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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 관람기

오늘은 앞서 예고한 대로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Victoria and Albert Museum에 다녀왔다.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은 영국과 유럽의 중세부터 근대의 예술품을 중심으로 전 세계의 공예품과 장식 예술을 두루 소장하고 있다.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은 사우스켄싱턴South Kensington에 있는데, 이곳은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뿐 아니라 자연사 박물관Natural History Museum과 과학 박물관Science Museum도 있어서 주말이면 아주 많은 사람이 몰려드는 곳이다.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의 역사와 그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 잠시 살펴보면, 1851년 런던의 하이드 파크Hyde Park에서 개최된 세계 최초의 만국박람회Great Exhibition of the Works of Industry of All Nations 이후 그 출품작들을 전시하기 위해 만들어진 제조품 박물관Museum of Manufacture이 그 시작이다. 이 박물관은 1859년 현재의 위치인 사우스켄싱턴으로 자리를 옮기고 사우스켄싱턴 박물관South Kensington Museum으로 이름을 바꾼다. 그러다가 1899년 신관을 건립하는 과정에서 빅토리아 여왕Alexandrina Victoria은 산업과 미술의 조화를 강조하던 남편 앨버트 공Prince Albert을 기리기 위해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으로 그 이름을 바꾸도록 한다. 다만, 빅토리아 여왕은 1901년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1909년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이 새롭게 개관하는 모습은 지켜보지 못했다.

널찍한 박물관 정문을 지나 건물 안에 들어서면 블라바트닉 홀The Blavatnik Hall이라는 글씨가 맞이한다. 앞서 테이트 모던 관람기에서도 이야기했던 우크라이나 출신의 사업가이자 문화예술사업 후원자인 레오나르드 블라바트닉 경Sir Leonard Blavatnik의 이름을 딴 것이다. 이제 런던에 온 지 겨우 한 달을 조금 넘어가지만, 영국인들의 모습 중에서 항상 인상 깊게 느끼는 바는 어디를 가나 그들 사회에 긍정적으로 기여한 이들의 이름을 기억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점이다. 우리가 배워야 할 점 중의 하나가 아닐까 싶다.

로댕의 조각들

건물의 오른편에는 오귀스트 로댕Auguste Rodin의 작품을 위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로댕은 1914년 런던에서 열린 프랑스 미술 전시회에 이 작품들을 출품했는데, 전시회가 끝난 뒤 1차 세계 대전 때 프랑스와 함께 싸운 영국을 기리는 뜻으로 이 작품들을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에 선물했다고 한다.

한편, 이곳의 작품들은 대부분 <지옥의 문The Gates of Hell>과 관련되어 있다. <지옥의 문>은 단테Dante Alighieri의 소설 <신곡Divina Commedia>을 주제로 만들어졌는데, 그 자체로 로댕의 작품 세계를 집대성한 대작이다. <지옥의 문>에는 <생각하는 사람Thinking Person>을 비롯해서 190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나는 미국 캘리포니아의 스탠퍼드 대학교Stanford University에 갔을 때 거기에서 소장하고 있는 <지옥의 문>을 직접 보았던 적이 있는데 그 정교함과 웅장함에 넋을 놓고 감상했던 기억이 남아있다.

한편, <지옥의 문> 진품은 전 세계에 모두 7개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한국에 있다. 1997년 삼성 그룹이 가져온 것으로 남대문 옆의 삼성미술관 플라토(舊 로댕 갤러리)에서 감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2006년 미술관 폐관 이후로 일반에 공개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안다.

유럽의 의복 및 장식 전시실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은 시대에 따른 의복과 장식에 대한 전시로도 유명하다. 박람회에서 시작한 박물관답게, 설립 초창기부터 수집해온 약 10만여 종에 이르는 각종 의류와 그 부속품 등을 소장하고 있다. 시기적으로는 1750년부터 현재까지의 영국과 유럽 대륙의 의복, 직물 및 액세서리의 흐름을 일목요연하게 확인할 수 있다.

1700년대 프랑스 문화

17세기 절대왕정의 루이 14세Louis XIV는 프랑스가 문화적으로도 유럽의 경쟁국들을 압도하기를 원했다. 그는 웅장한 베르사유 궁전을 짓고 그 안을 사치품으로 채워 넣었는데, 이는 외국인을 비롯한 방문객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후 프랑스의 귀족들은 왕의 사치스러운 생활 방식을 모방했고, 덕분에 파리는 유럽 유행의 중심지가 될 수 있었다.

중세와 르네상스의 조각들

그다음으로 찾은 곳은 유럽 중세와 르네상스 전시실이었다. 이곳은 로마 제국의 쇠퇴부터 르네상스에 이르는 시기에 예술 및 문화의 변천사를 보여주는 곳이다. 이 시기에 로마의 유산은 유럽의 통치자, 예술가 및 학자에게 지속적인 영감을 부여했다. 천년이 넘는 기간 동안 유럽 전역에서 로마 문화는 지속해서 재구성되고 새로운 방식으로 해석되었다.

한국 전시실

1992년부터 삼성의 후원으로 영국 박물관 최초로 문을 연 한국 전시실이다. 현재 영국의 박물관에서 별도의 한국 전시실을 운영하는 곳은 대영박물관British Museum과 스코틀랜드 국립박물관National Museum of Scotland, 그리고 여기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 딱 세 곳이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한국 전시실이 일본 전시실이나 중국 전시실과는 다르게 별도의 방이 아닌 복도를 활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독립된 공간이 아니다 보니 짜임새 있는 구성은 어렵지만, 한편으로는 접근성 면에서 유리하다는 장점을 생각하며 위안을 삼아 본다.

라파엘로 카툰

1513년 교황으로 선출된 레오 10세Leo PP. X는 라파엘로Raffaello Sanzio에게 시스티나 성당Aedicula Sixtina에 걸기 위한 태피스트리Tapestry 12점의 밑그림을 주문한다. 태피스트리란 직물에 색실을 짜 넣어 만든 걸개그림을 말한다. 그런데 직물로 짜인 태피스트리를 만들기 위해서는 화가의 밑그림이 있어야 한다.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의 라파엘로 코트Raphael Court에 있는 <라파엘로 카툰Raphael Cartoons> 7점이 바로 시스티나 성당 태피스트리의 밑그림 중 일부이다. 카툰’이란 말은 큰 종이를 뜻하는 이탈리아어 ‘카르도네Cartone’에서 유래했다.

라파엘로 카툰은 단지 태피스트리를 위한 밑그림일 뿐만 아니라 라파엘로가 직접 그린 진품으로서 그 자체가 미술사적 가치가 높은 예술품이다. 한가지 특기할 만한 것으로는, 이 밑그림들은 직공들의 작업 과정 시 좌우가 바뀌는 점을 고려하여 최종 태피스트리에 좌우 대칭이 되게 그려졌다는 점이다. 한편, 라파엘로 카툰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시스티나 성당의 태피스트리들은 이후 개별적으로 보관 및 전시되다가, 라파엘로 사후 500주년을 기념하여 거의 500년만인 2020년 2월에 원래 자리에 모두 모여 전시되었다.

빅토리아 앨버트 카페

지난번 테이트 모던 관람기에서 런던의 박물관들은 구내식당이 무척 훌륭하다고 한 적이 있다. 그런데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은 그중에서도 최고로 꼽을만하다. 이곳의 식당인 빅토리아 앨버트 카페The V&A Cafe가 이처럼 훌륭할 수 있는 이유는 박물관이 처음 만들어지던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앞서 말했듯 이 박물관은 박람회에 출품되었던 최첨단 과학 기술과 장식 예술을 전시하던 곳이었고, 당시 많은 이들은 전시품들을 보기 위해 먼 곳에서도 찾아왔다. 그래서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 초대 관장이었던 헨리 콜Henry Cole은 박물관을 ‘여독을 풀 수 있는 최고의 공간furnish a powerful antidote to the gin palace‘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 전통은 여기 빅토리아 앨버트 카페에 그대로 남아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다.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의 안뜰

식사를 하는 동안 계속 눈길이 가는 곳이 있었다. 바로 박물관의 안쪽에 마련된 정원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가보니 그곳에는 이미 먼저 나온 사람들이 한가로운 한때를 보내고 있었다. 우리 부부도 정원 주변을 둘러싼 웅장한 빅토리아 풍 건물의 우아한 자태를 감상하며 오늘 하루 박물관을 관람하며 쌓였던 여독을 풀었다.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 관람기”의 3개의 댓글

  1. 우연히 페북의 독서모임에서 추천해주신 책을 보다가 영국에 계시고 저희 남편과 성이 같고 이름이 비슷해 친근감이 들어 글을 남겨봅니다. 종교도 같은 것 같고요~

    너무 겸손하고 따뜻한 마음을 갖고 멋지게 살고 계신 모습에 존경심이 일어나네요. 신승건님과 같은 분이 더 많아지길 바라는 마음에 급 팬이 되어.. 공부하시는 아내분과가족들을 위해 정성껏 반찬을 만들어 보내드리고 싶은 마음인데, 초면에 허락해주실 수 있을까요?
    (전 남편을 따라 1년 반 런던에 있게 되었고, 윔블던 가까이 사는 40대 주부입니다) 이런 글은 정말 안남기는 사람인데 저절로 글이 써지네요😊

    1. 반갑습니다. 부족함이 많은 데 좋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리고 음식을 보내주신다는 말씀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제가 지금 육아 휴직 중으로 열심히 요리 실력을 갈고닦는 중입니다. 다행히 아내와 딸 아이도 만족하고 저 자신도 요리 초보치고는 꽤 잘하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그런데 박현진 님께서 너무 맛있는 반찬을 보내주시면 제가 지금까지 즐겁게 만든 음식에 대한 진실을 직시하게 될까 두렵습니다. 일단 육아 휴직 중에는 제가 만든 음식이 최고라고 믿으면서 지내고 싶습니다. 말씀해주신 음식은 마음만 받도록 하겠습니다. 런던에서 계시는 동안 좋은 일만 함께하시길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

      1. 네, 정말 다행이네요~ 아침 저녁 쌀쌀해진 영국 날씨에 한국 음식이 그립거나 하실까봐 괜한 염려를 했군요😅 한국 들어가면 출판하신 책 구입해 읽어보겠습니다~ 오늘도 즐거운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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