가 확산된다면 공존, 공생 나아가 공영하지 않을까요. 개인 소유에 대한 초월적 사화분위기를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가 정치의 핵심이 되면 좋겠습니다.
중요하지않은것에
목숨을 거는 삶도 있지요
목숨이 뭔지도 모르고….
공존의 시대를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이타심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공존의 시대에 한걸음 더 다가갈수 있을까요?
‘공존’ 이라는 중요한 화두를 꺼내주셔서 고맙씁니다. 우리의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한 공기처럼 공존을 위해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야 미래가 밝아질것 같군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