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년도 더 지났지만 그날의 긴장감은 아직도 생생하게 나의 기억 속에 남아있다. 어둠이 짙게 깔린 밤, 우리 가족은 차를 타고 어딘가를 다녀오는 길이었다. 어머니가 운전석에서 차를 몰고 있었고, 아버지는 조수석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나는 뒷자석 오른편에, 동생은 왼편에 앉아 있었다.
동네에 진입해서 곧 집에 도착하려던 상황이었다. 나는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집 근처의 익숙한 건물들을 무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 때, 갑자기 어머니가 브레이크를 깊숙히 밟으며 급제동을 했다. 앞을 바라보니, 바로 앞에서 가던 경차 한 대가 비상 깜박이를 켠 채로 멈춰섰다. 그러더니 그 경차의 우측 뒷문이 열리고 차에 탄 사람들끼리 실랑이가 벌어지더니, 급기야 어떤 여자가 차 밖의 인도로 내쳐졌다. 그리고 경차는 비상 깜박이를 끄고 그대로 내달렸다.
당황스러운 순간이었다. 나는 그때까지 그런 상황과 마주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달랐다. 조금의 지체도 없이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잠깐 가서 살펴봐야겠다고 했고, 어머니는 그러라고 하며 그 사이 잠시 차를 안전한 곳에 정차하고 있겠다고 하였다. 순식간에 일어난 부모님의 의사 결정 과정을 나는 뒷자석에서 말없이 지켜보았다. 나는 차에 탄 채로 창문을 통해 그 후 일어나는 일을 지켜보았다.
아버지는 그 여자가 다친 곳은 없는지 살펴보고 안전한 곳에 앉도록 안내하였다. 그리고 근처에 있던 공중전화로 가서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잠시 후 경찰차가 도착했고, 아버지는 경찰에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전하고 다시 조수석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우리는 원래 목적지인 집으로 향했다.
그날의 짧은 기억은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어려움에 빠진 사람을 돕는 것은 여유있는 자가 마땅히 해야할 일이라는 가치관을 갖게 하였다. 이제껏 살아오는 동안, 양심과 이익이 서로 충돌할 때마다 이렇게 형성된 가치관은 내 도덕적 판단의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하지만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어려움에 빠진 이들을 돕는 것이 절대적인 정의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와는 상반된 방향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이다. 나는 그 순간 아버지의 행동이 사회적으로 정의롭긴 하지만, 가족과 본인 스스로를 일시적으로나마 위험에 노출시킨다는 측면에서는 부정적인 면도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모든 일은 양면성을 가진다.
그래서 ‘도덕적 딜레마’의 상황에서 어떤 것이 옳은 판단인가 결정하는 것은 어려운 문제이다. 각각의 상황과 관점이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의 도덕적 결정에 대해서 함부로 자신의 잣대를 들이대며 옳고 그름을 판단해서는 안된다. 그것이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다.
50여 년간 정신의학과 의료 인류학 분야에서 독보적인 연구 성과를 보여온 아서 클라인만Arthur Kleinman은 저서 『당신의 삶을 결정하는 것들 원제 : What Really Matters | 아서 클라인만 지음 | 이정민 옮김 | 북로그컴퍼니 | 2016년 01월 20일 출간』에서 도덕적 가치관을 지켜가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저자는 임상 경험에서 만난 사람들이 처했던 ‘도덕적 딜레마’의 상황을 소개하고 도덕적 가치관 정립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한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도덕적 딜레마’의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각각의 경우 당신이 실제로 그 상황에 놓였다면 어떻게 했을지 생각해보자.
당신이 전쟁터에서 작전 중 적의 군의관을 만났다. 비무장상태의 군의관은 부상당한 병사들을 치료 중으로, 총을 겨누고 있는 당신에게 아무 저항도 하지 않고 있다. 그저 당신의 결정을 담담하게 기다릴 뿐이다. 만약 이 군의관을 살려둔다면 그가 치료한 병사들이 후에 당신을 다시 공격하게 될 수도 있다. 이때 당신은 이 군의관을 죽일 것인가, 말 것인가?
당신은 아프리카 내전 지역에서 구호 활동을 벌이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열악한 환경인데 반군과 정부군에게 번갈아가며 체포 당하며 죽음의 위기를 수 차례 겪고 있다. 당신은 이 지역을 떠날 것인가, 위험에도 불구하고 남아서 난민들을 도울 것인가?
직장에서 남을 짓밟고 자신만 승승장구 하려는 동료가 있다. 불안정한 정국에 당신은 그 동료 때문에 가족을 잃는 등 큰 피해를 입은 적이 있다. 세월이 흘러서 지금 그 동료에게 복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하지만 그 동료는 당신에게 아량을 베풀기를 간청한다. 당신이라면 동료를 무너뜨릴 수 있는 그 기회를 활용하겠는가, 아니면 동료를 용서하겠는가?
인턴 의사인 당신 앞에서 한 소년이 희귀한 간질환으로 생명을 잃었다. 가족들은 슬픔에 잠겨있는데, 당신의 상관인 담당 교수는 연구를 위한 간조직을 얻기 위해서 부검을 하려고 한다. 당연히 소년의 가족들은 이런 담당 교수의 시도에 강력히 반발한다. 담당 교수는 당신에게 가족들 몰래 소년의 간조직을 떼어오라고 압박한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의 앞길에 훼방을 놓겠다고 위협한다. 당신은 소년의 가족의 동의 없이 간조직을 떼어올 것인가, 아니면 담당 교수의 지시를 끝까지 거부할 것인가?
이처럼 전쟁, 질병, 사회, 정치적인 한계 등으로 인해 사람들이 평생 견지해온 가치관이 무너지는 과정에서 ‘도덕적 딜레마’가 일어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신의 도덕적 가치관을 따르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저자는 이들이 내린 결정이 도덕적으로 옳고 그르다고 판단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그들이 놓여있는 상황과 관점에 따라 서로 다른 도덕적 결정이 내려질 수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저자의 이야기를 통해 나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았다. 자만심에 젖어서 다른 사람들의 행위에 도덕적 옳고 그름을 함부로 판가름하려고 하지는 않았나 반성하게 된다. 생각해보면 나는 상대방이 놓인 환경에 대해서 전부 아니 일부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으면서도 옳으니 그르니 판단했던 적이 있다. 그런 기억들을 떠올려보니 얼굴이 화끈거리고 창피한 마음이 든다.

‘도덕적 딜레마’라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주제이다. ‘도덕적 딜레마’를 다루기 위한 첫 걸음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마다 상이한 상황과 관점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는 것이다. 이 책을 통해서 그런 점을 깨닫게 되었음에 감사하다.
요즘 인공지능이 화제다. 앞으로 인간의 많은 역할을 기계가 대체할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큰 고민거리가 남는다. 기계가 인간의 역할을 대부분 대체하게 되었을 때 ‘인간의 역할은 과연 무엇인가’라는 고민이다. 마지막까지 인간에게 남겨질 역할 가운데 하나는 ‘도덕적 딜레마의 해결’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마지막까지 기계가 대체할 수 없는 영역이다.
왜냐하면, ‘도덕적 딜레마의 해결’을 위한 도덕적 판단에는 책임이 따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람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지만 기계에게는 그럴 수 없다. 기계의 행위의 결과로 책임질 상황이 벌어지라도 그 책임 주체는 그 기계의 설계자나 운용자인 사람이다. 따라서 도덕적 판단이 가져올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는 것은 사람 뿐이다.
도덕적 판단은 사람만이 할 수 있으므로 ‘도덕적 딜레마를 해결’하는 것은 앞으로도 사람 고유의 영역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이 도덕적으로 옳고 그른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는 능력은 앞으로 더욱 중요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울러, 도덕적으로 옳고 그름을 말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놓인 환경적인 배경에 대한 고려도 반드시 필요하다. 따라서 누군가를 완벽히 알 수 없는 이상, 그 사람의 도덕적 옳고 그름을 섣불리 판단하는 것은 오만한 행동이라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남을 판단하기 이전에 스스로가 가장 잘 아는 자기 자신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이 우선 되어야 한다.
오늘날 우리 삶 깊숙이 들어온 SNS 덕분에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평가하는데 그 어느 때보다 익숙해져 있다. 그중에는 도덕적 판단도 큰 부분을 차지한다. 남을 평가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거운 주제인지 진지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다음 글이 곧 이어집니다.)
본문에 몇가지 예문을 두셨는데
과연 그 질문에 당당하게
답을 할수있을까하는 생각을
저도 해 봅니다
자유로울수만은 없겠네요..
남을 평가한다는 것도
이제부턴 함부로 할것이 못됩니다..
잘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