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야흐로 대선의 계절이다. 선거를 앞두면 으레 세상이 시끄럽기 마련이지만, 이번에는 그 정도가 유달리 심한 듯 하다. 나름대로 이유를 짐작해보건대, 대략 세 가지 정도를 꼽을 수 있겠다. 먼저, 그 어느 때보다 승패를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양강의 대립 구도가 뚜렷하다. 둘째, 대표 주자들이 모두 도덕적인 흠결이 있어서 그들에게 표를 주려는 이들조차도 ‘그래도 저쪽보다는 낫지’라는 참담한 심정이다. 마지막으로, 바로 그 흠결 때문에 열성 지지자들은 자기 후보의 장점을 부각하기보다 상대 후보를 흠집 내는 데 열심이다.
오늘은 적자생존Survival of the fittest이라는 주제를 꺼내려다 보니 선거 이야기부터 하게 되었다. 적자생존은 ‘가장 적합한 자가 살아남는다’는 뜻으로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이 『종의 기원 On the Origin of Species』에서 주창한 이론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여기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하나 있는데, 적자생존은 다윈이 창안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실제로 다윈은 처음 『종의 기원』을 펴냈을 때 적자생존에 관한 내용을 다루지 않았다. 그것은 이후 다윈의 추종자를 자처하는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가 다윈을 설득하여 『종의 기원』 5판에 새롭게 추가한 개념이다.
그러나 적자생존은 언젠가부터 진화론의 동의어, 더 나아가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섭리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적자생존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관점은 시간이 흐르면서 인간의 사고방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승자가 모든 것을 독식하고 패자는 제거된다는 생각이 우리의 의식 속에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적자생존이 자연의 섭리처럼 받아들여지는 데 감히 누가 그것을 부정할 수 있을까.
사실 적자생존의 가장 극명한 사례는 자연에 있지 않다. 선거야말로 적자생존의 표본이라고 할만하다. 표를 얻는 경쟁을 통해 승자와 패자를 가리고 승자만이 생존하는 선거는 적자생존의 핵심 요소를 그대로 담고 있다. 나는 선거 제도가 사람들로부터 큰 무리 없이 받아들여지는 데에는 적자생존에 대한 당연시도 한몫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만약 적자생존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이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남을 꺾고 지배하는 자가 살아남은 게 자연의 섭리가 아니라면? 적자생존보다 생존에 더 유리한 방법이 있고, 그것이 바로 우리 인류가 문명을 이룩한 힘의 원천이라면?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원제: Survival of the Friendliest | 브라이언 헤어 , 버네사 우즈 지음 | 이민아 옮김 | 박한선 감수 | 디플롯 | 2021년 07월 26일 출간』의 공저자 브라이언 헤어Brian Hare는 우리 인류를 번성하게 한 비결로 적자생존 대신 ‘자기가축화 가설Self-domestication’을 제시한다. ‘자기가축화 가설’은 원래 저자의 지도 교수였던 하버드대 인간진화생물학과의 리처드 랭엄Richard Wrangham이 주창했던 가설인데, 하나의 종이 진화의 과정을 거치는 동안, 강자가 약자를 짓밟기보다 서로 보살피는 방식을 택했을 때 즉 스스로를 가축화했을 때, 생존에 유리했다는 이론이다.
저자는 자기가축화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우리,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라고 말한다. 아주 오래전 지구에는 호모 사피엔스 말고도 네안데르탈인Homo neanderthalensis이나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 같은 다양한 종의 인류가 살았는데, 그들은 호모 사피엔스보다 신체적, 지능적으로 부족함이 없었음에도 멸종에 이르렀다. 저자에 따르면 우리 호모 사피엔스는 서로서로 보살펴주는 자기가축화의 길을 걸은 덕분에 번성한 반면, 나머지 인류는 적자생존의 법칙에 따라 각개 전투의 길을 걸었고 결국에는 멸종되었다고 한다.
저자는 인류 외에도 여우를 대상으로 한 자기가축화 실험, 가축화된 개와 야생 늑대의 차이, 적자생존 법칙이 지배하는 침팬지 사회와 집단 내 약자를 보살피는 보노보 사회의 비교를 통해서 자기가축화가 한 종의 생존에 미치는 영향을 살펴본다.

물론, 자기가축화 또한 각각의 종이 환경에 최적화하여 찾아낸 나름의 생존 방식이라고 본다면 이 또한 하나의 적자생존 법칙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승자와 패자가 극명하게 갈리는 적자생존과는 다르게, 자기가축화는 서로 협력하고 결국에는 길들여지는 수준에 이른다는 점에서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한편, 저자는 자기가축화에 내포된 위험성에도 주목한다. 저자는 자기가축화된 종이 자기 집단 내부에 한없이 너그럽고 다정한 데 반해 이질적인 외부 집단에는 공격성을 보일 수 있다고 밝힌다. 내부를 향한 다정함은 외부의 위협을 맞닥뜨렸을 때 잔인하리만치 적대적인 태도로 돌변할 수 있다는 뜻이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라는 우리나라 속담이 자기가축화의 속성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그렇게 안으로 굽은 팔의 팔꿈치로 내 편 아닌 누군가의 턱을 가격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저자는 이처럼 자기가축화에 내포된 배타성을 상대의 ‘비인간화dehumanization’라는 말로 대신한다. ‘비인간화’란 쉽게 말해서 내 편이 아니면 인간도 아니라는 뜻이다.
내 편이 아니면 인간도 아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들이 있지 않은가. 그렇다. 인터넷 포털 뉴스 속의 정치인들과 그 아래에 줄줄이 댓글을 다는 군상들이다. 같은 편의 흠결에 대해서는 한없이 너그럽지만, 다른 편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바로 그 모습들 말이다. 상대방을 같은 인간으로 여긴다면 결코 할 수 없는 행동이다.
더 끔찍한 사실은 내 편을 감싸기 위한 상대의 비인간화가 그걸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더 무서운 것이 남아있다. 내가 상대방을 비인간화하면 그 상대는 또다시 나를 비인간화 할 수 있는 강한 동기가 생긴다. 저자는 이를 두고 ‘보복성 비인간화retaliatory dehumanization’라고 했다.
그렇게 끝없이 물고 물리는 악순환이 시작된다. 이쪽이 저쪽을 비인간화했기에 저쪽은 이쪽을 비인간화할 명문이 생기고. 그것은 저쪽을 향한 또 다른 비인간화로 이어지고. 그렇게 갔다가 이쪽으로 다시 돌아오고. 다정한 우리와 다정한 그들 사이의, 또 다른 차원의 적자생존 경쟁이 벌어진다.
우리 인류는 경쟁으로 승자를 가리는 적자생존 대신 서로를 보살피는 자기가축화의 길을 택한 덕분에 오늘날 눈부신 문명을 이룩했다. 하지만 그것은 자기편을 향한 다정함 이상은 아니었다. 실제로 우리의 다정함은 다른 국가, 다른 문화, 다른 인종, 다른 사상에 속한 사람들에게까지는 미치지 않았다. 우리는 나와 다른 사상과 모습을 가진 외부인을 위협으로 여기며 비인간화했고, 그것은 또 다른 보복성 비인간화로 이어졌다.
어떻게 하면 이 악순환을 끊을 수 있을까. 저자는 책에서 나름의 해결책도 제시한다. 그 내용을 세 가지 정도로 추려보겠다. 다만 이것은 저자의 생각으로부터 내가 유추한 내용으로, 저자의 본래 견해와 완전히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을 미리 밝힌다.
먼저, ‘접촉’이다. 혹시 다른 정치적 견해를 가진 이들의 생각을 바꾸려고 설득해본 적이 있는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시도를 하는 순간 당신은 이미 그들과 다른 편이란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의도를 갖고 상대방의 생각을 바꾸려는 ‘교육’이 비인간화의 악순환을 끊기 위한 답이 될 수 없는 이유다. 반면에, 아무런 의도를 갖지 않고 지속되는 ‘접촉’은 상대의 경계를 허무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저자는 책에서 이를 뒷받침하는 몇 가지 사례를 제시한다. 예컨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유대인을 도왔던 사람들의 동기를 알아보았더니 그 이전에 유대인과 이웃으로 지냈던 경험이 있었던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또 다른 예로, 미국에서 흑인과 백인이 같은 마을에 거주한 뒤로 서로에 대한 반감이 줄어들었다고 한다. 이처럼 잦은 ‘접촉’의 기회는 서로에 대한 비인간화를 막기 위한 훌륭한 해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다음, ‘공감’이다. 접촉은 상대방에 대한 공감으로 이어진다. 앞서 상대방을 비인간화하면 이것은 다시 나를 향한 상대방의 비인간화를 불러올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를 보복성 비인간화라고 했다. 이를 거꾸로 생각하면, 거듭된 접촉으로 상대의 마음에 공감하고 더 나아가 자신과 같은 인간이라는 점을 깨닫게 된다면, 상대 또한 나를 인간으로 대하는 선순환으로 이어질 수 있다. 저자는 이를 두고 ‘보복성 비인간화’에 반대되는 의미로 ‘보답성 인간화reciprocal humanization’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각성’이다. 우리 스스로 누군가의 정치적 도구가 되지 않기 위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모든 정치인들이 그렇지는 않겠지만, 그렇지 않기를 바라지만, 오늘날 일부 정치인들은 대중의 적개심을 부추겨서 그들의 입지를 굳히는 전략을 쓰고 있다. 그러한 정치인들에게 서로서로 비인간화하면서 헐뜯고 싸우는 대중은 좋은 먹잇감일 뿐이다. 어수선한 시기, 정치인들의 부추김에 놀아나지 않는 지혜가 필요하다.
우리 인류가 오늘날의 문명을 이룩할 수 있었던 비결은 경쟁을 통한 적자생존이 아니었다. 오히려 경쟁에 불리한 이들조차 보듬으며 서로가 서로에게 길들여지는 다정함이었다. 하지만 그 다정함은 아직 자신이 속한 집단에만 머무르고 있고, 이질적인 외부 집단에 속한 이들에게까지는 그 온기가 전해지지 못했다. 접촉과 공감 그리고 각성으로 이어지는 다정함의 선순환이 필요한 이유이다.
이제 본격적인 대선 정국이다. 지금 어쩌면 상대편 후보가 승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걱정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가 정말로 걱정해야 할 것은 상대편 후보의 승리가 아니다. 상대 진영에 속한 이들은 나와 같은 인간이 아니라고 여기는 비인간화, 그리고 그 비인간화가 다시 나를 겨누는 보복성 비인간화야말로 진정 우리가 경계해야 할 대상이다. 물론 말처럼 쉽지는 않을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우리 인류가 진화의 다음 단계로 도약하기 위해 넘어야 할 과제일지도 모르니까.
(다음 글이 곧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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