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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트링 800 샤프

시중의 샤프들 대다수는 촉이 외부에 항상 노출되어 있다. 촉이란 샤프의 가장 끝에 튀어나온 부분으로 영어로는 슬리브sleeve라고 한다.1 이처럼 상시 노출된 샤프 촉은 일상생활에서 몇 가지 불편을 초래할 수 있다.

우선, 촉이 상시 노출된 샤프는 옷 안쪽에 꽂고 다니기에 위험하다. 샤프 촉은 대체로 매우 뾰족한 금속 재질이기 때문에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사람을 다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샤프 촉은 그 자체로 샤프에서 가장 약한 부분이기도 하다. 샤프를 사용하다 보면 실수로 바닥에 떨어뜨리는 일이 적잖이 일어난다. 이때 샤프 촉이 바닥에 부딪히면 휘어질 수 있다. 샤프 촉은 가느다란 샤프심의 방향을 잡아주는 부분이므로 각도가 조금만 틀어져도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 물론 필통을 가지고 다닌다면 이런 부분을 어느 정도 미리 방지할 수는 있겠지만, 직장을 다니는 성인들 중에는 평소에 필통을 가지고 다니는 게 쉽지 않은 이들도 많은 게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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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점에서 샤프 촉 수납 기능이 있는 로트링 800Rotring 800은 이런 단점을 완벽하게 보완한 샤프라고 할 수 있다. 로트링 800은 로트링 300, 500, 600, 800으로 이어지는 로트링의 제도용 샤프 중 가장 고급 기종으로, 촉 수납 기능이 가장 큰 특징이다.  참고로, 로트링 300과 500은 플라스틱 재질이고 로트링 600과 800은 황동 재질이다. 그리고 로트링 600에 촉 수납 기능을 추가한 기종이 바로 로트링 800이다.

로트링 800은 1990년대의 로트링 600G를 계승했다. 서독 시절부터 생산되던 로트링 600G는 600에 촉 수납 기능을 추가하고 선단 부분과 심경도계 테두리를 18K 금으로 도금한 당시 로트링의 최고급 제도용 샤프였다. 이후 원래 독일회사였던 로트링이 1998년 경영난으로 부도를 맞고 미국의 샌포드Sanford로 인수되었다. 이때 몇몇 제품들의 생산이 중단되면서 로트링 600G도 단종되게 된다. 그러다가 근래에 다시 복각된 것이 바로 로트링 800이다. 참고로 현재 로트링 800은 일본에서 생산되고 있다.

로트링 800은 원작인 로트링 600G과 비교했을 때 몇 가지 차이가 있다. 그중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한가지가 바로 심경도계의 유무이다. 로트링 600G에서 촉 수납을 작동시키는 부분은 심경도계를 포함한 클립 뒤쪽의 링이었는데, 로트링 800에서는 심경도계 부분이 사라지고 원래 심경도계가 있던 부분은 촉 수납을 작동시키는 용도로만 남게 되었다.

최근에는 로트링 800+라는 제품이 출시되었는데, 이것은 디지털 기기용 스타일러스 펜 기능도 겸하는 제품이다. 로트링 800+는 기본적으로 로트링 800과 동일하며 선단tip 끝에 스타일러스 펜으로 사용할 수 있는 소프트 팁이 달려있다. 로트링 800+은 로트링 800보다 20% 정도 가격이 높게 책정되어 있는데, 가격대비 효용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그렇게 좋지 않은 편이다. 개인적으로도 로트링 800+보다는 샤프 본연의 기능에 촉 수납 기능 정도만 추가된 로트링 800을 구입하는 걸 추천한다.

기능성

앞서 말했듯, 로트링 800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촉 수납 기능이다. 어떤 이들은 이를 선단 수납이라고 하는데, 로트링 800의 촉과 선단이 3단계로 이루어져 있고 그중 가장 말단의 2개 부분이 수납되는 방식이기 때문에 촉 수납과 선단 수납 모두 가능한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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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트링 800의 촉 수납 기능은 위 사진의 클립 바로 뒤에 위치한 링구조를 돌리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엄지와 검지를 이용해 링을 돌릴 때 처음에는 스프링의 저항감이 느껴지다가 일정 지점을 넘어가면 저항의 방향이 전환되면서 자연스럽게 촉을 바깥으로 밀어내는데 그 느낌이 꽤 괜찮다. 스트레스 해소 등을 목적으로 손으로 만지작거리는 장난감을 피젯 토이fidget toy라고 하는데, 로트링 800의 촉 수납 기능은 피젯 토이로서의 기능으로도 손색이 없다고 생각한다. 로트링 800 사용자들이 촉 수납 기능 하나만으로도 로트링 800을 선택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고 하는 데 나도 그 생각에 동의한다.

로트링 800과 관련하여 흔히 제기되는 한 가지 문제점 중 하나가 바로 촉의 유격이다. 유격이란 필기를 할 때 촉이 흔들리는 느낌이 드는 걸 말하는데, 로트링 800의 경우 촉 수납 기능이 추가되면서 촉의 유격이 발생하게 되었다. 한편, 촉과 선단이 고정된 로트링 600에는 해당 사항이 없다.

그런데 로트링 800의 유격은 사용자 개개인의 유격에 대한 민감도에 따라 그 평가가 달라진다. 나도 처음 로트링 800을 구입하면서 유격에 대한 사용기들을 많이 접했는데 실제로 사용하면서 크게 불편을 느끼지는 못하고 있다. 참고로, 로트링 800은 0.5mm, 0.7mm, 2.0mm의 세 가지 심경이 있는데, 가장 굵은 심경을 적용한 2.0mm는 촉 수납 기능이 없고 유격 관련 논의에서도 제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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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트링 800을 이야기할 때 또 한 가지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로렛Roulette가공된 그립grip부이다. 널링knurling가공이라고도 하는 로렛가공은 금속을 미세한 격자무늬로 깎아서 까끌까끌한 느낌이 나도록 한 것을 말한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으로는 손톱을 다듬는 데 쓰는 금속 줄과 비슷한 느낌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로트링 800의 그립부는 손톱 다듬는 용도의 금속 줄보다는 조금 더 부드러운 느낌이다.

 

노브knob 뚜껑에는 구멍이 뚫려있어서 지우개 위에 끼울 시에 공기가 빠져나갈 수 있게 되어 있다. 지우개 소켓에도 로렛가공이 되어 있으며 지우개에는 클리너 핀cleaner pin이 1개 끼워져 있다.

외장이 황동으로 된 로트링 800의 무게는 28g으로, 주로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다른 샤프들에 비해 확실히 무겁다. 이는 사용자에 따라서 단점이 될 수도 있고 장점이 될 수도 있다. 촉 수납 외에 구조와 소재가 거의 동일한 로트링 600도 마찬가지지만, 로트링 800은 필기할 때 무게 중심이 낮아서 묵직한 느낌이 안정적인 필기에 도움이 되는 면이 있다.

심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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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트링 800은 검은색과 은색의 두 가지 색상이 있다. 둘 다 재질 자체는 황동으로 되어 있고, 색상만 검은색 혹은 은색의 도장으로 마감되었다는 차이가 있다. 내가 사용 중인 로트링 800은 검은색으로, 무광 도장은 가볍지도 그렇다고 부담스럽지도 않은 느낌을 준다. 그런데 오랫동안 사용하다 보면 이 검은색 도장이 벗겨져서 내부의 황동이 노출된다고 한다. 나처럼 물건 하나를 오랫동안 사용하면서 익숙해지는 느낌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크게 개의치 않을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검은색을 선택했지만, 은색도 은색 나름의 밝은 느낌이 있어서 사람에 따라서는 은색을 더 선호할 수도 있겠다.

내구성

샤프에서 가장 취약한 부분은 역시 촉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로트링 800과 거의 동일한 재질로 이루어진 로트링 600은 가볍지 않은 무게 때문에 실수로 떨어뜨렸다가 촉이 휘는 상황이 심심찮게 일어난다고 한다. 그에 비해 로트링 800은 촉 수납이 가능한 제품이므로 이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촉 수납을 하지 않은 상태로 떨어뜨리면 로트링 800도 촉 손상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립과 배럴barrel을 분리하면 노크 시 샤프심을 잡아서 밀어내는 구조인 클러치clutch 부분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로트링800은 그립과 배럴을 분리해도 클러치 자체를 확인할 수 있는 건 아니고, 클러치를 보호하고 있는 커버만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로트링 800이 출시된 직후에는 이 클러치 커버 부분은 플라스틱으로 되어 있어서 로트링의 최고급 제도용 샤프라는 위상에 맞지 않는다는 평가가 많았다. 다행히  2017년 후반부터 생산되는 제품에서는 위 사진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금속 부분으로 변경되었다.

총평

검은색 로트링 800의 무광 색상은 질리지 않는 단순미가 있다. 은색은 밝은 느낌이지만 그렇다고 가볍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28g의 샤프치고는 다소 묵직한 무게감은 필기 시에 부담보다는 안정감을 준다. 촉 수납 기능은 이동 시의 안전과 촉 파손의 방지에 도움이 된다.

하지만 가벼운 필기구를 선호하거나 샤프 촉의 유격에 민감한 사용자에게는 추천하지 않는다. 또한 샤프치고는 가격대가 높으므로 이 점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분류상으로는 제도용 샤프이지만, 일상생활에서 필기용으로 사용하기에도 부족함이 없다. 늘 가지고 다니면서 쓸만한 괜찮은 샤프를 하나 찾고 있다면 충분히 구입을 고려해볼 만한 샤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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